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역사

 




1. 고대
2. 중세
3. 근세
4. 근대
5. 현대
6. 관련 문서


1. 고대


아이슬란드는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고위도의 추운 지역에 홀로 존재하는 탓에 뉴질랜드,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 등과 함께 오늘날 한 국가의 '본토'로 여겨지는 땅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무인도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중세나 근세에는 기원전 4세기에 북유럽 지역을 탐방했던 그리스의 지리학자 피테아스의 저서에 나오는 '툴레(Thule)'를 아이슬란드 섬으로 보았지만, 19세기에 들어 이 지역은 노르웨이나 셔틀랜드, 오크니 제도 등 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게 되었다.[1]
3세기 경에는 소수의 로마인들이 이 섬에 정착했을지도 모르는데, 아이슬란드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 중 하나인 크비타우르홀트(Hvítárholt)에서 275-256년에 제작된 로마의 동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 딱히 역사나 유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 중세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정착자들은 소위 '파파르(Papar)'라 불리는 아일랜드인 선교사들로, 이들은 셔틀랜드나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등 북유럽의 여러 섬들에도 마찬가지로 정착했다. 이들이 언제 정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후 이 땅에 정착한 노르드인들의 기록을 보면 이들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노르드인들이 싫어서 이 섬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아이슬란드 동쪽 해안의 파페이(Papey) 섬의 이름은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870년경 잉코울뷔르 아르트나르손(Ingólfr Arnarson)이 이끄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추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거주하던 노르드인들이 최초로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2] 이전까지는 전 국토가 화산 대지인 데다가 날씨도 좋지 않은 외딴 섬이라 농사도 못 짓는 등 가져봤자 별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3]
부족 단위로 생활하던 아이슬란드인들은 930년에 부족들의 연합체인 '아이슬란드 연방'을 출범시켰고, 그 정치 주체로 의회(알팅그, Alþingi)를 만들었다.[4] 아이슬란드인들은 이후 몇 백 년 동안 있었고 그린란드아메리카에 도달하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기독교가 아이슬란드에 전래되었다.
12세기에 아이슬란드 문화가 융성해졌다. 그 후반기에 활동한 인물이 스노리이다. 13세기부터 아이슬란드에서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5] 내분 끝에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와 연합 조약을 체결하여 노르웨이의 영토가 되었다. 1387년부터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

3. 근세


1602년 덴마크는 아이슬란드가 덴마크 외의 국가와 무역하는 걸 금지했다. 더욱이 이때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 아이슬란드 또한 페스트 등으로 고생했다. 그래도 같은 민족 취급을 해주기도 해서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는 온건한 지배를 받은 편이다. 17세기 중엽까진 아이슬란드는 독자적 지위를 유지했다.
1627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한패가 된 네덜란드 출신의 해적 얀 얀스존이 이끄는 바르바리 해적이 아이슬란드까지 와서 약탈을 가했다.
18세기에는 기후가 가장 추워졌을뿐더러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하면서 가축의 3/4이 죽고 아이슬란드 인구의 1/4가량이 사망했다.

4. 근대


덴마크 지배 시기 아이슬란드에서 의회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결국 1800년에는 의회가 폐지되었다. 19세기에도 기후 조건은 계속 나빠져 아이슬란드인들이 캐나다로 대량으로 이민가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민족주의가 이때부터 생겨났다.[6] 또한 아이슬란드어로 된 언론인 피욀니르(Fjölnir)가 나오기도 하였다.
결국 아이슬란드 민족 운동의 영향으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8세가 1843년에 아이슬란드에서 의회를 부활시켰다. 1874년에는 아이슬란드인들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제헌 헌법을 공포했다. 외국과의 무역도 허용되었다. 1918년에는 덴마크 왕이 아이슬란드 왕을 겸하는 아이슬란드 왕국으로 독립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국민 투표로 국왕을 폐위해버리고 공화국이 되었다. 그 뒤로 독립된 주권 국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초기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독일 해군이 대서양으로 진출할 지역을 얻자 위기를 느낀 영국은 북대서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아이슬란드를 무혈 점령해 버렸다. 그리하여 덴마크는 독일에, 아이슬란드는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 독립에 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통과된다. 히틀러는 1944년에 아이슬란드 독립을 승인했다. 당시 덴마크가 점령국 나치 독일에 매우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7] 이후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에서 독일 유보트를 감시하는 주요 거점으로 쓰였다.

5. 현대


NATO 회원국이지만 공식적으로 군대가 없는 국가다. 특수 경찰과 해안 경비대로 방위를 대신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북해와 북극해에서 대서양으로 나오는 출구인 그린란드와 영국 사이에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1949년에 국민들이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지만 1951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과 방위 협정을 맺고 미군에게 군사 기지를 제공했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군의 잠수함을 감시하기 위한 음향감시체계 기지와 미군 항공 기지가 있었다. 2006년 이후 미군은 철수한 상태지만 NATO 공군기가 주기적으로 순환 배치되어 아이슬란드 일대의 영공을 순찰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와 가장 사이가 나쁜 국가는 영국. 세 차례(1958, 1972, 1976)에 걸쳐 대구 전쟁(Cod Wars)을 벌였다. 아이슬란드 해에는 한랭 어종인 대구가 많은데 이게 영국인의 주식인 '피시 앤드 칩스'의 주재료였다. 아이슬란드에게도 대구는 중요했다. 1972년(2차 대구 전쟁)에는 아이슬란드의 전관 어로 수역[8]에서 영국 어선들이 영국 군함의 초계 하에 어업을 계속하자 아이슬란드에서 해안 경비대가 출동하여 그물을 볼 때마다 끊어버렸다. 이 싸움은 상호 포격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국교 단절과 선전 포고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NATO의 중재로 전쟁은 면한다. 영국이 아이슬란드의 경제 수역과 어업 쿼터를 잠정 수용하면서 끝난다. 이후 1976년(3차 대구 전쟁)에도 경제 수역 200해리 공포 여부로 처음부터 양측 군함이 출동하여 포격전을 벌였으나 EC 경제 장관들이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줘서 끝난다. 정작 아이슬란드 해의 대구 자원은 무분별한 남획으로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9] 그래서 지금도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덴마크 사람은 좋아해도 영국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NATO에 가입까지 한 친서방 국가임에도, 같은 친서방 국가인 영국을 자국의 주적으로 여길 정도다. 이때 아이슬란드는 NATO도 무시하고 소련과 접촉해서 소련제 무기를 구입하고 소련군에게 기지를 제공해주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냉전 상황에서 아이슬란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NATO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를 빠르게 중재해 준 것이기도 하다.
다른 노르딕 국가들과 달리 독립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의 집권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었지만, 야당들의 의견도 적극 수용하여 복지 국가 체제를 구축했다.
2000년대 초반엔 외자 유치와 은행 완전 민영화 등으로 금융업을 활성화시키고 알코아에 알루미늄 제련 공장을 유치시키는 등의 정책을 펼치며 엄청나게 소득이 늘었다. 그래서 한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국가들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9월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금융업이 축소되고 은행이 계속 파산했다. 전체 부채 규모가 GDP의 11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맥도날드까지 철수해 버렸다. 이후 반정부 시위[10] 끝에 사태를 책임지고 게이르 호르데[11] 당시 총리가 사퇴했다. 이후 세계 첫 동성애자 총리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가 2013년까지 재임하면서 은행 재국유화, 외자 동결 조치, 가계 부채 탕감 등의 강경책을 써서 위기는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영국이나 일부 다른 유럽의 채권국과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2011년에 IMF 구제 금융을 상환하고 같은 시기에 EU에 가입을 신청했다. 금융 위기 과정에서 아이슬란드를 탈출하지 못한 자금이 경제 회복 이후 부동산으로 몰려드는 바람에[12] 집값이 급속하게 올라 집권당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결국 2013년 총선에서 다시 독립당이 집권하고 정략적인 논리로 EU 가입을 포기했다.

6. 관련 문서



[1] 여담이지만, 히틀러나치들은 이 '툴레'가 바로 아리아인의 고향이라고 여겼다(...).[2] 그 외에도 아이슬란드인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모계 유전자'''(Mtdna)의 62%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라는 결과가 나왔다.[3] 스칸디나비아 반도북극에서 매우 가까워서 몹시 추웠던지라, 아이슬란드 정도의 기후에는 적응하기 쉬웠다. 그리고 그린란드도 당시에는 기후가 꽤 따뜻한 편이어서 남부 지역에 목초지가 있었고, 그린란드 최북단(이자 지구상의 육지들 중 최북단)인 피어리랜드에도 이누이트 계통의 민족이 일부 살고 있기도 했다.[4] 의회를 싱(thing)이라 불렀는데 과거에는 4개 지역이 있었고 지역마다 작은 의회가 있었다. 이걸 '1/4 의회'라고 불렀고 대의회를 알싱이라 불렀다. 의회의 구성원인 의원을 선거로 뽑는 제도가 최초로 나온 국가 중 하나다.[5] 그래도 동시기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굉장히 평화로웠다.[6] 덴마크에 줄기차게 아이슬란드 자치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등의 투쟁을 했던 욘 시귀르드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아이슬란드 국민은 그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잘 몰랐다.[7] 덴마크인들은 독일의 보호령이었던 1943년까지는 저항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3년 후반에 독일이 덴마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직할 통치를 시작한 후에 저항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8] 아이슬란드가 일방적으로 50해리를 선포했다. 영국과 일부 다른 유럽 국가가 국제법 위반으로 제소하여 결국 승소했으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무시한다.[9] 영국이 꽤 남획을 했기 때문에 대구 보호 면에서 보면 좋은 일이기도 했다.[10] 엄청나게 격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정부 시위와 비교하면 평화로웠다(...). 프라이팬이랑 냄비를 두들기고 총리에게 사퇴하라며 소리지르는 정도로 그쳤다.[11] 토종 아이슬란드인이 아닌 노르웨이에서 이민 온 사람이기 때문에 성씨가 있다.[12] 아이슬란드는 인구 성장이 (유럽 국가치고는) 워낙 안정적이라서 부동산 산업이 유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