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아넬카

 

'''니콜라 아넬카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98-99 · 2008-09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2000'''

''' 프랑스의 축구감독 '''
<colbgcolor=#eeeeee> '''이름'''
'''니콜라 아넬카'''
'''Nicolas Anelka'''
'''본명'''
니콜라 세바스티앵 아넬카
Nicolas Sebastien Anelka
'''출생'''
1979년 3월 14일 (45세)
'''국적'''
[image] 프랑스
르 셰스나이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 조건'''
185cm
''' 소속 '''
<colbgcolor=#eeeeee> ''' 선수 '''
파리 생제르맹 FC (1994~1997)
아스날 FC (1997~1999)
레알 마드리드 CF (1999~2000)
파리 생제르맹 FC (2000~2002)
리버풀 FC (2002 / 임대)
맨체스터 시티 FC (2002~2004)
페네르바흐체 SK (2004~2006)
볼턴 원더러스 FC (2006~2008)
'''첼시 FC (2008~2012)'''
상하이 선화 (2012~2013)
유벤투스 FC (2013 / 임대)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2013~2014)
뭄바이 시티 FC (2014~2015)
''' 지도자 '''
상하이 선화 (2012 / 선수 겸 코치)
뭄바이 시티 FC (2015 / 선수 겸 감독)
릴 유스팀 (2018~ )
'''국가대표'''
69경기 14골
'''종교'''
이슬람[1]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기록
4.1. 통산 기록
4.2. 대회 기록
4.3. 개인 수상
5.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별명은 '저니맨'.

2. 선수 경력


로저 르메르 전 프랑스 대표팀 감독은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라 호평하며 아넬카를 중용했고, 커리어 내내 많은 명문팀이 그를 영입하려 했을 만큼 실력 하나는 확실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이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영향으로 '''항상 돈이 필요했던 게 문제'''였다. 나중에는 선수 본인까지 마음의 여유를 잃고 팀원이나 감독들과 폭언을 주고 받으며 충돌했고, 가족들의 금전욕까지 물이 들어 좀처럼 팀과 융화되지 못했다. 거기다 실력에 대한 자존심도 엄청나서 자기 주제로 팬투표를 한 것에 삐져서 이적을 결심할 정도.
볼턴 원더러스 FC 입단 전까지만 해도 이 때문에 실력과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 CF에 있을 때 가장 심했다. '''라울 곤살레스'''와의 마찰이 특히 심해서 선수단 주도로 왕따를 시켰다는 말도 있다. 그때는 이적 자체도 갑작스럽게 결정해서 제 실력을 못낸 편인데, 그러고도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출전은 해서 우승멤버로 남았다.
사이먼 쿠퍼의 <사커노믹스>라는 책에 레알 마드리드 이적 당시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소개되었는데, 내성적이고 섬세한 젊은 청년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떨어져 자기 라커 하나 못 잡고 쩔쩔매고 있는데 구단에서 도와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선수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한 대목이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여린 성격의 아넬카에 주목했다고. 2010-11 시즌 시작 당시 플로랑 말루다도 인터뷰에서 아넬카의 섬세하고 여린 성격을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축구장 내에서 사고뭉치 취급을 받았지만 축구장 바깥에서 사고를 쳐서 이슈가 된 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2]
아르센 벵거 감독이 '최고의 재능'이라고 격찬하며 50만 파운드로 파리 생제르망으로부터 아스날로 데려왔던 선수다. 아스날 FC에 뛰면서 90경기 28골을 넣었고 이 당시에 팀의 일원으로 더블을 이루는 데에 기여하며 1998-99년 PFA 올해의 유망주 상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1999년 레알 마드리드로 2230만 파운드에 이적한다. 이적 초반엔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감독 및 선수단과의 마찰로 오래 있지 못하고 2000만 파운드에 파리 생제르맹 FC로 돌아왔다가 리버풀 FC로 임대된다.
리버풀에서는 마이클 오언 - 에밀 헤스키 - 니콜라 아넬카의 삼각편대를 구성하며 제법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3] 당시 리버풀 감독이던 제라르 울리에가 먹튀로 전락하는 엘 하지 디우프를 거액으로 데려오며 그를 내치는 병크를 저지른다. 제라드가 자서전에서 이걸 대차게 깠다. 이후 1300만 파운드에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 3시즌을 뛰며 91경기 30골이라는 스탯을 쌓았다. 이후 7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터키의 페네르바흐체 SK로 가서 뛰다가, 샘 알라다이스에 의해 800만 파운드에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해 한 시즌 반 동안, 53경기 21골을 집어넣으며 부활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8년 1월, 아브람 그랜트 당시 첼시 감독에 의해 15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첼시 FC에 왔다. 2007-08시즌 아넬카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며 맨유에 패배하고 첼시는 준우승 트레블을 하게 된다. 시즌 전체 활약으로도 디디에 드록바에 밀려 공격수가 아닌 왼쪽 윙포워드를 뛰어야 했기 때문에 볼튼 시절에 비해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 했다. 2008-09 시즌 리그에서는 멘탈 문제로 흔들리는 드록바를 대신하여 팀의 주포이자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19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했다. 시즌 전반기에는 플로랑 말루다와 함께 경기력은 부진한데 스탯은 잘 쌓아서 스탯 사기꾼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후반기에는 거스 히딩크 감독 대행이 드록바와 아넬카의 공존을 완성하는데 성공하면서 경기력도 좋아졌다. 이어진 09-10시즌에도 드록바를 보좌하는 섀도우 스트라이커 내지 윙포워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며 11골을 기록하는 등 팀과 함께 좋은 시즌을 보냈다.
국대에서는 UEFA 유로 2000에 차출된 이후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이후부터 2007년까지는 특유의 멘탈과 들쭉날쭉한 활약에다 워낙 팀을 많이 옮겨다녀서 선발되지 않았으나[4] 그 이후로는 UEFA 유로 2008에도 발탁되며 꾸준히 차출되었다. 하지만 국대에서도 그놈의 성깔이 안 죽었는지 2010 FIFA 월드컵에서 일을 저질렀다. 레몽 도메네크 감독과의 마찰은 물론 선수단과도 마찰이 심했으며, 파트리스 에브라, 프랑크 리베리 등과 함께 프랑스 국가대표팀 내분 사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특히 요앙 구르퀴프 왕따설의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었다. 조별 예선 우루과이와의 첫 경기 도중 좋은 득점 찬스를 놓친 뒤 대놓고 도메네크 감독을 조롱하는 제스쳐를 취하기도 했다. 결국 이날 프랑스는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어진 멕시코와의 두번째 경기에서는 구르퀴프에게 절대로 패스를 안해주는 모습을 보였고 전반 끝날때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도메네크 감독이 이것에 대해 지적하자 '''"엿먹어, 개XX"'''라고 욕설을 날렸다. 이 사건으로 크게 분노한 프랑스 축구협회는 레블뢰의 명성을 땅에 떨어트리며 팀워크를 박살낸 아넬카를 국가대표팀에서 즉시 퇴출시켜 강제 귀국 조치를 내렸고, A매치 18경기 출전 정지라는 초강력 징계를 내렸다. 이후 아넬카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첼시에서는 괜찮은 팀워크를 보여주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이야기이다.
2010-11 시즌 중반 이후에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스피드와 득점력이 현저하게 죽어버렸다. 그런데 오히려 드리블 실력과 성숙한 노련미가 돋보이는 패싱, 넓은 시야 등으로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으면서 활약 중. 여차하면 본인이 직접 골을 집어넣기도 하는 등 다양한 플레이를 펼치며 첼시의 중반기의 부진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말라리아 후유증의 여파로 폼이 떡락한 드록신과 스탯은 귀신같이 적립하지만 경기력이 쓰레기가 되어버린 말루다 대신 쏠쏠한 활약을 해준 셈.
2011-12 시즌에는 체력적인 문제 때문인지 선발보다는 교체 출장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지만 풍부한 경험을 통한 패싱력과 경기 조율 능력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리그 2라운드와 3라운드의 승리는 모두 아넬카의 공이 컸다.
하지만,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과의 마찰 끝에 결국 팀을 떠나게 됐다. 아넬카의 인터뷰에 따르면 유스 팀과 같이 훈련하고 같은 주차장이나 탈의실을 쓰게 했다고...떠날 팀을 모색하다가 그가 선택한 팀은 바로 중국 슈퍼 리그상하이 선화.
그리고 상하이에서 플레잉 코치를 맡다가 감독인 장 티가나 감독의 경질 이후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활동은 별로이며 시즌 12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는 수준에 적응을 못하는 터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가 잉글랜드 복귀를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뜬금없이 유벤투스 이적에 매우 가까워졌다! 현지시각 2013년 1월 26일에 있을 유벤투스와 제노아의 경기를 관람한 후 곧 공식 계약을 맺는다고 하며 결국 유벤투스에 6개월 단기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과연 유베의 공격진을 구원할 수 있을지? 하지만 구원하지 못했다. 아넬카 영입할거면 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랑 재계약 안 했냐고 타 팀팬들까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2013-14 시즌, 3시즌만에 EPL로 복귀해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으로 이적했다. 대표적인 저니맨답게 EPL에서만 여섯 번째 소속팀을 찾았다.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1995년부터 같이 일하며 친형제처럼 지낸 에이전트가 사망하여 큰 슬픔에 빠져 은퇴를 선언했으나, 1주일 후 번복하고 팀에 복귀했다.
[image]
리그 첫 골을 12월 28일에서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전에서 터뜨렸는데, 위 그림과 같은 '케넬(quenelle)' 제스처로 골 세리머니를 펼쳐 큰 논란을 야기했다. 이 동작은 코미디언 디외도네가 널리 유포시킨 나치의 거수경례를 뒤집어 놓은 포즈로 반유태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아넬카는 친구 디외도네를 위해 이 세리머니를 펼쳤을 뿐이라 항변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유럽 전역에서 쌍욕을 얻어먹은 것은 당연지사에, 소속팀의 스폰서였던 부동산 업체 주플라도 분개하여(사장이 유태인이다.) 후원 계약을 해지해 버렸다.[5] FA도 당시 인종 차별 문제에 민감한 편이었기에 아넬카에게 5경기 출장 정지와 10만 유로 벌금을 징계했다.
그 후 구단과 마찰이 있었는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계약해지를 하겠다고 SNS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고, FA가 된 그를 브라질의 아틀레치쿠 미네이루가 영입하였다. 이젠 대륙까지 넘나든다! 그런데 입단식 치르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알고보니 무단으로 이슬람행사에 참여한 것이 밝혀졌다. 아넬카 입장은 계약을 한적도 없다고 한다. 아넬카와 회장말을 종합해보면 아넬카 대리인인 아넬카의 형이 구단과 구두계약을 맺었다고 해석할수도 있는 상황. 단단히 화가난 미네이루 회장이 FIFA 제소까지 하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2014년 9월 4일 뭄바이 시티 FC와 3개월 계약을 맺었다. 그가 3개월 동안 벌게 될 수입은 100만 달러로 알려졌다.
2015년 6월 9일 뭄바이 시티 FC의 선수 겸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본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이나, 첼시 시절에는 주로 3톱의 윙포워드로 뛰었다. 활동성과 수비 가담과 위치 선정이나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게 윙어인지 세컨드 스트라이커인지 공격형 미드필더인지 감이 잘 안잡힌다. 그만큼 많이 움직이며 패스해 주고 득점 또한 잘하는 만능 플레이어였다.
좋은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을 수 있는 여러 덕목들을 두루 갖췄다. 골 결정력, 피지컬, 속도[6], 골을 넣기 위한 움직임과 위치 선정까지 모두 우수하다. 필요할 때에는 중앙이나 측면쪽 2선 자원으로 뛸 수 있을 정도로 전술적인 이해도와 패스 센스까지 겸비하였다. 다만 선수 시절 내내 팀을 계속해서 옮겨 다녔고,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도 많아서 제대로 써먹기 어려운 선수이다.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지만, 엄연히 앙리와도 비교될 만한 월드클래스 공격수였다.[7] MNF에서 해설가 제이미 캐러거올리비에 지루에 대한 설명을 할때 "아넬카 & 당신(같이 해설한 앙리)과 달리 월드클래스는 아니지만, 좋은 선수" 라고 말하면서 아넬카가 월드클래스의 선수임을 인증한 바가 있다. 프랑스 출신의 스트라이커이고 앙리가 아넬카의 대체자로 아스날에 왔기 때문에 종종 비교된다. 베르캄프의 발언을 통해서 둘의 차이를 보면, 앙리는 좀 더 볼을 가지면서 자신이 주도하는 플레이를 선호하는 친구이고 아넬카는 상당히 직선적인 유형의 스트라이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불안정한 가정환경에 내성적이고 섬세한 선수를 잡고 다독여줄수 있는 지도자를 자주 만나지 못해 부침이 많아 가진 능력을 다 펼치지는 못했다.
현역 스트라이커들 중에서는 다니엘 스터리지가 가장 아넬카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8]

4. 기록



4.1. 통산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5/96
파리 셍제르맹
리그 1
2
0
0
0
0
0
1996/97
파리 셍제르맹
리그 1
8
1
0
0
1
0
1996/97
아스날
프리미어 리그
4
0
0
0
0
0
1997/98
아스날
프리미어 리그
26
6
9
3
3
0
1998/99
아스날
프리미어 리그
35
17
5
0
0
0
1999/00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19
2
1
0
10
2
2000/01
파리 셍제르맹
리그 1
27
8
0
0
9
5
2001/02
파리 셍제르맹
리그 1
12
2
1
0
7
3
2001/02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0
4
2
1
0
0
2002/03
맨체스터 시티
프리미어 리그
38
14
1
0
-
-
2003/04
맨체스터 시티
프리미어 리그
32
16
4
4
5
4
2004/05
맨체스터 시티
프리미어 리그
19
7
0
0
-
-
2004/05
페네르바체
터키 쉬페르리가
14
4
2
0
2
0
2005/06
페네르바체
터키 쉬페르리가
25
10
6
2
6
0
2006/07
페네르바체
터키 쉬페르리가
0
0
0
0
2
0
2006/07
볼튼 원더러스
프리미어 리그
35
11
3
0
-
-
2007/08
볼튼 원더러스
프리미어 리그
18
10
0
0
4
1
2007/08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14
1
0
0
4
1
2008/09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7
19
5
4
12
2
2009/10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3
11
4
1
7
3
2010/11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32
6
3
1
9
7
2011/12
첼시 FC
프리미어 리그
9
1
0
0
4
0
2012
상하이 선화
중국 슈퍼리그
22
3
1
0
-
-
2012/13
유벤투스
세리에 A
2
0
0
0
1
0
2013/14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프리미어 리그
12
2
0
0
-
-
2014
뭄바이 시티
인도 슈퍼리그
3
2
-
-
-
-
2015
뭄바이 시티
인도 슈퍼리그
6
0
-
-
-
-

4.2. 대회 기록



4.3. 개인 수상



5. 여담


  • 티에리 앙리와는 절친. 그런데 둘은 같은 팀을 거치긴 했지만, 함께 뛴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동시에 거쳤던 팀은 바로 아스날 FC유벤투스 FC. 지금에서야 상상하기 힘들지만, 사실 앙리는 아넬카 이적 후에 아스날의 벵거 감독이 아넬카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한 선수였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세계 무대에 멋지게 데뷔했지만 유벤투스에서 적응하지 못해 죽 쑤고 있던 앙리를 아넬카 대신 영입했던 것.[9] 그 결과 한 명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되었고, 한 명은 희대의 저니맨이 되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 레알 마드리드 라커룸의 전설적인 일화 아넬카 사건으로 유명하다. 아넬카가 라커룸에 앉아서 쉬려고 하자 동료들이 몰려가서 거긴 내 자리야 , 비켜 ! 를 스무 번 말한 것. 이 사건의 주모자는 라울 곤살레스페르난도 이에로.... 20년이 지난 후인 2020년 8월에도 다시 이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며 진저리를 쳤다.
[image]
▲ 스포츠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사이먼 쿠퍼와 스테판 지만스키의 저서인 싸커노믹스에 실린 내용이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5개월 동안 득점이 없자 언론의 관심이 비난으로 바뀌었는데 그 당시에 동료들을 탓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서 팬들의 반응은 왕따당해 불쌍하다는 측과 거대한 자의식 때문이라 자업자득이라는 측으로 갈린다.
  • 본인의 자서전(제목부터가 ‘It’s not me. It’s everyone else' 다.... 내 탓 아냐. 다른 놈들 탓이지.)을 통해서 비에이라의 Dickhead적인 면모를 경험을 통해서 설명해줬는데... 정말 Dickhead 그 자체였었다는 게 함정( 궁금한 분은 직접 찾아볼 것을 추천. 반 할이 루카 토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했다고 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반 할은 보여주기만 하고 그걸로 싸대기를 때리진 않았다).
  • 볼튼 시절 좋은 활약을 펼치며 인기가 오르자 한 업체에서 아넬카의 사인이 들어간 아넬카 버거를 팔았던 적이 있다. 그 광고모델은 당연히 아넬카... 역시 영국은 기행의 나라인가보다..
  •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특이하게도 등번호 39번을 좋아하는 듯하다. 단, 커리어 내내 39번만 달고 뛴 것은 아니고, 아스날 FC 시절은 9번,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19번[10],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는 8번, 21번을 달기도 했다. 아넬카가 39번을 본격적으로 고르기 시작한 것은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뛸 때부터였다.

  • 아넬카에 대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가 공개된다.
[1] 출처[2] 그러나 이때는 아넬카도 좀 심했는데 훈련 무단 불참이나 700분 무득점 등 혁혁한 기록을 세우는 와중에도 "레알을 내 위주로 돌려야 된다. 전술을 바꾸라"는 위주의 인터뷰를 하는 등 레알 성골들이 빡칠 만한 행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3] 다큐멘터리를 통해 리버풀에서 매우 만족했다고 하며 자신은 리버풀로 완전 이적을 원했지만 구단에서 이를 제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4] 스스로 국대 차출을 거부한 적도 있다. 2002 월드컵 이후 대표팀의 감독이 된 자크 상티니가 아넬카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맨체스터 더비를 관전했고 아넬카는 그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리고 이후 상티니는 아넬카에게 내가 너를 안 뽑으면 내가 널 몰랐기 때문이다고 말했는데 아넬카는 이 말이 PSG, 아스날, 레알 마드리드, 리버풀에서 뛰었던 자신을 몰랐다는 게 말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말을 고깝게 여겼다고 언급했다. 그 후, 아넬카는 상티니 체제에서 국대 차출을 거부하였다.[5] 아넬카는 다큐멘터리에서 이 세리머니를 한 이유를 밝혔는데 자신을 제대로 써 먹지 않은 스티브 클라크 전 감독에 대한 메시지였다고 한다. 첫 경기에서 0-0으로 비기고 있자 70분에 자신을 교체하면서 아넬카는 클라크에게 불만을 가졌고(아넬카는 클라크가 첼시에서 수석 코치로 있었을 때 첼시에 영입되어서 웨스트 브롬에 간 것을 만족해했었다) 그 때부터 클라크는 아넬카를 선발에서 제외했다. 웨스트 햄 전 경기는 클라크가 경질된 이후에 치뤄진 경기였고 아넬카는 클라크에게 있을 때는 날 안 쓰더니 네가 떠나니까 난 골 넣었다. '''엿이나 먹어라.''' 라는 의미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본인이 인종 차별할 생각이 전혀 없었더라도 아넬카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어려운 편이다.[6] 프랭크 램파드가 자신이 선수 시절에 함께한 선수 중에 가장 빠른 선수로 아르연 로벤과 함께 아넬카를 뽑았을 정도이다.[7] 크리스티안 비에리 이후 루카 토니와 함께 최고의 저니맨으로 불리기도 한다.[8] 단, 스터리지처럼 다재다능하지만 좀 더 골에 관여하는 직선적인 움직임을 더 선호하는 선수이다. 실제로, 아스날에서 아넬카와 같이 뛰었던 데니스 베르캄프티에리 앙리보다는 보다 직선적인 아넬카가 자기와 어울렸었다고 말했을 정도.[9] 엄밀하게 따져서 앙리가 아넬카보다 밑(...)으로 취급되었던 시절은 딱 이 1년뿐이었다. 1998-99 시즌 앙리가 죽을 쑤고, 아넬카가 급부상하면서 벌어진 일. 당시 아스날이 앙리를 데려가서 폭발하기 직전까지 앙리는 그저 월드컵에서 잠깐 터졌던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팽배해있었던 것도 사실이다.[10] 라리가에서는 1군 엔트리의 등번호 규정이 타 리그에 비해 엄격하다. 1군 엔트리는 25명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그 중 1번과 13번, 25번은 골키퍼에게만 부여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필드 플레이어는 25번 이상의 등번호를 고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