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P연합
1. 개요
1997년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을 필두로 한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자유민주연합이 공동 여당의 목표를 가지고 연합한 사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의 연합이 성공하면서 제6공화국 '''최초의 연립정권'''으로 남아있다. 김대중의 이니셜인 'DJ'와 김종필의 이니셜인 'JP'를 합쳐서 생겨난 용어로, 나중에는 세가 약하긴 했지만 박태준까지 이 연합에 합류하면서 호남의 김대중(DJ) + 충청의 김종필(JP) + TK의 박태준(TJ)을 의미하는 'DJT연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구도상 DJP연합이 정설.
불과 7년 전에는 김종필이 공화계를, 박태준이 노태우를 대신해 민정계를, 김영삼이 민주계를 대표하여 민정-민주-공화의 3당 합당에 참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과정은 평민-공화-민정 연합이자 PK 고립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TK는 여전히 보수정당을 지지했고 충청도가 캐스팅보트화되면서 결과적으론 3당 합당 영향이 지속 되었다.[1]
2. 배경
2.1.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김대중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지만 이후 1년 만에 귀국해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을 만들며 정계 복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물론, 김대중 자신이 속했던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 등 14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인사들까지 대놓고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1991년 평화민주당과 꼬마 민주당의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당은 1992년 김대중의 정계 은퇴 선언 후 꼬마 민주당 출신의 이기택이 총재로 선출되어 이끌어 왔으나, 밖으로는 거대 여당에 눌리고 안으로는 당내 다수파인 동교동계와 마찰을 빚는 상황이었다.
특히 1995년 6월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후보 공천과 김대중의 선거 지원 유세 문제를 둘러싸고 양자간의 갈등이 공공연하게 불거진 상황이었다. 당시 승부처인 서울시장 후보를 둘러싸고, 이기택 총재는 이회창 영입을 추진했지만 거절당했고, 동교동계가 영입한 조순 교수가 후보로 나서서 김대중의 지원 유세를 등에 업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선 이기택 총재가 지원한 장경우 의원이 동교동계가 지원한 이종찬을 경선에서 물리치고 본선에 진출했지만, 정작 본선에선 동교동계의 무시 속에서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에게 참패했다. 후보 공천과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이기택 총재와 동교동계 사이에 감정적인 설전이 오고 갔고, 관계는 사실상 파탄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기택은 '김대중이 상왕처럼 굴면서 동교동계가 사사건건 총재의 지도력을 무시한다'고 불만을 표시했고, 동교동계는 '총재가 무능하니 당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맞대응했다. 그리고 이기택 총재와 일부 언론은 이런 동교동계의 강경한 자세를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위한 떡밥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자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그야말로 구름 관중을 동원하였고, 이것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기택 총재는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다. 언론들도 김대중의 지원 유세를 사실상의 정계 복귀라고 인식하였다.
당시 친김대중계 인사들은 정계 복귀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민주당 잔류와 신당 창당으로 갈렸다. 잔류파들은 어차피 우리가 숫자상 다수이니 전당대회 총재 경선에서 승리하고 당권을 쥐는 게 순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당파들은 총재 경선 승리야 당연하지만, 그 뒤에 이기택을 중심으로 비주류들이 결집해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면서 당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 뻔하니, 순간이야 욕을 먹겠지만 장기적으론 신당을 차려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일사불란한 지도 체제를 구축하는 게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미 1995년 지방선거 공천 문제로 이기택에게 감정이 상해있던 김대중은 신당파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민주당이 약진한 지방선거 직후인 1995년 7월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계 유권자들을 믿고 민주당을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그 결과 90명이 넘던 민주당 의원 중 65명[2] 정도가 새정치국민회의로 대거 이동했고 민주당에는 30여 명 정도가 잔류하게 된다.
허나 이는 사실상 야권 지지표를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결국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야권 표심이 갈라지며 여당인 신한국당이 여유롭게 원내 제1당에 올라섰고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 데 그치고 만다.[3] 그리고 이 선거의 패배로 김대중은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고, 이때 당시 김대중의 정치 참모였던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이 김종필과 손을 잡아야만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일명 'DJP연합' 초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김대중에게 조언하였고, 김대중이 이 조언을 수락하면서 김대중은 김종필 측과 1년이 넘는 협상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2.2.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창당
신민주공화당을 이끌었던 김종필은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노태우 - 김영삼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김종필은 김영삼 이후 차기 대권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활동해왔던 그에 대해 구원(舊怨)이 있었던 김영삼 대통령과 민주계는 김종필을 좋게 보지 않았고, 당내 계파 투쟁에서 밀린 김종필은 민주자유당에서 사실상 철저한 비주류로 몰락하는 신세가 된다.[4]
그러자 김종필은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와 마찬가지로 김영삼에게 피를 본 민정계 일부 세력을 이끌고 민자당을 탈당해 1995년 1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른바 자민련은 1995년 1회 지방선거에서 대전-충남-충북-강원 4곳의 광역단체장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한 데 이어 게다가 다음해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리즈 시절을 찍게 되는데, 김종필은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내세워 지역 민심에 불을 붙여 충청권 전체 선거구 28개 중 24개를 석권했고, 그 외에도 문민정부 심판론을 내세워 경기도에서 5석, 경북에서 2석, 강원도에서 2석을 차지했으며, 특히 대구 홀대론으로 반YS 바람이 불던 대구에서는 13석 중 8석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50석을 확보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제3당'이라 불리는 정당들이 역대 선거에서 거둔 성적 중 가장 좋은 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종필은 이와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자신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 대권을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3당 합당 시절처럼 누군가와 함께 공동 정권을 창출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야권에서 김영삼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김대중은 당연히 첫 번째 협상 대상이었다.
참고로 당시 자민련 안에는 김종필의 직계 세력인 충청 그룹, TK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 일부, 그 외 非김종필 세력, 이렇게 세 개의 계파가 있었다. 그 중 각 그룹의 중심 인물은 충청 그룹 김용환 부총재, 민정계 박철언 의원, 非김종필 세력 한영수 부총재였다.
당초 충청 그룹과 非김종필 세력은 DJP연합에 부정적이었으나, 의외로 5공화국 내내 김대중과 상극이었던 민정계는 이 연대에 매우 적극적이었다.[5] 그리고 김종필의 결단으로 충청 그룹이 이에 찬성하며 DJP연합은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게 된다.
3. 과정과 진통
DJP연합은 군부정권 시절부터 견원지간에 정치 성향도 영 맞지 않아보이던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일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국민 여론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시 모 여론조사에선 무려 70%가 넘는 국민들이 'DJP연합을 해선 안 된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김대중 자신도 지지 기반인 호남이 날아갈 것을 꽤나 우려해서 독일의 '신호등 연정'[6] 등을 거론하며 DJP연합을 합리화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김종필은 연대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갈지자(之字) 행보를 보이면서 김대중 측을 초조하게 했는데, 이는 대권이 걸린 김대중 측이 연합에 더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급할게 없는 김종필이 늑장을 부리면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
한편, 1년 반이 넘도록 DJP연합이 큰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김대중은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태준 영입에 공을 들인다. 김대중은 박태준이 합류한다면 김종필의 마음도 붙들어 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남권의 지지도 일부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1997년 9월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을 관전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만난 박태준과 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김대중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박태준의 태도가 이 만남 덕분에 누그러졌고 결국 연합에 뜻을 같이 하게 된다.
4. 연합 성사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의원의 청구동 자택에 직접 찾아와 사실상 DJP연합을 마무리지었고,[8] 다음 날 박태준 의원이 자민련에 입당해 총재로 추대되면서 연합 성사는 완료되었다.
이후 실현 여부와 별개로, 당시 연합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 둘째.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개헌 시기는 1999년 12월 말 이전으로 합의.)
- 셋째. 경제 부처의 임명권은 국무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5. 정권 교체
결론만 놓고 보면 DJP연합은 성공작이었다. 1997년 15대 대선 결과 김대중 후보는 충청도에서 무려 43만여 표 차이를 벌리며 대선 승리를 거머쥔다. (당시 총 득표차는 39만여표 차였다.) 또 김대중을 대놓고 빨갱이 정도로 여기던 TK에서도 1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나름 선전했고,[10]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동진 정책(영남 민심을 공략하는 정책)을 펴는데 자민련 측 인물들이 선봉장을 맡기도 했다. 합의한 대로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도 김종필이 지명하였는데 이들은 IMF 사태를 극복하는데 보탬이 되기도 했다. 물론 현실은 협의하에 친여당 성향 인사들이 발탁되긴 했지만. 또한 DJP연합 결과 지긋지긋하게 김대중을 괴롭혔던 색깔론에서도 자민련이 어느 정도 방파제가 되어주면서 중도 보수층의 지지를 받아 그나마 반발을 무마시키며 햇볕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집권 직후 치러진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전국적인 후보단일화를 통해서 광역단체장 16곳 중 10곳을 석권하는 승리를 거둔다. 이에 따라 15대 국회에 당선된 주로 야당 의원들이 당시 여당에 입당하려는 이른바 철새의 시대가 한동안 유지되기도 한다.
6. 갈등과 해체
집권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내걸고 시작했던 DJP연합은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집권 2년차인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외로 무시되는 측면은 1999년 초만 해도 양당은 표면적인 부인에도 불구 지속적으로 합당을 추구했었다는 점이다. 소선거구제 구도 내에서는 합당 없이는 선거에서 불리하다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지분율은 당연히 1:1로, 당세를 고려하면 자민련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 그 증거로, 국민회의는 국회 총의석을 273석, 특히 지역구을 253석에서 227석으로 줄이기 위한 한나라당과의 지역구 협상에서도 자민련과의 합당을 전제로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7월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내각제 개헌 유보에 합의하자 자민련 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터져나왔고, 9월로 예정되었던 국민회의의 재창당도 합당을 고려해 뒤로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자민련의 일탈은 가속되었다. 심지어 12월에는 김종필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성사의 일등공신이었던 김용환 부총재가 고성이 오가는 면담 끝에 탈당하는 상황[11] 까지 벌어졌다.
양당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1999년 말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은 완전히 무산되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독자적으로 재창당에 나서서 새천년민주당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갈등은 점점 더 커져서, 2000년 16대 총선에선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후보 연합 공천이 무산되었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구에 두 정당이 동시에 후보를 내보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수도권과 호남, 강원도, 제주도에서 승리하고 자민련의 텃밭이었던 충청권에서도 어느 정도 선전하며 의석을 늘렸지만, 자민련은 非충청권 지역에선 보수표를 모조리 한나라당에 뺏기면서 사실상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될 만한 선거구도 새천년민주당과의 연합 공천 무산으로 인해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에게 빼앗겼으며, 본거지인 충청권에서도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과 박빙의 승부를 보이면서 기존 50석에서 1/3 수준으로 줄어든 단 17석 확보에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하게 된다.[12]
그러나 DJP연합의 복원을 희망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을 자민련으로 보내는, 이른바 ''''의원 꿔주기''''까지 하면서 자민련이 다시 원내교섭단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줬고 여기에 감동받은 자민련도 다시 연정에 복귀하기로 하면서, 99년 말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한 소속 이한동 의원이 국무총리가 돼 두 세력의 연정은 이어졌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을 합쳐도 원내 과반수에 안 됐던 터라 2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에까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였고, 민국당 한승수 의원을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새천년민주당 + 자민련 + 민주국민당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과반수만 채웠을 뿐,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을 차지하면서 개헌 저지선을 딱 차지하고 버틴 탓에 김종필과 자민련의 숙원이었던 내각제 개헌은 끝내 무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이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대북 유화책과 관련해 시각차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자민련이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가담해 DJP 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된다.[13]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뜻에 따라 자민련으로 넘어갔던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은 DJP연합이 끝나자 당연하게도 자민련을 탈당해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하면서 자민련은 다시 원내 비교섭단체로 내려앉게 된다.
자민련은 그 이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가담했다가 17대 총선에서 4석으로 폭망하게 된다. 자민련은 그나마 남은 의원들도 새로 창당한 국민중심당으로 옮기면서 대표였던 김학원만 남았으며, 이후 해산을 선언하면서 남은 사람들은 한나라당에 흡수된다. 자민련이 몰락하면서 지역 정당이 사라진 충청권은 이후 본격적인 캐스팅보트 지역이 되었고 호남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역이었던 시절보다는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지지세가 약해졌다.
7. 관련 항목
[1] 이런 과정에서 나온게 노무현의 PK 공략과 세종시로 대표되는 충청권 민심 안기였다.[2] 이 중 13명은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민주당을 탈당하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당적은 민주당이지만 사실상 새정치국민회의를 위하여 활동했다. 훗날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박주현, 장정숙 의원을 가르키는 말인데, 이 둘은 공식적으로는 바른미래당 소속 비례대표 의원이지만 사실상 민주평화당 소속 의원들이다.[3] 민주당은 아예 15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해 몰락하게 되는데, 이들은 훗날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이 됐다.[4] 김영삼과 민주계가 박정희 시절 당한 초산 테러나 야당 의원 고문 등을 생각해보면 미워할 법도 했다. 다만 김종필도 억울한 부분은 있는게 영구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에게 김종필은 눈엣가시였고, 덕분에 조카딸 사위임에도 3차례나 가택수사를 당하는 등 엄청난 견제를 받고 사실상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참고로 김종필은 박근혜와도 소원했다.[5] 이는 당시 박철언의 성향 덕분이기도 한데, 3당 합당 문서에도 등장하지만 원래 노태우 심복 박철언이 주도한 3당 합당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도 포함하는 '''4당 합당'''이 기본 구상이였다. 허나 합당 제안을 김대중 총재가 거절하면서 3당 합당만 이뤄지게 된 것이니, JP와 마찬가지로 YS에 쫓겨나 권력과 멀어진 박철언 입장에선 다시 재기를 노려볼만한 묘수였던 셈.[6] 독일의 사회민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의 연정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민주당의 테마색이 빨간색이고, 녹색당은 녹색, 자유민주당은 노랑색이라서 신호등 연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7] 다만 이와 별개로 DJP연합이 완성되자, 김종필은 2인자를 자처하며 김대중에게 매우 공손했다고 전해진다.[8] 이때 이야기가 끝나고 김대중 후보가 나갈 때 김종필 의원은 김대중 후보에게 90도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당시 DJ 비서실장 한광옥은 JP를 진정한 정치 고수라고 생각했다고 훗날 회상하기도 했다.[9] 재미있는 것은 안택수 의원의 경우 당 대변인이다 보니 당시 신한국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총재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선두에 나서 까던 사람이었는데, 신한국당에 입당한 이후엔 이회창 후보를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며 극찬한다.(...) 또 이의익 의원의 경우 이듬해 대구시장 선거 후보 선출 과정에서 현직인 문희갑 시장에게 밀려나자 자민련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지만 이후 선거에서 낙선한다.[10] DJP연합의 효과도 있겠지만 당시 TK가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에 꽤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11] 이때 김용환 희망의한국신당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하였고, 총선에서 당선된 후에는 한나라당에 합류한다.[12] 사실 대전, 충남과 달리 충북은 애초부터 자민련이 큰 힘을 못쓰던 지역이었다.[13] 막 입당해 잠깐 자민련의 바지 총재로 있던 이한동은 아예 자민련에서 쫓겨나고 무소속으로 남은 총리직을 체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