새정치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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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1995년 9월 5일, 당시 김대중의 주도 아래 민주당(1991년)에서 분당하여 창당한 중도개혁노선의 정당으로, 약칭 '''국민회의'''로 부른다.[2] 다만 1998년 이후로는 재야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이 대거 영입되면서 진보주의 성향도 함께 띄기 시작했다.
1987년 11월 창당한 평화민주당의 구성원과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취했던 진보적 재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하였는데 그 중 이기택 등 통합민주당의 당권파는 제외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법적 전신 정당 중에 가장 최초로 창당된 정당이다.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당으로 끝나지 않고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한 정당이기도 하다.[3]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ncnp.or.kr', PC통신 접속 명령어는 'go ncnp'였다.
2. 역사
2.1. 창당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자신의 계파를 중심으로 민주당(1991년)을 탈당한 뒤 창당한 정당으로서, 창당과 동시에 동교동계('내외문제 연구회(최대 57석)')를 중심으로 원내 의석 53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됨으로써, 정계는 1여 3야(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1995년))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당시 민주당은 비주류(꼬마민주당 출신)인 이기택 총재가 이끌고 있었다. 이기택 총재는 김대중 전 총재는 2번 떨어졌기에 97년 대선은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정계은퇴 번복도 마뜩해 하지 않았다. 92년 대선에서 삼당합당에 동참하지 않고 김대중을 묵묵히 도운 입장에선 당연했던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95년 첫 민선 지방선거로 확인 한 것은 DJ의 귀환과 JP의 부활이었으며, 특히 김대중이 공천한 조순이 당선되고 장경우와 노무현이 낙선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미 지선 공천 과정에서도 이기택 총재는 막후 실력자 격인 김대중과 여러차례 갈등했다. 김대중 입장에서도 다음해 총선 공천권을 놓고 '실력행사'는 가능했겠지만, 이미 경기도 지사 공천 과정에서도 각목사태가 벌어지는 등 큰 잡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신민당의 역사가 있는 마포당사까지 남겨두고 탈당을 불사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4]
1995년 7월 28일 당 대변인은 신당의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김대중은 "당(黨)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예로 인도의 국민회의가 있다"고 말하는 등 국민회의 라는 명칭에 애착을 보였으며, 유신정권 시기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다. 언급된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가 이끌던 중도 민족주의 정당이다. 당 관계자는 "국민회의라는 명칭은 여러 의견을 포용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이미지를 주고, 당이라는 명칭보다 민주적이고 국민적인 이미지를 주기때문에 선택했다"고 설명했다.신당 명칭 「새정치국민회의」로
김영삼의 "신"한국당, 1992년 대선에서의 "'한국병'의 치료사"라는 이미지와 대비되는 "새"라는 조어를 붙인 정당. 일단 평화민주당의 분위기를 빼는데는 성공했다는 평이 당시에 있었다.[5]
국민회의는 대통령 중심제(= 의원 내각제 반대)와 중소기업의 육성, 여성부 신설, 국가보안법의 민주질서보호법으로의 대체, 남북연합통일방안 등을 강령으로 삼고, 중산층과 서민 대중을 위한 국민정당을 표방하면서, 보수 중산층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중도보수노선을 채택하였다. 동시에 이는 90년대 후반 대두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의 "신진보주의(신개혁주의)" 노선(소위 제3의 길)의 수용이기도 했다. 대놓고 비례대표를 사학 재단 이사장을 1번으로 하질 않나... 같은 시기 신한국당은 개혁을 앞세우며 혁신공천을 내세웠다. 사실 이때는 양당이 모두 중도로 달려갔던 시기.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다.
2.2. 총선 부진
창당 다음해 치러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회의는 야권 분열로 말미암아 그간 강세지역으로 손꼽혔던 수도권에서 부진하며 79석으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다. DJ 개인은 자신이 전국구 의원이 되는데 고작 1번 차이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이 14석이 늘었고, 여당은 26석이 줄었다"[6] 라고 위안했지만, 사실상 100석 이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패가 맞았다. 반면 여당인 신한국당은 대통령의 임기 후반임에도 개혁공천과 야권분열 덕분에 (예상인 155+a보다는 저조했으나) 139명이나 당선되었으며[7] , 기어이 무소속과 자유민주연합 의원 4명을 모아 157석으로 과반을 달성하고 만다.[8]
이런 패배에는 민주당계 야권의 분열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실제로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의 표분산으로 신한국당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지역구가 30군데가 넘었으며, 특히 서울 강북과 경기 남부 등 기존 민주당계 정당이 강세를 보이던 수도권에서 이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9][10] 총선 결과 민주당계 야권 전체 의석은 98~95석에서 94석(79+15)으로 오히려 줄었다. 이 모든 게 김대중의 "대통령병" 때문이라며 은퇴 번복과 분당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더욱이 이 해 말에는 신한국당의 '제3자 개입'을 막는 등의 내용을 추가한 크리스마스 노동법 날치기가 일어나면서 아쉬움이 커졌다. 이 상황에서도 국민회의는 강경한 장외투쟁을 하지 않음으로서 진보에겐 불신을 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보수 표심 달래기 행보를 지속한다.
한편 자유민주연합은 충청, TK, 강원에서 "녹색 바람"으로 2배로 팽창, 25석을 늘려 50석으로 강력한 제3당이 되었다. 이런 형국은 DJ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필연적으로 손을 잡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원 내각제 개헌에 동의하게 된다.
2.3. DJP연합과 대선 정국
대선 초기부터 DJP연합을 바탕으로 줄곳 1위로 앞서가던 DJ였다. 한나라당의 후보들은 대선 경선에서 박찬종, 이인제를 필두로 "9룡"이랄 정도로 각축을 벌였으며, 결국 허주 김윤환의 이회창 옹립에 따라 이인제가 패배했다. 그러나 아들의 병역의혹이 불거지면서 이회창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인제가 전격적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해서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한다. 보수 성향의 이인제가 제3후보로 출마하면서, DJ측은 더더욱 호재를 맞게 되었다. 거기에 1997년 외환 위기가 겹치면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지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회창의 끈질긴 추격은 계속되었다. 1997년 10월 총선 참패후 살길을 도모하던 조순의 통합민주당(1995년)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이인제 뽑으면 DJ가 된다"는 논리로 이인제의 지지율을 계속 빼왔다. 이회창 후보는 기어이 1달 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을 빼앗으며 2위를 탈환했지만, 추격전이 너무 늦어 결국 2위에 머물렀다.
결국 김대중은 39만표(1.6%) 차로 대선 4수만에 간신히 당선되었다. 이 승리는 기존 야당 고정표 + DJP연합에 따른 충청표와 일부 중도보수표 + 이인제 분열효과 + 경제위기에 따른 정권 교체 열망 + 권영길(국민승리21) 후보와의 연대를 차단함으로서 얻은 중도표[11] + 권영길에서 이탈한 '비판적 지지'의 진보표 + "병풍"으로 인한 군복무 병사들의 지지를 모아 얻은 아슬아슬한 승리였다는 평이 많다. (거꾸로 말하면, 이 중 단 한 가지라도 빠졌다면 정권 교체는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선 1년전부터 여론조사에서 근소하게나마 계속 대선후보 1위를 유지했으며, 1위에 대한 밴드웨건 효과 등과 조순 등 반DJ 민주계가 모조리 3김정치와 정치공학에 반대한다는 논리로 여당에 참여하는 등의 사례도 많았다는 점에서 "김대중이 신승한게 아니라 이회창이 석패했다"라는 시각도 있다.
여하간 이 선거는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New 김대중"을 내세운 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과 달리 이미 96년부터 지속했던 '''"준비된 대통령"'''을 기반으로 한 안정 전략의 승리였다. 그 대표적 광고가 DJ DOC의 노래를 패러디한 "DJ와 춤을"#인데, 지금도 노무현의 기타 연주, 이명박의 국밥 먹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대선광고의 예로 꼽힌다. 이 광고에서는 노무현이 직접 등장하고,[1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연상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5년 후를 예언한 광고"라는 드립도 있다. '''"행복한 가정,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라는 아무리 봐도 보수적이고 여당스러운 선거 구호가 제대로 먹혔다. 거기에 더해 광고에서 김대중은 젊은 층들에게는 딱딱할지도 모르는 정권 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준비된 자신에게 꼭 한번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이른바 '구호(프레임)의 연성화') DJP 연합 강조를 위해 김종필과 박태준 등 자민련의 보수인사들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이미지나 신세대적 감각의 원곡, 당 소속 연예인(정한용, 손숙)의 등장 등.. 가히 가장 모범적이고 집약적인 선거광고랄까.
반면 이회창의 선거 구호는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3김 정치 해소"를 주장하는 아무리 봐도 진보 성향의 야당에게나 어울릴법한 구호를 내세웠다. 처음 실시된 TV토론 역시 DJ의 지지율을 높이는데 한몫 했다.
2.4. 재야 운동가 영입
1998년 김대중 총재가 젊은 정치인 영입을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서 새정치국민회의에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 등 재야운동가들이 대거 영입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민주당게 정당에서의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으며, 주목받지 못하였다가, 16대 총선에서 임종석, 오영식 의원이 당선됨에 따라서 이들의 입지가 한층 강화되었고 훗날 열린우리당과 더불어민주당에 주류로 자리매김한다.
이때 새정치국민회의에 재야 정치인들로는 386 재야운동가 출신인 오영식, 임종석, 우상호, 송영길, 이인영 등과 노동운동가 출신인 심재권, 신기남, 박노해, 이학영 등이 있었다.
2.5.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합
한나라당에서 탈당하거나 신한국당과의 통합을 반대하여 통합민주당에서 탈당한 국회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에 대거 합류했으며, 이인제 의원이 주도한 국민신당 등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래없는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합을 실시하게 되었다.
2.6. 김대중 대통령 당선 - 여당 '국민회의'
그렇게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40.3%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고,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함으로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국민회의로서는 전노 사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13] 김영삼 대통령 본인이 사면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집권 반년만에 치러진 선거로, 여당이 지방선거에 승리한 첫 사례이자, DJP연합의 위력과시였다. 국민회의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두 곳과 호남, 제주를 비롯한 6곳에서 승리하였고, 자민련 역시 충청과 인천 4곳에서 승리하여 16개 광역단체 중 10개를 압승했다. 한나라당 역시 영남과 강원 6곳에서 승리했지만, 내용 면에서 서쪽 지역 전역을 석권한 국민회의가 압승이었다. 이 시기가 국민회의의 전성기였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 이후 안정적인 국정운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계개편을 추진하였다.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을 영입하고 이인제, 이만섭의 국민신당과 합당하는 방식을 통해 여대야소를 만들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개혁정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영남권(TK, PK)에서도 의석을 내는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한다는 차원에서 2000년 1월 20일, 새로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합당되는 형식(흡수합당)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또다시 실패한다.)
3. 성향
3.1. 당명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명에는 3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모든 분애에 온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를 표방하며
둘째, 통일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민족통일의 주도권을 가지며
세째, 21세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새시대를 지향하는 정당이라는 의미을 지닙니다. 또한 국민회의는 국민이 추종하고 따라가는 정당이 아니라 온국민이 참여하는 정당으로 국민의 실체는 중산층과 서민입니다. 따라서 국민회의는 바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중도 정당임을 당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2. 심벌
'새정치국민회의'의 심벌은 새싹, 비둘기가 하나의 나무 형태로 결합된 디자인으로 새싹이 나무로 자라나고 나무가 모여 큰 숲을 이루듯이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비상은 우리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약속하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푸른색(새싹)은 국민에게 희망을, 녹색(비둘기)의 맑고 깨끗한 우리의 환경을 상징함으로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지향하는 미래사회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3.3. 강령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조국광복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선도해 온 이 나라의 정통민족, 민주세력이 모인 정당이다.
우리당은 21세기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새로운 도약과 번영을 위해서 참여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중도적 국민정당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정치를 추구한다. 새정치는 참여의 정치, 통일주도의 정치, 21세기의 격변에 대비한 정치이다.
우리당 이러한 새정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참여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안정속에 개혁을 실현한다. 우리당은 국민의 참여속에 언제나 국민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당은 중산층에게 안정을, 서민에게 희망을, 여성에게 기회를, 젊은이에게 꿈을 주는 정치를 실현할 것이다.
우리 새정치국민회의는 21세기를 앞두고 새정치를 성취하고자 하는 온 국민의 열망을 겸허히 받들어 지혜와 역량을 모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것을 엄숙히 천명하면서 1995년 9월 5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강령을 채택한다.
1. 정 치 : 참여의 정치
2. 경 제 :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3. 사 회 : 안정과 꿈과 희망의 건강사회
4. 문 화 : 문화선진국의 지향
5. 교 육 : 지식혁명의 주도와 전인교육
6. 환 경 : 자연과 공존공영
7. 과학기술 : 과학기술전쟁에서의 승리
8. 여 성 : 평등과 참여의 보장
9. 청 년 : 사회의 공동참여자
10. 외교안보 : 자주협력의 외교, 안보체제
11. 통 일 :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민족통일
12. 21세기 : 도덕적 선진국가
***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새정치5대 목표 ***
1. 국민참여의 정치
2.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3. 안정과 신명의 사회
4. 화해와 협력속의 통일
5. 도덕적 선진국가
4.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 조상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 정당을 논할 때, 사람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새정치국민회의부터 직계 조상이라 보는 견해가 강하다. 물론 1945년 창당된 한국민주당 혹은 1955년 창당된 민주당 혹은 1967년 창당된 신민당 혹은 1987년 창당된 평화민주당으로 거슬러 가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지만, 현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스스로가 정당 연혁 직계로 새정치국민회의를 표시하고 있다.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이나 구성원들의 성향도 이때부터 확립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 형성된 성향(정치적 정체성)이 이후 민주당계 정당들로 이어지면서 이에 맞는 사람은 들어오고 안 맞는 사람은 나가는 형태로 인정 구성원의 성향도 정리되었다는 이야기.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민주당계 정당에서 항상 등장하는 "중산층과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내세운 강령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사실상 시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4][15]
무엇보다 합당으로 결정되는 법적 라인으로 따질 때 새정치국민회의가 가장 오래된 직계 조상이다.[16] 만약 새정치국민회의 당원이 중간에 한 번도 탈당하지 않고 당원 자격을 유지했다면, 현재 더불어민주당 당원이다. 반대로 평화민주당의 당원이 중간에 탈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당적을 유지했다면 현재 '''국민의힘 당원'''이다.[17] 평민당의 후신인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신설합당되어 '''한나라당이 되었고''', 이 법인이 새누리당을 거쳐 자유한국당까지 이어져오다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법적으로는 통합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분당세력'''으로 간주된다. 계보적으로는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1991년)-(동교동계의 집단 탈당)-통합민주당(1995년)-(노무현 등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계열 탈당)-한나라당으로 신설합당. 즉 정당 법인을 기준으로 보면 새정치국민회의는 분당/탈당인사들이 만든 신규 정당이지만 그 분당/탈당 인사들이 오히려 주류/다수파이고, 잔류 인사들이 소수파인 사례에 해당한다.[18][19] 따라서 민주당계 정당(대표적인 예로 더불어민주당)의 계보를 평화민주당까지 소급하는 것은 '정신적인 계승자'라는 식으로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는 하나, 이론의 여지 없이 직계 조상에 해당하는 것은 새정치국민회의부터이다. 평화민주당의 법인적 후신이 한나라당을 따라간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기보다는, 민주화 직후 1990년대의 한국 정치는 인맥 중심의 계파에서 이념 기준의 정당으로 격렬한 이합집산을 겪었고, 그 결과가 결국 범민자당계/범민주당계의 두 정당으로 수렴되었기에 당이 쪼개지고 갈라져 다른 정파로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김대중+동교동계+이후 민주당 주류의 입장에서는 불운하게 당권이 상대편에 있을 때 정파 재집결이 일어났기에 당 법인을 두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