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그랜트

 


''' 아브람 그랜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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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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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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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축구감독'''
''' 이름 '''
'''아브람 그랜트'''
'''Avram Grant'''

''' 본명 '''
아브라함 그랜트
Avraham Grant
''' 출생 '''
1955년 2월 6일 (69세) /
이스라엘 중부구 페타티크바시
''' 국적 '''
이스라엘
''' 신체 '''
''미상''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감독 '''
하포엘 페타 티크바 유스 (1972~1986)
하포엘 페타 티크바 FC (1986~1991)
마카비 텔아비브 (1991~1995)
하포엘 하이파 FC (1995~1996)
마카비 텔아비브 (1996~2000)
마카비 하이파 FC (2000~2002)
이스라엘 대표팀 (2002~2006)
첼시 FC (2007~2008)
포츠머스 FC (2009~2010)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2010~2011)
FK 파르티잔 (2012)
가나 대표팀 (2014~2017)
노스이스트 유나이티드 FC (2018)
''' 기타 '''
BEC 테로 사사나 (2014 / 기술고문)
노스이스트 유나이티드 FC (2018 / 기술고문)
''' 국가대표 '''
없음 (비선수 출신)
1. 개요
2. 경력
2.1. 영국행 이전
2.2. 포츠머스 FC첼시 FC 기술고문
2.3. 첼시 FC 감독
2.3.1. 평가
2.5. 웨스트햄 감독 이후 근황
3. 사생활


1. 개요


이스라엘축구감독.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07-08시즌이 시작되자마자 경질된 주제 무리뉴의 후임으로 첼시 FC 감독을 맡았고, 팀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까지 올려놓았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아깝게 패했다. 준우승 트레블로 인해 계약 해지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지도력을 입증받아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사실상 수석코치였던 헹크 텐카터스티브 클라크의 몫이였고 결국 첼시를 떠난 뒤 포츠머스와 웨스트햄에서 연속으로 20위 강등을 맞이하며 부족한 지도력을 드러내고 말았다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유능한 수석코치와 코치들을 두고, 자신의 지시에 따르게 조련하는 것도 감독의 몫이고, 헹크 텐 카터와 스티브 클라크이 성과의 몫을 차지했다면 그것 역시 감독의 성과가 맞다.
또한 첼시에서의 업적도 위의 두 코치들의 성과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무리뉴 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미하엘 발락프랭크 램파드의 공존을 이루어냈고, 로만 아브라모비치 인수 직후 처음으로 6득점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숀 라이트 필립스에게 프리롤을 부여하는 새로운 전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웨스트 햄에서의 성적은 쉴드의 여지가 없으나 2009-10 시즌의 포츠머스는 구단이 선수들과 코치진들의 월급도 줄 수 없을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한 상황이었고, 승점까지 9점으로 감점되었다. 이 포츠머스를 그나마 추스려 FA컵 결승으로 인도한 것이 그랜트다. 포츠머스에서의 그랜트의 퍼포먼스가 만약 위의 서술자의 주장대로 그랜트의 실력 부족을 드러내기만 했다면, 프리미어리그의 웨스트 햄이 왜 위약금까지 쥐어주며 그랜트를 하이재킹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을 조합해 볼 때 그랜트는 명장 반열에 올리기에는 부족한 감독이긴 하나, 단지 누군가의 꼭두각시나 운장 취급을 받기에는 유능한 구석이 많은 "좋은 감독" 축에는 속한다고 볼 수 있다.

2. 경력



2.1. 영국행 이전


1955년 이스라엘의 도시 페타 티크바에서 태어나 1972년, 불과 '''18살'''에 고향팀 하포엘 페타 티크바 유스팀 감독으로써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유스팀 감독을 14년째 맡아오던 1986년 팀의 1군 감독으로 승격되어 팀의 토토컵[1] 2연패(1989-90, 1990-91)를 이끌었다. 이후 1991년 마카비 텔아비브(이하 텔아비브) 감독으로 옮겨 1995년까지 2번의 리그 우승(1991-92, 1994-95)과 1993-94 이스라엘 스테이트 컵 우승, 그리고 1992-93 토토컵 우승을 달성하며 영광의 시절을 보냈다. 1995년 텔아비브를 떠난 후 하포엘 하이파의 감독을 1996년까지 맡다가 다시 텔아비브로 복귀하여 1번의 토토컵 우승(1998-99)을 달성하고 2000년 마카비 하이파로 옮겨 2연속 시즌 제패를 이끈다. 2001-02 시즌에는 팀을 이스라엘 구단 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2002년 하이파를 떠나 이스라엘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된다. 5년 동안의 그랜트 체제하의 이스라엘은 유로 2004 예선에서 프랑스와 슬로베니아에 밀려 3위로 탈락하였고, 2006 FIFA 월드컵 독일 예선에서는 무패를 기록했음에도 '''또''' 프랑스와 스위스에 말려 3위로 탈락하였다. 두 번의 예선 탈락 이후 그랜트는 이스라엘 감독에서 물러난다.

2.2. 포츠머스 FC첼시 FC 기술고문


[image]
이후 그랜트는 이스라엘을 떠나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2006년 7월 포츠머스 FC의 기술고문에 취임하여 당시 감독인 해리 레드냅을 서포트한다. 그해 포츠머스의 돌풍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다 평소 친분이 있던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부름을 받아[2] 2007년 7월에 첼시 FC의 기술고문에 선임된다.

2.3. 첼시 FC 감독


2007년 9월 무리뉴가 구단과의 마찰로 사임하자, 감독에 선임됐다. 팬들의 반응과 시선은 당연히 좋지 않았고 사실상 바지감독 취급을 받았다. UEFA가 인정하는 프로 라이센스가 없어 UEFA 챔피언스리그 벤치 출입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고 전술 지시는 대부분 수석코치였던 헹크 텐카터스티브 클라크의 몫이었다는 설도 돌았으며 그랜트는 그저 가만히 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들 한다.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위해 시즌 중간에 고국인 이스라엘을 다녀오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첼시 감독 데뷔 경기인 9월 2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 0:2 패배를 당한 이후, 첼시는 16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간다. 10월 27일에는 탁신 시나와트라의 구단 인수 이후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 체제에서 신흥 강호로 떠오르던 맨체스터 시티를 6:0으로 대파하며 이목을 끌었다.
이런 호재에 그해 12월 첼시는 그와 4년 연장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아스날 원정에서 윌리엄 갈라스에게 일격을 맞아 0:1로 패하며 무패행진이 깨지고[3], 리그에서도 이따금씩 다 이기던 경기를 어이없게 무승부에 그치는 경기가 임팩트가 정말 커서 그랜트에 대한 첼시팬들의 눈초리는 따가웠다.
2008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니콜라 아넬카,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프랑코 디 산토를 보강하였다. 그러나 그랜트 하에서 기용된 선수는 아넬카 하나에 불과했고 적응문제로 단 1골 밖에 넣지 못했다.
2008년 2월 24일 풋볼 리그 컵 결승에서 토트넘 핫스퍼에 연장까지 간 끝에 1:2로 역전패하면서 준우승하고 2주 뒤에 열렸던 FA컵 8강에서 2부리그 반즐리 FC에 0:1로 패배하며 광탈하자 그랜트 감독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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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과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 결승 진출이 확정된 이후'''
하지만 컵대회 연속 탈락 이후 다행히 분위기를 추스러 리그에서는 우승 경쟁에 합류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첼시를 창단 첫 결승으로 이끌어냈다. 약했던 빅4와의 맞대결에서도 아스날과 맨유를 상대로 홈에서 승리해내며 이를 극복했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는 04/05 시즌과 06/07 시즌에 탈락의 아픔을 남겼던 리버풀을 상대로 1차전에서 리세의 자책골 행운이 따르며 1:1 무승부, 2차전에서 연장전까지 간 끝에 드록바의 2골로 3:2 승리를 거두며 복수에 성공하고 결승에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4월의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팬들의 지지도 회복했다. 리그에서는 최종전까지 맨유와 우승 경쟁을 했으나 결국 맨유가 최종전에서 위건에 승리를 거두고 첼시는 종료 직전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볼튼에 1:1로 비겨 승점 2점차로 준우승했다.
5월 21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1:1로 연장전을 마치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존 테리가 미끄러지며 실축하고 아넬카의 슛이 판 데 사르 골키퍼에게 막히면서 준우승.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밀려 준우승을 달성, '''준우승 트레블'''이라는 기록을 달성한다. 이후 2008년 5월 24일, 챔스 결승 3일 후, 첼시는 그와 계약 해지를 발표하며 그랜트의 첼시 감독 생활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2.3.1. 평가


무리뉴와의 이별 후 뒤숭숭했던 첼시를 잘 추스려줬고 부임 초기부터 후반부까지 무리뉴의 사임으로 충격을 받은 첼시 팬들로부터 꾸준히 아르네센의 낙하산 인사, 무자격증 감독이라는 좋지 않은 시선을 받고 욕을 먹으면서 겪은 마음고생 가운데서도 첼시를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끌어내고 무리뉴 때부터 이어온 프리미어리그 홈경기 무패를 이어나간 것은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전반기 발락, 페레이라와 카르발류, 램파드, 테리, 애슐리 콜, 말루다, 드록바가 줄줄이 부상으로 이탈하며 베스트11을 제대로 꾸리기가 힘겨웠던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2008년 1월에 열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차출로 드록바와 칼루, 에시앙을 잃어야 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와중에도 지지 않는 경기를 펼쳐왔다는 사실은 대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랜트는 처음부터 무리뉴를 견제하기 위한 아르네센의 입김이 들어간 인사였으며, 경기 중에 행했던 교체로 경기 막판에 그르친 여러 차례의 경기가 임팩트가 커 리그와 칼링컵에서 준우승에 그쳤다.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도 16강과 8강에서 빅리그가 아닌 그리스와 터키의 올림피아코스페네르바체[4] 만났으며 거기에다가 토너먼트에서 중요한 순간에 상대 자책골을 2개나 얻어내며[5] 운까지 제대로 따랐다. 리버풀과의 챔스 준결승에서 승리한 이후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은 감동을 선사했으나 아쉬운 점은 많았다.

2.4. 포츠머스 FC,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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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컵 준우승 이후
이후 2009년 10월 포츠머스 FC 풋볼 디렉터에 선임되었으나 1달 뒤 폴 하트 감독이 경질되며 감독을 맡게 되었다. 포츠머스에서의 첫 경기는 첼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맨유를 상대했는데 홈에서 1:4로 대패하였다. 그렇지만 두 번째 경기인 15라운드 번리와의 홈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었고 18라운드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도 부진에 빠져있던 리버풀에게 2:0 승리를 거두며 충격패를 선사하며 좋은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듬해 구단의 경영 악화로 인해 승점 9점 감점과 함께 리그에서 최하위로 강등당했다.
여담으로 이 때 포츠머스가 어느 정도까지 막장이었냐면 선수들의 이적이 감독과의 협의도 없이 마구잡이로 추진되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의 급여도 제대로 못 챙겨줄 정도였다고. 2010년 1월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그랜트는 사직서를 제출하지만 자신마저 떠나면 포츠머스에는 완전한 희망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사표를 철회했다. 이러한 그랜트의 리더십 덕에 FA컵에서는 승승장구하며 준결승에서 토트넘을 2:0으로 누르고 FA컵 결승에 올랐고 FA컵 결승에서 친정팀 첼시를 상대하여 선전했으나 드록바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1:0으로 패배, FA컵 준우승을 남기고 계약을 해지하였다. 떠나면서 그는 팬들에게 포츠머스를 맡은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포츠머스 팬들의 열정과 현신에 감동받았다는 글을 구단 홈페이지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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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에 부임한 그랜트
그리고 2010년 6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감독에 4년 계약을 맺고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야심차게 데려온 히츨스페르거가 부상 크리를 맞았고 개막하자마자 4연패를 당하며 꼴찌로 추락하며 경질설이 돌기 시작했다. 11월까지 2승에 그치며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뜬금없이 칼링컵 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4:0으로 꺾고 생명연장에 성공했다. 이 승리는 웨스트 햄이 맨유를 상대로 거둔 첫 4점차 대승이다. 12월 들어 블랙번의 샘 앨러다이스가 뜬금없이 경질당하자 자신도 경질설이 돌았으나 웨스트 햄은 박싱데이를 기점으로 연말연시에 풀럼과 울버햄튼을 꺾으며 강등권에서 탈출하며 경질설을 잠재우는듯 했다. 그러나 곧바로 뉴캐슬에 5:0 대패를 당하며 꼴찌로 추락했다.
4강에 진출했던 칼링컵에서 버밍엄 시티에 아깝게 떨어졌고 리그에서는 히츨스페르거의 부상 복귀와 겨울이적시장에서 합류한 뎀바 바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팀이 안정되며 3월 들어 강등권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4월 첫 경기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홈으로 불러들여 전반전에 2골로 앞서나갈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후반에 루니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2:4로 대역전패를 당한 경기를 기점으로 7경기에서 1무6패를 기록하는 급격한 하락세를 맞이하며 다시 강등권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37라운드 위건 원정에서 2대0으로 이기는 경기를 2대3으로 뒤집히며 강등이 확정되었다. 강등에 대한 책임으로 결국 경질당했으며 2년 연속 EPL 꼴찌팀 감독, 밀월 레전드라는 오명과 불명예를 얻고 말았다. 밀월 레전드라고 불리는 이유는 강등 확정이 되고 나서 웨스트햄과 철천지 원수지간인 라이벌 밀월 서포터들이 "Avram Grant, Millwall Legend"라는 문구를 경기장 상공에 경비행기를 띄워 조롱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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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원정에서 강등 확정 이후 밀월 팬들이 비행기를 띄워 조롱하는 장면

2.5. 웨스트햄 감독 이후 근황


2012년 1월 세르비아 수페르리가FK 파르티잔의 지휘봉을 잡았다.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하면서 4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후 휴식을 취하다가 2014년에는 태국 리그의 BEC 테로 사사나의 기술 고문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공석이었던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가나를 결승까지 올려놓았으나 코트디부아르에 승부차기 끝에 패배, '''또'''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4강에 머물렀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최종예선에서 가나 대표팀이 조 3위를 하며 탈락하자 사임했다.
2018년 1월부터 현재까지는 인도 리그의 팀인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의 기술고문직을 맡고 있다.
2021년 1월 경험이 적은 프랭크 램파드를 돕기위해 첼시의 코치로 합류한다는 루머가 기사로 나왔다.

3. 사생활


이스라엘의 유명 배우 추핏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2014년 이혼했다.

[1] 이스라엘의 축구 클럽 토너먼트 대회.[2] 무리뉴와 사이가 좋지 않던 프랑크 아르네센 수석 스카우터의 입김이 있었다.[3] 변명을 하자면 아스날 킬러였던 드록바와 에시앙이 각각 부상과 퇴장으로 인한 징계로 결장했다.[4] 다만 당시의 페네르바체는 인테르를 꺾은 팀이었다.[5] 페네르바체전 데이비드, 리버풀전 리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