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역사

 




1. 고대
2. 중세
2.1. 내전
2.2. 재건
2.3. 혼란 재개
2.4. 스웨덴-노르웨이 시대
2.4.1. 망누스 4세 시대
2.4.2. 노르웨이의 분리와 스웨덴 귀족들의 반란
2.5. 덴마크-노르웨이 창설과 칼마르 동맹
2.5.1. 섭정 마르가레테의 덴마크-노르웨이 통치 시작
2.5.2. 스웨덴 왕 알브레크트와 스웨덴 귀족 간의 갈등
2.5.3. 섭정 마르가레테의 3왕국 통합, 칼마르 동맹의 탄생
2.6. 칼마르 동맹 시대
3. 근세
3.1. 구스타브 1세 바사 시대
3.1.1. 즉위와 바사 왕조 창건
3.1.2. 내정 정비
3.1.2.1. 스웨덴의 종교 개혁, 루터교 국교화
3.1.2.2. 토지 개혁과 세습제의 확립
3.1.2.3. 내부 반란 진압
3.1.3. 대외 정책
3.1.3.1. 덴마크 내전 개입
3.1.3.2. 러시아와의 전쟁
3.2. 에리크 14세 시대
3.2.1. 즉위와 왕권 강화
3.2.2.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과 에리크 14세의 폐위
3.3. 요한 3세 시대
3.3.1. 러시아와의 전쟁
3.3.2. 종교문제와 후계자 문제
3.4. 칼 9세 시대
3.4.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과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3.4.1.1. 지그문트 3세와의 대립
3.4.1.1.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
3.4.1.2.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3.4.1.3. 리보니아 전쟁
3.4.2. 러시아 동란 시대의 개입
3.4.2.1. 러시아 동란 시대의 혼란 시작
3.4.2.2.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입
3.4.3.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 시작
3.5.1. 즉위 및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의 종식
3.5.2. 군제 개혁과 러시아와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3.5.3. 30년 전쟁 참전과 갑작스런 전사
3.6.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
3.6.1. 30년 전쟁의 계승
3.6.2. 덴마크와의 토르스텐손 전쟁 승리
3.6.3. 30년 전쟁의 승리
3.6.4. 퇴위 선언과 망명 생활
3.7. 최전성기(上), 칼 10세
3.7.1. 초기 생애 및 즉위 과정
3.7.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의 동맹
3.7.3. 제2차 북방 전쟁
3.7.3.1. 제2차 북방 전쟁의 시작
3.7.3.2. 스웨덴의 대공세
3.7.3.2.1. 우이시치에 전투의 승리와 대(大) 폴란드 점령
3.7.3.2.2. 바르샤바 함락과 얀 2세 카지미에슈의 실롱스크 망명
3.7.3.2.3. 리투아니아의 항복
3.7.3.2.4.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점령
4. 근대
5. 현대


폴란드볼 애니메이션으로 요약한 스웨덴의 역사

지도로 표현한 스웨덴의 역사[1]

1. 고대


'''고대 로마제국과 티격태격하던 게르만족 부족 상당수가 스웨덴에 기원'''을 두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들은 이 지역과 나름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종종 남기곤 했다.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수이오네스족이 많은 배를 가지고 강력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서술을 남겼다. 로마 공화정 시기의 테우토니족을 비롯해서 서기 4세기 무렵 로마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고트족 등은 주로 오늘날의 스웨덴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발흥하였다. 스웨덴인들도 룬 문자나 구전 설화로 자신들의 왕이나 영웅에 관련한 기록을 남기곤 했지만 이 중 상당량이 중세 필경사들이 필사하기 전에 소실되었다.
중세 초 바이킹 이른바 노르드인들은 오늘날 노르웨이에 해당하는 지역과 스웨덴 및 덴마크에 해당하는 지역 사이에 방언과 문화, 교역 방향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노르웨이 일대의 노르드인들이 주로 브리튼 제도 북부와 건지 섬, 저지 섬, 아이슬란드 등 서쪽, 즉대서양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선호하였다면 스칸디나비아 중부와 덴마크에 거주하던 노르드인들은 서유럽 해안지대 외에도 동유럽 해안지대와 수운 교통을 적극 개척하였다. 노르드인들은 흑해와 북해를 잇는 교역로를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압바스 왕조의 금화나 중앙아시아의 불상이 당시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교역량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르드인들의 도시가 점차 성장하면서 초기 형태의 왕국이 스웨덴에 성립되었다.

2. 중세


스웨덴의 초기 역사는 신화와 전설로 이루어져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가늠하기 힘들어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많다. 전설에 의하면 북유럽 신화의 신인 프레이르로부터 비롯된 윙글링 왕가가 스웨덴을 통치했고 노르웨이를 최초로 통일한 하랄 1세 하르파그리도 윙글링 왕가의 후손이라고 한다. 사실로 확인되는 스웨덴의 본격적인 역사는 웁살라 근처의 멜라렌 호수를 근처에서 스베아족이 건설한 스베아 리케(Svea Rike; '스베아족의 나라'라는 뜻)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가 이미 AD 100년 경에 스베아 리케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고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을 창건한 류리크와 바랑기아인들도 스베아족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AD 10세기말에 우플란드 지방을 통치하던 에리크 6세가 피리스벨리르 전투에서 조카인 스티르비르욘을 물리치고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여 '승리왕(Segersäll)'이라는 별칭을 얻고 멜라렌 지방을 중심으로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에리크 6세라는 칭호를 쓴 이유는 그 이전의 전설 상의 스웨덴 왕을 모두를 계승한다는 의미인데, 다만 에리크 6세가 윙글링 왕가의 후예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직접 윙글링이라는 가문명을 사용했는 지는 확실치 않으며 역사적으로는 에리크 6세가 창건한 왕조를 문쇠(Munsö) 왕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아예 에리크 6세 자체의 실존 여부도 부정하고 에리크 6세의 아들이자 스웨덴 최초의 그리스도교 군주인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을 최초의 왕으로 보기도 한다.
AD 995년 에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초기 북유럽 역사를 기록한 브레멘 주교의 아담에 의하면 에리크 6세가 AD 994년 덴마크 왕 스벤 1세를 잉글랜드로 내쫓고 AD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지배했지만 에리크 6세가 사망하자 스벤 1세에게 덴마크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덴마크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지만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의 어머니이자 에리크 6세의 미망인인 시그리드가 스벤 1세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크 6세가 덴마크를 지배했다고 한 시기에 스벤 1세는 잉글랜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은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어쨌든 울라프 3세 쇠트코눙와 덴마크의 스벤 1세의 동맹은 사실로 보이는데 실제로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 트뤼그비손을 몰락시키는 데 동참했다. AD 1000년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라이나를 습격하고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울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 비록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고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2]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AD 1008년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라틴어로 왕의 칭호인 '렉스(REX)'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AD 1022년 사후에는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러나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에 의하면 여전히 스웨덴은 대부분 전통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 AD 1015년 노르웨이의 초대왕 하랄 1세의 5대손인 울라프 2세도 AD 1013년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뒤 AD 1015년 노르웨이로 되돌아 와서 AD 1016년 노르웨이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는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울라프 2세가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의 딸인 잉리드와의 결혼을 청했으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잉리드를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시켰다. 이에 전쟁이 임박해지자 AD 1019년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와 화해하고 다른 딸인 아스트리드를 결혼시켰다.
AD 1022년 스웨덴 왕 울라프 쇠트코눙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본래 이름은 야코브였으나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적인 이름인 아눈드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울라프 3세 쇠트코눙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 섭정 울프 야를이 AD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트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트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트가 울프 야를을 제압하였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AD 1028년 노르웨이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울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후 크누트가 사망하자, 노르웨이의 왕이 된 스벤에 맞서 망누스 1세를 지원해 노르웨이 왕위로 복귀시켰다.
AD 1060년 에문드 2세가 사망하면서 문쇠 왕가가 단절되고 에문드 2세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스텐킬은 스웨덴 최초의 백작(야를)으로서, 웁살라가 아닌 베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이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의 고대로부터 이어진 왕계가 단절되었는데 이는 정통성 부족을 의미했다. 또한 당시 스웨덴은 아직 그리스도교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립도 심각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스텐킬도 제위 6년 만인 AD 1066년 사망하면서 스웨덴은 왕위를 둘러싼 내전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스텐킬의 아들로 추정되는 에리크 7세 스텐킬손과 이교도인 에리크 8세가 왕위를 두고 1년간 내전을 벌이다 둘다 사망한 후 AD 1067년 스텐킬의 아들인 할스텐이 동생인 잉에 1세의 보좌를 받아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할스텐의 왕권이 매우 불안하여 결국 AD 1070년 폐위되고 만다.
이후 러시아의 키예프 루시 출신인 아눈드 4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스웨덴의 전통 신앙을 거부하여 AD 1075년 폐위당했다. 그리고 AD 1070년부터 스웨덴 남부의 예타족의 땅인 예탈란드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호콘이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였다. 일부에서는 아눈드 4세를 건너뛰고 할스텐 다음 왕으로 호콘을 손꼽기도 한다. 그러나 AD 1080년경부터 폐위되었던 할스텐이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 왕으로 복귀했다. AD 1081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서에 의하면 이니셜 'A'와 'I'을 베스테르예틀란드의 공동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니셜 'I'는 잉에 1세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니셜 'A'가 할스텐이라는 설과 호콘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어느 기록에서는 호콘이 사망한 후 잉에 1세가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잉에 1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스웨덴 전통 신앙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AD 1084년 폐위당했고 이교도이자 처남인 스벤에게 잠시 왕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AD 1087년 스벤을 살해하고 왕위를 되찾았고 AD 1105년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아들인 랑발이 먼저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는 형인 할스텐의 두 아들인 필리프와 잉에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 그렇지만 AD 1118년에는 필리프가, AD 1125년에는 잉에 2세가 모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차례로 사망하면서 스텐킬 왕조가 갑자기 단절되었다.
이후 덴마크 왕 닐스와 잉에 1세의 딸인 마르가레타 사이에서 태어난 망누스 1세가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고 스웨덴 남부의 예타족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망누스 1세를 반대하여 웁살라의 스베아족은 스텐킬 왕가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랑발을 별도의 왕으로 선택했다. 비록 랑발이 재위 1년만에 예타족에게 살해당했지만 망누스 1세도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AD 1130년 외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동부) 출신으로 베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서부)에서 왕으로 선택된 스베르케르 1세에 의해 스웨덴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스베르케르 1세의 왕권도 그리 안정되지 못하여 그의 사후 왕위가 베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인 에리크 9세에게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스웨덴 왕위를 두고 스베르케르 가문과 에리크 가문이 서로 다투며 번갈아 가며 차지하는 혼란이 찾아온다.

2.1. 내전


AD 1125년 스텐킬 왕조가 단절된 이후 왕위를 두고 혼란이 발생하였으나 AD 1130년 외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동부) 출신인 스베르케르 1세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스베르케르 1세는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에 힘써서 알바스트라, 뉘달라, 바른헴 등 스웨덴의 각지에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이때 AD 1152년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의 특사로 잉글랜드 출신의 이탈리아 알바노 주교이자 추기경인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가 스칸디나비아에 파견되어 교회 조직의 재정비에 나서면서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주교구가 창설된 데 이어 스웨덴 역시 구(舊) 웁살라(Gamla Uppsala) 대주교구의 신설이 추진되었지만 아직까지 이교도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참고로 추기경 니콜라스는 AD 1154년 로마로 돌아가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로 선출된다.
스베르케르 1세는 26년이라는 장기간의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왕권이 그리 안정되지 않았고 AD 1156년 갑자기 암살까지 당하면서 왕위가 그의 아들이 아닌 베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서부) 출신인 에리크 9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에리크 9세가 통치 기간 동안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웁살라 주교인 헨리크와 함께 북방 십자군의 일환으로 아시아계 핀족이 살던 핀란드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시키며 향후 스웨덴이 핀란드를 지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에리크 9세는 비록 로마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시성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AD 1157년 에리크 9세가 핀란드 원정을 떠나기 전 기도를 올리면서 파란 하늘에 노란색 십자가를 보았는데 여기에서 오늘날의 스웨덴 국기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에리크 9세도 AD 1161년 암살당하면서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계승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잉에 1세의 손녀의 아들인 망누스 2세가 잠시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는데 그는 스베르케르 1세와 에리크 9세의 유력한 암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 결국 망누스 2세도 재위 1년 만에 스베르케르 1세의 아들인 칼 스베르케르손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칼 스베르케르손이 칼 7세로 즉위하면서 스웨덴은 다시 스베르케르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칼 7세는 스웨덴 역사상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첫번째 왕이었지만 지금은 알려지지 않는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설 상의 6명의 왕이 존재했기 때문에 칼 7세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칼 7세가 즉위할 당시 이미 스웨덴은 에리크 9세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화가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1세 시절에 추진되었던 대구교구 창설이 비로소 결실을 맺으면서 AD 1164년 웁살라 대주교구가 설치되고 덴마크의 룬드 대주교구로부터 독립하였다. 이렇게 비록 칼 7세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그도 역시 왕위 세습권만은 확보하지 못한 채 재위 6년만인 AD 1167년에 암살당했다. 이에 덴마크에서 망명 중이던 에리크 9세의 아들인 크누트 1세가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웨덴은 다시 에리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스베르케르 왕가와 에리크 왕가가 서로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후 비록 칼 7세의 2명의 동생이 외스테르예틀란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AD 1173년 크누트 1세가 반란을 모두 토벌하였다. 이제 크누트 1세는 AD 1187년 스톡홀름을 비롯하여 수많은 요새를 세우면서 스웨덴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AD 1196년 크누트 1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스베르케르 가문과 에리크 가문이 번갈아 계승하는 관례가 계속해서 이어져 스베르케르 가문의 칼 7세의 아들인 스베르케르 2세가 다시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스베르케르 2세는 즉위 과정에서 크누트 1세에 의해 야를(Jarl)로 임명받아 왕국의 2인자가 되었던 비르예르 보르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첫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비르예르의 딸인 잉리드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스베르케르 2세는 AD 1202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비르예르가 사망하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1살에 불과한 아들인 요한 1세를 야를로 임명했다.
스베르케르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크누트 1세의 아들들은 스웨덴 왕궁에 머물렀지만 AD 1203년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노르웨이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후 AD 1205년 크누트 2세의 아들들이 노르웨이의 유력 세력인 비르클레크스족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침공했지만 스베르케르 2세가 엘가로스 전투에서 크누트 1세의 아들들을 격파하여 4형제 중 3명을 처형했다. 하지만 막내인 에리크 10세만은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AD 1208년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재침공하여 이번에는 대승을 거두고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베르케르 2세가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되찾기 위해서 AD 1210년 스웨덴을 공격하였으나 예스트릴렌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에리크 10세가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뤘고 스베르케르 2세를 지원했던 덴마크와 화해하기 위해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의 누이인 리케자와 결혼시키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AD 1216년 비싱쇠 섬에서 고열로 급사하고 말았기 때문에 스웨덴 귀족들은 왕위 선출 과정에서 로마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 서둘러 스베르케르 2세의 아들인 요한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스베르케르 왕가의 요한 1세가 스웨덴 왕이 되고 AD 1219년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AD 1222년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왕가가 갑자기 단절되고 말았다.
요한 1세가 급사한 이후 에리크 10세의 아들인 에리크 11세가 6살에 불과한 나이에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면서 스웨덴 왕위는 다시 에리크 왕가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에리크 11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에리크 9세의 증손자 뻘로 에리크 11세의 먼 친척이 되는 크누트 2세가 섭정이 되었다. 그리고 에리크 11세가 성장하여 AD 1229년 크누트 2세를 몰아내고자 했지만 오히려 패배하면서 덴마크로 쫓겨나야 했다. 이후 크누트 2세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지만 크누트 2세가 AD 1234년 사망했기 때문에 에리크 11세가 귀국하여 왕으로 복위할 수 있었다.
이제 에리크 11세가 AD 1250년까지 왕으로서 스웨덴을 통치하게 되지만 그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왕가에 이어서 에리크 왕가도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자 스웨덴 재상로 왕국의 2인자였던 야를 비르예르 망누손이 에리크 11세의 누이인 잉에보리와 결혼하였다는 점과 모계 혈통으로 스베르케르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점을 내세워 자신의 아들인 발데마르 1세를 왕으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 왕위를 둘러싼 스베르케르 왕가와 에리크 왕가의 오랜 분쟁이 종식되고 새로운 '폴쿵아(Folkunga)' 왕조가 시작되었다.

2.2. 재건


AD 1250년 야를 비르예르 망누손의 아들 발데마르가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면서 새로운 폴쿵아 왕가가 시작되었다. 발데마르의 어머니인 잉에보리가 에리크 10세의 딸이었고 아버지인 비르예르 야를이 모계 혈통으로 스베르케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발데마르의 즉위는 스웨덴 왕위를 둘러싼 에리크 왕가와 스베르케르 왕가의 오랜 분쟁의 종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즉위 당시 발데마르의 나이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버지인 야를 비르예르가 섭정이 되어 죽을 때까지 스웨덴을 통치했다. 그리고 AD 1266년 야를 비르예르가 사망한 이후 발데마르가 왕으로서 친정에 나섰지만 그의 동생인 망누스가 스웨덴 공작이 되어 아버지 비르예르의 지위를 이어받으면서 이제는 스웨덴 왕위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발데마르가 부인인 덴마크왕 에리크 4세의 딸 소피아를 두고 그 동생인 유타와 불륜을 저지르고 애까지 낳았기 때문에 AD 1274년 로마로 향하여 로마교황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이에 망누스가 AD 1275년 반란을 일으켜 발데마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으로 즉위했지만 덴마크가 개입하면서 발데마르도 스웨덴 남부의 예탈란드를 통치할 수는 있었다. 참고로 망누스는 스웨덴 최초의 '망누스'라는 이름의 정식 왕이었지만 찬탈자나 대립왕까지 왕조 계보에 포함시키면서 '망누스 3세'로 명명되었다. 또한 망누스 3세는 AD 1278년 스웨덴 남부에 살던 고트족의 군주를 자처하였기 때문에 '고트족의 왕(rex Gothorum)'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후의 스웨덴 왕들이 '스웨덴인과 고트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이후 망누스 3세는 스웨덴에 대한 대대적인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우선 AD 1279년 알스뇌 규약을 통해서 평민 중 상류 계층에게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시에 군마를 제공하는 대신에 면세 특권을 허용하였는데 이들은 세금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프랠세(fralse)'라는 귀족 계층이 되었다. 또한 망누스 3세는 교회 조직도 재정비하여 주교는 각 주교구의 참사회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교회법에 따른 종교 재판으로만 처벌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교회에게도 면세 특권을 부여하면서 스웨덴 교회가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제3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망누스 3세는 기존의 성직자와 귀족이 참여하는 국정 회의를 체계화하여 귀족, 주교, 지방회의 의원, 왕의 군사, 법률 보좌관, 재상 등이 참여하는 원로원(Riksradet)을 구성했다. 이들 원로원 의원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영지에 머물다가 회의가 소집될 때만 모이게 되었다.

2.3. 혼란 재개


풀쿵아 왕조를 창건한 이후 스웨덴의 통치 체제를 정비한 망누스 3세였지만 후계 구도에 있어서는 만전을 기하는 데 실패했다. 비록 AD 1290년 망누스 3세가 사망할 때 자신의 장남인 비르예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나이가 10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직접 통치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먼 친척이자 군대를 총괄하는 지위인 '컨스터블(constable)'인 토르길스 크누트손을 섭정으로 지명하고 원로원을 통하여 통치하도록 해야만 했다. 이에 토르길스가 스웨덴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스웨덴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특히 에리크 9세 시절 중단되었던 핀란드 정복을 재개하여 AD 1293년 카렐리야 서부를 장악하고 비보리에 요새를 세우며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AD 1302년 비르예르의 동생인 에리크와 발데마르가 각각 쇠데르만란드 공작과 핀란드 공작으로 임명받았다. 이후 에리크와 발데마르는 스웨덴 통치권에 대한 야심을 들어냈고 그러던 중 섭정인 토르길스가 망누스 3세 이후 덴마크의 제3의 세력으로 성장했던 교회 측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자 교회의 지원을 받아 토르길스를 축출하며 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에리크와 발데마르가 비르예르의 아들인 망누스 비르예르손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면서 비르예르가 에리크와 발데마르의 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토르길스는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에리크 및 발데마르와 비르예르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면서 AD 1306년 에리크와 발데마르가 비르예르를 호투나에서 붙잡아 뉘셰핑 성에 감금하는 호투나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AD 1308년 덴마크 왕 에리크 6세의 압력에 따라 비르예르가 석방되었기 때문에 이후 10년간 스웨덴 귀족들이 둘로 나뉜 채 서로 다투게 되었다. 비록 AD 1317년 비르예르가 뉘셰핑 파티에서 에리크와 발데마르를 체포하여 이듬해 감옥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으나 에리크와 발데마르의 측근들이 반격에 나서서 AD 1318년 비르예르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에리크가 노르웨이 왕 호콘 5세의 외동딸 잉게보리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망누스 4세가 AD 1319년 7월 웁살라 전국의회를 통해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망누스 4세는 모계혈통에 따라 같은 해 8월 노르웨이 왕위까지 이어받으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을 모두 겸하게 되었다.

2.4. 스웨덴-노르웨이 시대



2.4.1. 망누스 4세 시대


스웨덴의 왕권을 확립했던 망누스 3세가 AD 1290년 사망한 뒤 그의 아들들과 스웨덴 귀족들의 대립하는 혼란이 거의 30년 간 이어졌지만 망누스 3세의 차남 쇠데르만란드 공작 에리크와 노르웨이 왕 호콘 5세의 딸 잉에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망누스 4세가 AD 1319년 7월 왕위에 오르면서 겨우 종식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호콘 5세도 사망하면서 망누스 4세가 노르웨이 왕위까지 상속받아 망누스 7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망누스 4세의 즉위 당시 나이가 3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할머니 홀슈타인의 헬비히, 어머니 노르웨이의 잉에보리, 그리고 덴마크 귀족인 크누트 욘손과 노르웨이 귀족인 에를링 비드쿤순이 섭정단을 조직했다.
비록 망누스 4세가 성년이 되기 전인 AD 1333년 노르웨이에서 에를링 비드쿤손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섭정단이 큰 무리없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양국을 통치했다. 또한 당시 덴마크는 독일의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 및 홀슈타인-플뢴 백작 요한 3세가 그동안 덴마크 왕실에 빌려준 대출금의 담보를 위해 영토 대부분이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는데 이에 AD 1332년 스코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에 귀속될 것을 요청하고 나서자 스웨덴 섭정단은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스코네를 스웨덴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AD 1336년 망누스 4세가 20살이 되자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왕과 노르웨이 왕으로서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르게 되었지만 AD 1338년 노르웨이 귀족들이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결국 AD 1343년 바르베리 조약에 의한 대타협이 이루어져 스웨덴 왕위는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이어받지만 노르웨이 왕위는 차남인 호콘 6세가 계승하고 당장 호콘 6세가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대신에 호콘 6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망누스 4세가 섭정이 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망누스 4세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스웨덴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지방법들을 통일하기 위한 '통일 국법(Landslag)'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스웨덴 전국의 도시들에게 적용되는 '도시법(Stadslag)'도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망누스 4세의 대외정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AD 1348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하였으나 AD 1350년부터 북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흑사병(페스트)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4.2. 노르웨이의 분리와 스웨덴 귀족들의 반란


망누스 4세는 치세동안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귀족들과 교회의 경제력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샀다. 그리고 AD 1355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하였던 차남인 호콘 6세가 성년이 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은 종식되고 다시 별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러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었지만 그동안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했던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망누스 4세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의 수장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에리크 1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을 얻어냈고 AD 1356년에는 로마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AD 1357년 망누스 4세로부터 핀란드와 스웨덴 남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망누스 4세가 반격에 나서서 AD 1359년 노르웨이 왕이 된 차남 호콘 6세와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장남인 에리크 12세와도 화해하였다. 같은 해 에리크 12세가 갑자기 병사하였고 이듬해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가 망누스 4세를 배신하여 스코네를 되찾아 갔다. 하지만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한 스웨덴 귀족들이 망누스 4세의 장인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접근하여 그의 아들인 알브레크트에게 왕위를 제안했기 때문에 망누스 4세는 스코네의 탈환을 포기하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다시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망누스 4세는 AD 1362년 호콘 6세를 스웨덴의 공동왕으로 임명하여 노르웨이의 지원도 받아내었다.
이렇게 망누스 4세가 덴마크 및 노르웨이와 공동 전선을 펼쳤으나 AD 1364년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가 북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대관식까지 치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스웨덴은 8년 동안 망누스 4세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 지지파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AD 1364년에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 세력이 망누스 4세를 지원 온 호콘 6세의 노르웨이 군을 물리치고 망누스 4세까지 포로로 붙잡았다. 이제 호콘 6세가 AD 1370년 한자동맹 도시들에게 상당한 무역 특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까지 받아 스톡홀름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결국 호콘 6세와 알브레크트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포로로 붙잡혀 있던 망누스 4세가 풀려나는 대신에 알브레크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2.5. 덴마크-노르웨이 창설과 칼마르 동맹



2.5.1. 섭정 마르가레테의 덴마크-노르웨이 통치 시작


덴마크는 AD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정통성 있는 왕위계승 후보자가 없기 때문에 덴마크 왕위가 비어있는 대공위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발데마르 4세의 딸인 잉게보르그가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3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알브레크트 4세가 외할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후광에 힘입어 강력한 왕위계승권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가문이 이미 스웨덴 왕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덴마크 귀족들이 이를 거절하고 노르웨이왕 호콘 6세와 결혼한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의 아들인 울라프 2세를 AD 1376년 덴마크 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AD 1380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가 사망하자 울라프 2세가 노르웨이 왕 울라프 5세로 즉위하면서 이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울라프 2세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었다.

2.5.2. 스웨덴 왕 알브레크트와 스웨덴 귀족 간의 갈등


비록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지만 스웨덴 귀족들로 이루어진 섭정 의회의 광범위한 권한을 인정해 주어야 했다. 그 중에서 알브레크트를 왕위에 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부 욘손 그리프는 무려 1,500여개의 농장을 얻고 스웨덴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비록 알브레크트가 19년 간이나 왕위를 유지했지만 스웨덴 서부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알브레크트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주요 지역의 토지를 독일 영주에게 넘겨주고 중요 보직에도 독일인만 중용하자 스웨덴 귀족들은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알브레크트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AD 1389년 부 욘손 그리프는 사망하자 이제 스웨덴 귀족들이 부 욘손 그리프의 방대한 영지의 상속권을 두고 알브레크트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이 된 마르그레테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2.5.3. 섭정 마르가레테의 3왕국 통합, 칼마르 동맹의 탄생


본래부터 마르그레테도 스웨덴의 망누스 4세의 왕위를 빼앗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를 상대로 자신의 아들인 울라프 2세가 망누스 4세의 외손자임을 내세워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울라프 2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스웨덴 사람들도 울라프 2세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울라프 2세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울라프 2세가 AD 1387년 1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그레테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언니 잉게보르그의 외손자이자 포메라이나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의 아들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를 양자로 삼아 덴마크 왕위를 계승시키고 덴마크 왕 에리크 4세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국가자문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실상 마르그레테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AD 1389년 알브레크트와 대립하던 스웨덴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망한 스웨덴의 실력자 부 욘손 그리프의 막대한 영지까지 대부분 넘겨받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부터 마르그레테는 스웨덴의 '여군주이자 통치자(Sovereign Lady and Ruler)'로 선포되었고 AD 1389년 2월 스웨덴을 공격하여 오슬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알브레크트도 생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이후 알브레크트는 6년 간이나 스코네의 린드홀름 성에 감금되어야 했고 AD 1395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스톡홀름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그 사이 마르그레테가 이미 스웨덴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AD 1396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를 노르웨이 왕위와 스웨덴 왕위에 모두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는 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에리크 3세, 스웨덴 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로 각각 명명된다. 이어서 마르그레테는 AD 1397년 6월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3개국 귀족 의회를 소집하여 3개국의 연합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서로 동군연합 상태가 되는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3개국의 통합 왕이 되어 같은해 6월 7일에 3개국 합동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통합 왕이었지만 여전히 마르가레테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렇지만 마르카레테는 칼마르 동맹의 3개국 통합 헌법을 비준시키는 데는 실패하여 칼마르 동맹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칼마르 동맹을 결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귀족 의회를 가지며 고유의 법과 관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칼마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행사했고 나머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를 하나로 통합시킨 업적을 남긴 마르가레테는 마지막으로 덴마크 남부의 홀슈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던 중 AD 1412년 갑자기 사망하였다.

2.6. 칼마르 동맹 시대


칼마르 동맹

3. 근세



3.1. 구스타브 1세 바사 시대



3.1.1. 즉위와 바사 왕조 창건


AD 1397년 덴마크가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지배하는 형태로 형성된 3개국 연맹체인 칼마르 동맹은 120년간 존속되었지만 덴마크 지배에 대한 스웨덴의 항거가 계속되면서 최종적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스웨덴 귀족 가문 출신의 구스타브 1세 바사가 AD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면서 바사 왕조의 스웨덴 지배가 시작되었다. 덴마크에서도 같은 해 반란이 일어나 크리스티안 2세가 폐위되고 대신에 그의 숙부인 프레데리크 1세가 즉위하면서 구스타브 1세 바사는 프레데리크 1세와 반(反) 크리스티안 2세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지위가 안정될 수 있었지만 칼마르 동맹 기간 스웨덴의 섭정을 했던 스투레 가문에서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스웨덴 독립전쟁 중 많은 지원을 받는 대신에 특권을 인정해줘야 했던 북독일의 뤼베크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는 등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초기 왕권은 불안정했다.

3.1.2. 내정 정비



3.1.2.1. 스웨덴의 종교 개혁, 루터교 국교화

초기에 구스타브 1세 바사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로마교황청과의 대립이었다. 본래 왕실 대법관이었던 웁살라 대주교 구스타브 트롤레가 그동안 덴마크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그를 추방하고 새로운 웁살라 대주교로 몬손 망누스를 임명하고자 했지만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었다. 또한 서로 다른 이유로 스웨덴의 4개의 주교직이 공석이 되었는데 구스타브 1세 바사가 후보자를 추천했지만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 중 단 1명만 승인하였다. 비록 로마교황청과의 대립은 구스타브 1세 바사에게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바로 AD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카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문제삼으며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을 계기로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촉발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마르틴 루터의 제자인 울라우스 페트리의 루터교 포교를 지원하였다.
사실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종교 개혁은 단순한 종교만 문제 때문에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은 열악했지만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는 스웨덴 전체 토지 수입의 5분의 1을 가져가고 있었고 면세 특권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한 중세 시대의 주교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관료였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로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AD 1527년 베스테로스 의회에서 상공인, 농민, 일부 귀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주교에 대한 임명권과 교회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웨덴 독립전쟁을 주도하며 많은 신망을 쌓았던 로마카톨릭의 린셰핑 주교인 한스 브라스크도 망명을 떠나면서 더이상 스웨덴에 로마카톨릭의 유지를 주장할 만한 세력이 남지 않게 되었다.
AD 1531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울라우스 페트리의 동생인 라우렌티우스 페트리를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루터교 계열의 웁살라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스웨덴은 완전히 로마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다만 이후에도 곧바로 스웨덴에 루터교가 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울라우스 페트리와 라우렌티우스 페트리 형제는 스톡홀름을 이외에 스웨덴 나머지 지역에도 루터교의 전파에 힘썼고 AD 1541년에는 성경을 스웨덴어로 번역한 이른바 '구스타브 바사의 성경(Gustav Vasas bibel)'을 출판하였다. 최종적으로 AD 1544년 루터교가 스웨덴의 국교로 선포되었고 AD 1554년 핀란드의 오보 주교인 마르틴 쉬테가 사망하자 미카엘 아그리콜라를 신임 오보 주교로 임명하여 핀란드의 종교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3.1.2.2. 토지 개혁과 세습제의 확립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종교 개혁과 함께 토지 개혁도 추진하였다. 당시까지 스웨덴은 다른 중세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봉건제를 유지한 채 귀족들에게 국토의 대부분을 분할해 준 상태였다. 이것이 스투레 가문의 섭정 시절에 중심부를 직할 영지로 변경하고 매년 직접 세금을 징수하여 왕실 재정을 개선시켰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면서 왕실 영지를 더욱 확대시켰고 봉토는 가급적 줄이며 일부 측근에게만 제한적으로 분배하였다. 스웨덴의 전 국토는 크게 조세 농경지, 왕실 영지, 귀족 영지의 셋으로 구분되었고 조세 농경지에는 직접 조세관을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치세 말기가 되면 스웨덴과 핀란드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모두 세금을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구스타브 1세 바사는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귀족 세력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몰수한 교회 재산을 분배해주는 조건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왕권을 강화되면서 스웨덴은 강력한 군주제 국가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세습제의 확립이었다. 본래 스웨덴의 왕위 계승방식은 공식적으로 선출제에 속했으나 구스타브 1세 바사는 AD 1544년 배스테로스 의회에서 각 신분 계급의 대표로부터 장차 왕위를 장자에게 세습하도록 하는 왕위계승법을 제출하였다. 이미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한 구스타브 1세 바사에게 감히 맞설만한 귀족 세력이 없었고 나머지 신분 계급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왕위계승법이 무난하게 통과하였다. 그 덕분에 바사 왕가가 이제 합법적으로 스웨덴 왕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되었다.

3.1.2.3. 내부 반란 진압

구스타브 1세 바사가 펼친 왕권 강화와 종교 개혁 정책은 스웨덴의 곳곳에서 많은 반발을 샀다. 그러던 중 AD 1529년 4월 니달라에 파견된 조세관이 살해당하고 얼마 후에는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 바사가 독일을 방문한 후 귀국하다가 스몰란드의 옌셰핑에서 억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예틀란드의 유력 귀족인 투레 옌손이 스카라 주교 망누스 하랄드손과 함께 농민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한때 베스테르예틀란드와 스몰란드를 장악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인접한 외스테르예틀란드가 반란에 동참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조세관 살해사건을 용서해주는 조건은 여동생 마르가레타가 석방되도록 만들었다. 이후 농민들이 반란을 용서받는 대가로 반란의 주모자인 투레 옌손과 망누스 하랄드손을 구스타브 1세 바사에게 넘기려 했기 때문에 둘이 덴마크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반란에 동참했던 귀족들 몇 명이 처형당하면서 반란이 종식되었다.
구스타브 1세 바사가 겪은 반란 중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스웨덴 독립전쟁 중 자신의 거병에 가장 먼저 동참했던 달라르나의 반란이었다. 달라르나 사람들은 막상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왕으로 즉위한 후 펼친 친(親) 덴마크 성향의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지나치고 그의 종교 개혁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재위 초기 10년 동안 3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AD 1532년 폐위된 채 재기를 노리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달라르나의 반란을 이용하여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까지 벌였지만 도중에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1세에게 붙잡혀 여생을 갇혀 지내게 된다. 이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AD 1533년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달라르나에서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구스타브 1세 바사에 대한 마지막 반란은 AD 1542년 스몰란드에서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중과세를 부과하고 종교 개혁을 추진하며 교회의 종과 물품을 압수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몰란드 농민들이 닐스 다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닐스 다케가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전제군주제와 종교 개혁을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제법 큰 세력이 되었다. 반란이 수개월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달라르마에 편지를 보내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반란군 토벌을 위한 군사 모집을 호소하였고 이 내용을 스웨덴 전역에 전파시켰다. 이것이 효과를 거두면서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독일 용병을 고용하지 않고도 토벌군을 모집할 수 있었고 AD 1543년 봄 스몰란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반란의 주동자인 닐스 다케를 처형하고 사지를 잘라 전국에 전시하도록 했다.

3.1.3. 대외 정책



3.1.3.1. 덴마크 내전 개입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 독립전쟁 당시 스톡홀름을 공격하기 위해서 해군이 필요해지자 북독일의 뤼베크와 협상을 벌여 한자동맹의 해군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상당한 특권을 허용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AD 1533년 덴마크에서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3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가 루터교 신자였기 때문에 로마카톨릭 세력이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요구하는 반란인 '백작 전쟁(Count's Feud)'이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이를 뤼베크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좋은 기회로 여기고 크리스티안 3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단순히 뤼베크를 견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차 크리스티안 2세가 덴마크 왕위를 되찾은 이후 스웨덴 왕위까지 노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위함이기도 했다.
AD 1535년 스웨덴 해군이 릴라벨트 해전에서 한자 동맹의 해군을 격파했고 스웨덴 육군은 스코네를 점령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요한 란차우를 중심으로 한 덴마크의 유틀란트 귀족들과 스웨덴의 지원을 바탕으로 유틀란트 반도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듬해인 AD 1536년 코펜하겐을 함락하고 덴마크 전역에서 왕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백작 전쟁에서 뤼베크가 패배하면서 그동안 뤼베크가 지니고 있었던 발트 해 무역에 관한 특권이 모두 취소되었고 그동안 스웨덴이 뤼베크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채무에 대한 변제 조건도 스웨덴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그리고 AD 1541년 브룀세브루 조약을 체결되면서 덴마크와 스웨덴이 동맹관계가 되었다.

3.1.3.2. 러시아와의 전쟁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또다른 대외 전쟁은 AD 1554년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국과 벌인 것이었다.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은 AD 1547년 '뇌제(러시아어 Grozny)'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이반 4세가 차르(tsar; 황제)를 자처하며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었는데 이반 4세는 황제인 자신과 국왕인 구스타브 1세 바사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외교적 긴장 상태에서 스웨덴과 러시아는 서로 간의 경계인 핀란드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었는데 AD 1555년 핀란드 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스웨덴으로부터 증원받은 핀란드 군이 오레셰크 요새를 공격하였지만 러시아 군이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며 버티자 보급에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듬해인 AD 1556년 러시아 군이 반격에 나서서 비보르크를 공격하는 척 했지만 전염병 때문에 철수했고 전황이 지지부진해지자 AD 1557년 노브고로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3.2. 에리크 14세 시대



3.2.1. 즉위와 왕권 강화


AD 1556년 구스타브 1세는 왕세자인 에리크 14세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영지 배분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차남 요한은 핀란드 공작으로, 3남 망누스는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으로, 막내 칼은 쇠데르만란드 공작으로 각각 임명되었지만 4남 칼과 5남인 스텐은 요절했기 때문에 영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장남인 에리크 14세만이 첫번째 왕비인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의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나머지 자식들은 두번째 왕비인 마르가레타 레이온후부드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차남인 요한이 둘째 왕비의 장남으로서 이복형인 에리크 14세와 자주 충돌했다. 이에 대한 근심 속에서 AD 1560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에리크 14세가 웁살라에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고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초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배하면서 독립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왕권을 대행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에리크 14세가 AD 1561년 아르보가 법령을 통과시켜 이복 동생들의 독립적인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다. 또한 AD 1562년 오랫동안 자신에게 맞섰던 이복 동생인 핀란드 공작 요한이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 지그문트 2세의 누이인 카타리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AD 1563년 요한과 카타리나 부부를 감옥에 가둔 후 그의 영지인 핀란드를 몰수했다. 또한 에리크 14세는 스웨덴의 군사력 강화에 특히 힘을 써서 AD 1562년에는 귀족의 군사적 의무사항을 규정한 새 법률을 제정했고 해군도 육성하여 장차 스웨덴이 발트 해의 해상 강국이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

3.2.2.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과 에리크 14세의 폐위


AD 1561년 리보니아 기사단령이었던 리보니아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복속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에 외젤-비크를 차지하고 있던 덴마크에서 리보니아 북부도 노리기 시작했으나 에리크 14세가 인접한 핀란드를 통해 먼저 병력을 투입하여 리보니아 북부를 차지한 후 '에스토니아 공작령(Duchy of Estonia)'으로 재편했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가 AD 1563년 5월에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인 보른홀름 해전을 이유로 8월 13일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해오면서 '북방 7년 전쟁(Northern Seven Years' War)'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바다에서는 스웨덴이 유리하고 육지에서는 덴마크가 유리하게 흘러가며 지지부진해졌다.
한편 에리크 14세는 즉위 초부터 정신적으로 불안했는데 점차 그 상태가 심각해졌다. 에리크 14세는 자신의 전제군주제와 덴마크 전쟁으로 때문에 내부 불만이 고조되자 반란이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하였고 급기야는 AD 1567년 스투레 가문의 스반테 스투레와 그의 아들인 닐스, 에리크를 반역혐의로 체포하였다. 스투레 가문은 칼마르 동맹 시절 섭정을 잇달아 배출한 만큼 스웨덴 귀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했는데 실제로 구스타브 1세 바사 시절에도 스투레 가문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에리크 14세는 재판 도중에 정신 착란을 일으켜 그대로 처형해 버렸다. 비록 제정신이 돌아온 에리크 14세가 후회하며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지만 스웨덴 귀족들은 더이상 에리크 14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AD 1568년에도 에리크 14세의 기행은 계속되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 출신의 카린 몬스도테르와 결혼하였다. 이렇게 에리크 14세가 명망있는 스투레 가문은 박해하고 미천한 신분의 왕비를 맞아들인 것에 대하여 혈통을 중시하는 스웨덴 귀족들은 분노했고 전년도에 석방되었던 에리크 14세의 동생인 요한이 다른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참했다. 결국 에리크 14세는 폐위된 채 요한이 스웨덴 왕 요한 3세로 즉위했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에리크 14세는 AD 1577년 사망하고 같은 해 에리크 14세의 후손들의 왕위계승권에 대한 박탈되었다.

3.3. 요한 3세 시대



3.3.1. 러시아와의 전쟁


비록 AD 1570년 요한 3세가 슈체친 조약을 체결하면서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을 종식되었지만 같은 해 러시아의 이반 4세가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제는 에스토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리보니아를 둘러싼 전쟁이 재개되었다. 더욱이 외젤-비크 주교가 되었던 덴마크의 망누스가 이반 4세의 봉신을 자처하며 리보니아 왕이 되면서 에스토니아가 협공을 받았기 때문에 초기 전황은 스웨덴에게 매우 불리했다. 그렇지만 에스토니아의 중심도시인 레발(지금의 탈린)이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AD 1574년 총사령관을 폰투스 데 라 가르디에로 교체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편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하고 있었던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가 AD 1569년 7월 두 나라를 병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탄생했다. 그러나 AD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계승은 선출제로 변경됐고 AD 1576년 트란실바니아 공작 이슈트반 바토리가 새로운 군주로 선택되었다. 이후 이슈트반 바토리는 AD 1579년부터 AD 1581년까지 리보니아에서 러시아 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전황이 역전되었고 그 틈을 타고 스웨덴도 나르바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AD 1582년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강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듬해 스웨덴도 러시아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며 에스토니아와 나르바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발트 해 진출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대신에 스웨덴이 발트 해 동부 연안을 장악한 채 러시아와 연결되는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게 된다.

3.3.2. 종교문제와 후계자 문제


요한 3세는 스스로가 유능한 신학자이기도 했는데 로마카톨릭과 루터교의 화해를 위해서 AD 1577년 예식서 '레드북(Red Book)'을 직접 저술하여 로마카톨릭 예식을 일부 부활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많은 루터교 신자들의 반발을 샀고 특히 요한 3세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그 중심에 섰다.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레드북을 거부하고 박해받는 루터교 신자들을 자신의 영지에 숨겨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AD 1592년 요한 3세의 임종을 맞이하면서 형제 간의 대결은 벌어지지 않았다.
요한 3세는 폴란드의 카타리나와 결혼한 후 얻은 아들인 시기스문드를 카타리나의 의견에 따라 폴란드 왕실에서 로마카톨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시기스문드가 모계 혈통으로 야기에우워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AD 1586년 이슈트반 바토리가 사망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새로운 군주로 선출되어 지그문트 3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AD 1587년 요한 3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 왕위까지 계승하게 되었으나 그가 로마카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이 문제는 지그문트 3세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 간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3.4. 칼 9세 시대



3.4.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과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3.4.1.1. 지그문트 3세와의 대립

AD 1592년 요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지그문트 3세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그가 로마카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스웨덴의 평의회가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그문트 3세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AD 1593년 웁살라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루터교가 스웨덴의 국교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스웨덴 안에서 다른 종교의식을 치르지 못하도록 선언했다. 웁살라 종교회의의 결정이 국왕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로마카톨릭 의식을 포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지그문트 3세가 반발했고 국왕인 자신도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호위병으로 대동하고 스톡홀름에 도착한 후 몇 개의 교회에서 여전히 로마카톨릭식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AD 1594년 지그문트 3세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웁살라에 도착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4계급 대표들의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웁살라 종교회의 결정을 재확인하며 지그문트 3세를 압박하였다. 결국 지그문트 3세도 웁살라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을 수용해야 했지만 정작 대관식을 치르고 스톡홀름에 돌아오자 계속해서 로마카톨릭 예배를 하고 로마카톨릭 신자를 정부 요직에 배치했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로 돌아가면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스웨덴 귀족들로 구성된 추밀원(Privy Council)과 함께 스웨덴을 통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권한을 명시하지 않은 채 오히려 각 지방에 자신의 직속 관리와 조세 징수관을 파견하는 방법으로 통치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통치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자신을 섭정 임명을 요구했지만 섭정의 권한에 대해서는 귀족들과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AD 1595년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를 통해 섭정으로 임명받고 지그문트 3세의 부재시 국왕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 결정에 대하여 이번에도 지그문트 3세는 국왕인 자신의 승인없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불법으로 규정했다. 스웨덴 귀족들 역시 자신들은 국왕인 지그문트 3세에게만 충성을 맹세했다며 협조를 거부했다. 이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신분제 의회의 결정사항이 더 우위에 있음을 내세워 귀족들의 반대를 억눌렀다. 또한 지그문트 3세로부터 임명받아 스웨덴 해군을 총괄하고 있던 핀란드-에스토니아의 클라우스 플레임이 복종을 거부하자 AD 1596년 핀란드의 외스테르보텐 농민들을 사주하여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비록 클라우스 플레임이 봉기를 진압하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제 스웨덴이 국왕인 지그문트 3세와 섭정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두 편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웨덴 귀족들이 지그문트 3세의 편에 섰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AD 1597년 재차 아드보가에서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여기에 단 1명의 스웨덴 귀족만이 참석했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분노하자 이에 겁을 먹은 수많은 스웨덴 귀족들이 폴란드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고 클라우스 플레밍의 미망인인 에바 스텐보크가 차지한 오보까지 함락시키며 핀란드까지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3.4.1.1.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

AD 1598년이 되자 지그문트 3세가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지그문트 3세는 독일과 헝가리에서 용병을 모으고 AD 1598년 2월 리보니아 출신의 위르겐 폰 파렌스바흐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스웨덴을 침공하고자 했으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수송선 확보에 애를 먹고 날씨까지 좋지 않아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이 지그문트 3세에게 호응하여 일어난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핀란드 반란군이 먼저 우플란드에 상륙했지만 우플란드 농민군에게 격퇴당했다. 그러나 AD 1598년 5월 폴란드 군이 아바스케르에 상륙하여 8월 칼마르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지그문트 3세가 예틀란드로 진격하자 예틀란드 귀족들과 장교들이 합류했고 우플란드 기병대도 도착했으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도 증원군이 도착했다.
지그문트 3세가 수도인 스톡홀름까지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하지만 폴란드 함대는 폭풍우를 만나는 불운을 겪으며 괴멸되고 말았다. 이제 지그문트 3세가 오히려 스웨덴 내에서 역으로 포위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린셰핑으로 이동해 지그문트 3세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고 지그문트 3세와의 협상을 병행하여 진행했지만 오히려 AD 1598년 9월 8일 스테예보리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때 지그문트 3세를 지원하기 위해서 폴란드에게 증원군을 소집되고 있었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절망에 빠져 잠시 망명까지 고민했지만 측근들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전황이 여러모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불리했지만 아직까지 그에게는 해군이 건제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요아킴 셸이 이끄는 스웨덴 해군이 지그문트 3세에게 합류하려던 폴란드 증원군을 차단하고 오히려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병력을 충원시켜 주는데 성공했다. 이제 위기의식을 느낀 지그문트 3세가 린셰핑으로 후퇴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이를 뒤쫓았고 AD 1598년 9월 25일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완전히 우위를 점하게 된 상태에서 린셰핑에서 지그문트 3세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3.4.1.2.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이후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지그문트 3세에게 폴란드 군을 돌려보내고 지그문트 3세만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스웨덴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그리고 비록 지그문트 3세는 여전히 국왕으로서의 대우는 받았지만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AD 1598년말 폴란드로 도망치듯이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스웨덴 왕위가 공석이 되었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스웨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AD 1599년부터 칼이 반대파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을 시작하여 우선 린셰핑 조약이 체결될 때 지그문트 3세를 지지했던 야코브 네프가 달라르나에서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사생아인 칼 칼손 옐렌히엘름에게 토벌당했다. 또한 지그문트 3세를 지지했던 웁살라 대주교 아브라함 앙에르마누스를 투옥시켰고 여전히 지그문트 3세를 지지하던 칼마르를 공격했으며 수개월 간의 공선전 끝에 5월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스웨덴 의회가 지그문트 3세의 공식적인 폐위를 선언하고 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가 스웨덴에서 루터교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조건으로만 왕위계승권을 인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와 별도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지그문트 3세의 편으로 남아있던 핀란드의 요새들을 공격하여 AD 1599년 8월 모두 제압했다. 그리고 11월 포로로 붙잡혔던 핀란드의 지그문트 3세 지지파를 모두 처형하는 '오보 대학살(Åbo Bloodbath)'을 일으켰다. 그리고 AD 1600년 2월 스웨덴 의회는 지그문트 3세에게 보냈던 최후통첩의 시한이 종료될 때까지 별다른 회신을 받지 못하자 그대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새로운 스웨덴 왕 칼 9세로 인정했다. 이후 칼 9세는 3월 지그문트 3세를 지지했던 스웨덴 귀족 5명을 처형하는 '린셰핑 학살(Linköping Bloodbath)'을 다시한번 일으키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제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만이 유일하게 지그문트 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지그문트 3세와 다시 벌여야 했다.

3.4.1.3. 리보니아 전쟁

폴란드로 돌아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의 탈환을 원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sejm; 의회)의 지원을 얻기 힘들자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지지하는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고 AD 1600년 리투아니아의 대(大) 헤트만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파견하여 몇차례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재정 부족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면에 스웨덴은 국지전의 연패에도 불구하고 징집제를 통해서 많은 군대를 단시간에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에스토니아를 넘어서 이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인 리보니아까지 넘볼 정도가 되었다.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도 병력 증원을 결정하였고 AD 1601년 오스만 제국과 몰도비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야전 헤트만인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리보니아에 도착하여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와 합류하였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3,000명에 불과했고 스웨덴 군은 5,000명에 그 중 기병만 4,000기에 달했지만 AD 1601년 6월 23일 코켄하우젠 전투에서 오히려 스웨덴 군이 '윙드 훗사르(Winged Hussar)'를 중심으로 한 1,000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병대에게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코켄하우젠 전투 이후에 폴란드의 대(大) 헤트만 얀 자모이스키까지 합류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에 스웨덴은 AD 1602년이 되면 그동안 점령했던 리보니아 영토를 대부분 내주며 레발, 페르나우, 하프살, 도르파트 정도만 겨우 유지할 뿐이었다. 비록 60세의 고령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폴란드로 귀국했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AD 1603년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스웨덴 군을 격파하고 도르파트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칼 9세가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리가에 도착했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다시한번 승리를 거두면서 스웨덴의 영역은 더욱 축소됐다. 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이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거절했지만 스웨덴 의회는 AD 1605년 병력 증원을 결의했다.
이에 칼 9세가 10,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AD 1605년 9월 키르홀름에서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보유 병력이 3,600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윙드 훗사르에게 고전했던 경험 때문에 7~8열의 격자 진형을 편성하는 극단적인 수비적인 작전을 펼쳤다. 그렇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4시간에 걸쳐 거짓 후퇴로 유인하자 신중했던 칼 9세도 추격을 시작했으나 정작 전투가 개시되자 불과 30분 만에 스웨덴 기병이 윙드 훗사르를 위시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병대에게 괴멸당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키르홀름 전투에서 스웨덴 군은 8,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혔고 칼 9세도 겨우 목숨만 구한 채 정신없이 도망쳤을 정도로 일방적인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실의에 잠긴 칼 9세가 리가 탈환을 포기한 채 스웨덴으로 귀국했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도 키르홀름 전투의 경의로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재정 부족 때문에 라트갈레(현 라트비아의 동쪽) 지역에서 방어적인 자세만 유지했다. 더구나 AD 1606년 폴란드에서 지그문트 3세의 지나친 왕권 강화에 대항하는 미코와이 제브지도프스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도 폴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에 AD 1608년 요하임 프레데리크 폰 만스펠드가 새로운 스웨덴 군을 이끌고 리보니아를 재침공했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되돌아오면서 10월 가우야 강 전투에서 다시한번 패배를 당했다. 이후에도 전쟁은 이어지지만 국지전에 불과했고 AD 1611년 칼 9세가 사망하면서 공식적인 휴전이 이루어진다.

3.4.2. 러시아 동란 시대의 개입



3.4.2.1. 러시아 동란 시대의 혼란 시작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국은 AD 1584년 뇌제 이반 4세가 사망하고 AD 1598년 그의 아들인 표트르 1세마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 표트르 1세의 처남이자 실권자였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즉위했으나 이반 4세의 요절한 막내 아들인 드미트리가 어딘 가에서 살아있다는 소문에 근거하여 AD 1601년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초기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했지만 AD 1605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망하자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던 러시아 귀족들이 가짜 드미트리 반란군과 합세하여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인 표도르 2세를 살해하고 가짜 드미트리를 차르로 옹립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짜 드미트리까지 살해하고 유력 귀족인 바실리 4세 슈이스키가 새로운 차르가 되었다.

3.4.2.2.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입

바실리 4세 슈이스키가 이제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AD 1607년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하였으나 츠시노에서 자신만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정부의 힘이 약화되자 러시아 북부도 바실리 4세 슈이스키의 통치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궁지에 몰린 바실리 4세 슈이스키가 스웨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칼 9세도 자신의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나 필리프를 러시아 차르로 즉위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군사 지원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지그문트 3세를 자극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본격적인 군사 개입을 초래하여 스몰렌스크가 포위되었고 AD 1610년 6월 클루쉬노 전투에서 러시아-스웨덴 동맹군이 패배하였다.
이제 바실리 4세 슈이스키는 더욱 궁지에 몰렸고 급기야는 러시아 귀족 의회인 두마(Duma)가 바실리 4세 슈이스키를 결정하고 지그문트 3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를 차르로 즉위시키겠다고 결정하였다. 다만 지그문트 3세가 두마에서 요구한 브와디스와프 4세의 러시아 정교회 개종과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 보장, 점령 지역 반환 요구를 거절했고 모스크바에 입성한 후 러시아 귀족들에게 브와디스와프 4세는 물론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하면서 마찰이 빚어졌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지그문트 3세는 모스크바에 소수의 군대만 남긴 채 브와디스와프 4세를 데리고 폴란드로 귀환했다. 다만 AD 1611년 6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이 20개월 간이나 버티던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 사이 칼 9세도 지그문트 3세가 모스크바를 장악한 것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파견했던 야코브 드 라 가르디에게 러시아 북서부의 대도시인 노브고로드를 점령하도록 했다. 그리고 노브고로드에서 러시아의 보야르(boyar; 대귀족)와 성직자, 상인과 도시의 자유민이 모두 참여하는 신분제 회의인 젬스키 소보르(zemskii sobor; 전국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혹은 칼 필리프 중 한 명을 러시아 차르로 선출시키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AD 1611년 4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국경 지역의 칼마르를 공격해 왔기 때문에 더이상 러시아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스몰렌스크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 점령된 데 이어서 노브고로드까지 스웨덴에게 함락당하자 큰 위기 의식을 느끼고 '국민군(Volunteer Army)'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AD 1610년의 제1차 국민군은 실패했지만 제2차 국민군은 AD 1612년 9월 폴란드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AD 1613년 2월 젬스키 소보르를 개최하여 이반 4세의 첫번째 왕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프나의 친정이자 러시아의 명문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인 미하일 1세로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AD 1605년부터 8년간 이러진 '동란시대(Time of Troubles)'의 혼란이 비로소 종식되고 새로운 로마노프 왕조의 지배를 받는 러시아 제국이 등장하게 되었다.

3.4.3.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 시작


한편 스웨덴이 발트 해에서 북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덴마크의 외레순 해협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덴마크에게 많은 통행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이에 칼 9세는 사람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부인 라플란드를 통하는 북해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고 AD 1607년에는 스스로를 "노르드란드의 라프족의 왕(King of the Lapps in Nordland)"이라고 선언까지 하였다. 그러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로서는 스웨덴의 대체 항로 개쳑을 좌시하기 힘들었고 더욱이 이를 자신이 왕위를 겸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영토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더욱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웨덴의 칼 9세가 계속해서 자신의 항의를 무시하자 AD 1611년 4월 선전포고를 하고 '칼마르 전쟁(Kalmar War)'을 시작했다.
이후 크리스티안 4세 직접 6,000명의 덴마크 군을 이끌고 5월 26일 전쟁의 이름이 유래한 칼마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칼 9세도 반격을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기병대를 이끌고 크리스티아노펠 전투에서 덴마크 기병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칼마르 탈환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AD 1611년 여름 발트자르 백의 스웨덴 군이 노르웨이의 옘틀란드와 헤리에달렌로 향하여 무혈입성하는 데 성공했으나 노르웨이 군의 반격을 받으면서 AD 1612년 가을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AD 1611년 겨울이 다가오자 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가 되었는데 AD 1611년 10월 20일 칼 9세가 뇌졸증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17세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면서 칼마르 전쟁을 함께 이어받게 되었다.

3.5.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



3.5.1. 즉위 및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의 종식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즉위 이후 강화 제의를 했으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로부터 거절당했다. 오히려 크리스티안 4세가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에 군대를 더욱 증강시켰기 때문에 대하여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국경 지역을 습격했지만 AD 1612년 2월 11일 빗셰 전투에서 덴마크 군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덴마크 군이 스웨덴 공격을 재개하여 엘브스보리와 굴베르그를 함락시키고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했으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초토화 작전와 보급선을 교란하는 유격전을 통해 덴마크 군을 괴롭히면서 수도 스톡홀름을 지켜냈다.
결국 AD 1613년 1월 20일 칼마르 전쟁의 여파로 발트 해 무역에 곤란을 겪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중재를 통해서 크네레드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칼마르 전쟁이 종식되었다. 스웨덴은 점령했던 노르웨이 영토를 모두 되돌려주고 엘브스보리와 굴베르그를 돌려받는 대신에 많은 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외레순 해협에 대한 자유무역 권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되었다.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을 마무리하자 본격적으로 국내 내정과 군사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3.5.2. 군제 개혁과 러시아와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제 개혁도 추진하며 우선 전술단위 규모를 줄여 여러 개의 중대로 구성된 대대와 이 대대가 모인 여단을 기본대형으로 편성하여 전술적 유연성을 키웠다. 그리고 조작이 쉽고 가벼운 대포를 제작하여 전쟁에 동원하면서 화력을 강화하였다. 무엇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 군을 지휘하던 마우리츠 반 나사우가 처음으로 선보인 선형진을 개량하여 보병과 기병, 포병의 3병력의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하도록 부대를 훈련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다시 리보니아를 두고 러시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시작했다.
먼저 러시아에 대해서는 AD 1613년 미하일 1세 로마노프에 의해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자 차르 지위는 포기한 채 공세를 펼쳐 카렐리야 서부와 잉그리아를 차지하고 러시아의 발트 해 진출만 차단하였다. 이어서 발트 해 동부 연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 AD 1617년 6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공격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AD 1618년 9월 2년간의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AD 1621년 8월 공격을 재개하여 1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리보니아의 주도인 리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잠시 간의 휴전 끝에 AD 1625년 휴전 기한이 종료되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리보니아에 대한 대공세를 재개하여 AD 1626년 1월 17일 발호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리하여 리보니아를 장악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제 전장을 확대하여 AD 1626년 6월 프로이센에 상륙하였다. 그의 의도는 리가에 이어 그단스크(단치히)까지 점령하여 발트 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보병, 기병, 포병의 새로운 3병 합동전술을 앞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자랑하는 윙드 훗사르를 상대로 그니에프 전투와 챠르네 전투, 디르샤우 전투 등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프로이센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신성로마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지원하고 나서면서 AD 1629년 6월의 트슈치아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결국 AD 1629년 10월 6년 기한의 알트마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3.5.3. 30년 전쟁 참전과 갑작스런 전사


AD 1618년 보헤미아에서 로마카톨릭 성향의 로마카톨릭인 신성로마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이 발발했다. 그리고 보헤미아인들이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제후인 라인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AD 1619년 11월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했으나 AD 1620년 11월 빌라호라 전투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의 카톨릭 동맹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에 이어 AD 1623년에는 본래 영지인 라인팔츠 선제후령까지 상실한 채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홀슈타인의 공작 작위를 겸하고 있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30년 전쟁에 개입했지만 AD 1626년 8월 루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고용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대패를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AD 1627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에게 유틀란트 반도까지 점령당했고 AD 1628년 볼가스트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면서 크리스티안 4세도 전쟁 지속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AD 1629년 5월 뤼베크 조약을 체결하고 모든 실지를 돌려받았지만 더이상 30년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이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에서 신성로마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앙금을 가지게 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군제 개혁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보병, 기병, 포병의 3병 협동 전술을 앞세워 AD 1631년 9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에게 대승을 거뒀고 AD 1632년 4월 라인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전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AD 1632년 5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와 벌인 뤼첸 전투에서는 전투 자체는 승리를 거뒀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는 아들은 없었고 6살의 어린 딸인 크리스티나만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은 큰 위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3.6.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



3.6.1. 30년 전쟁의 계승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갑작스럽게 전사하자 스웨덴의 외무상(스웨덴어 Rikskansler)인 악셀 옥센셰르나는 구스타브 2세의 어린 외동딸인 크리스티나를 서둘러 여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악셀 옥센셰르나를 비롯한 5명의 섭정단이 대리 통치를 맡았고 AD 1633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하일브론 동맹(Heilbronn League)'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로마카톨릭 측에서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했고 스페인이 새롭게 군사 지원을 왔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대신에 스웨덴 군의 지휘를 맡은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와 구스타브 호른은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인 헝가리-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동생인 추기경 왕자가 연합한 스페인-황제군과 싸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웨덴의 세력이 약화되자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제후인 작센 선제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하일브론 동맹을 파기하고 신성로마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프라하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웨덴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악셀 옥센셰르나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그동안 로마카톨릭 국가이면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지원하던 프랑스를 설득하여 30년 전쟁에 직접 참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AD 1637년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하면서 신성로마황제가 페르디난트 3세로 바뀌었고 그동안 분전을 거듭하던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와 요한 바네르가 AD 1639년과 AD 1640년 차례로 사망했으나 새롭게 등용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일전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빛나는 승리를 거뒀던 브라이텐펠트에서 AD 1642년 10월 두번째 벌어진 전투에서 다시한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3.6.2. 덴마크와의 토르스텐손 전쟁 승리


이제 30년 전쟁의 전황이 다시 유리해지자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AD 1643년 12월 오랜 앙숙인 덴마크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총사령관인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이름을 딴 '토르스텐손 전쟁(Torstenson War)'이 시작하였다. 이후 육지에서는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AD 1644년 2월 유틀란트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바다에서도 AD 1644년 7월 콜베르거하이데 해전에서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한 쪽 눈을 멀게 만드는 부상을 입힌 데 이어서 10월 13일 페마른 해전에서도 칼 구스타브 브랑겔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고 발트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크리스티안 4세가 왕위를 겸하고 있던 노르웨이에서는 크리스티안 4세의 사위인 한니발 세헤스테드가 분전했으나 덴마크의 불리한 전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더이상 버티지 못한 크리스티안 4세가 강화 협상을 제안하자 유리한 조건으로 AD 1645년 8월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서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의 옘틀란드, 헤리예달렌, 이드레, 세르나와 고틀란드, 외셀의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 이행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해 할란드도 30년간 조차받기로 했다. 또한 스웨덴은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를 완전히 면제받았고 크리스티안 4세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3세가 관리자로 임명받았던 브레멘 대주교령과 베르덴 주교령의 영유권까지 넘겨받아 속령인 브레멘-베르덴 공작령으로 재편했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은 북독일 지역에 영토를 확장하고 덴마크로부터 발트 해의 제해권을 빼앗으며 발트 해를 내해로 둔 강대국이 되었다.

3.6.3. 30년 전쟁의 승리


스웨덴이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덴마크에게 승리를 거두는 사이에 30년 전쟁도 프랑스 군의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의 활약으로 전황이 유리해졌다. 프랑스 군은 AD 1643년 5월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 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데 이어서 AD 1644년 8월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도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하던 바이에른 군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덴마크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도 AD 1645년 3월 얀카우 전투에서 황제군을 괴멸시켰고 같은 해 8월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도 제2차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을 또다시 격파하였다. 그러나 렌나르트 토르스텐손과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모두 신병 상의 이유로 야전 지휘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3세가 기적적으로 병력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하지만 AD 1648년 5월 추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스웨덴의 칼 구스타브 브랑겔과 프랑스의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협공에 다시한번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페르디난트 3세의 근거지인 보헤미아의 프라하에 대한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칼 구스타브(훗날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새로운 스웨덴 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를 지휘했다. 칼 구스타브는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팔츠백인 요한 카지미르와 칼 9세의 딸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크리스티나 여왕에게는 고종 사촌이 되었다.
그 사이에도 휴전 협상은 계속되었고 3개월 간의 포위전이 이어지며 프라하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AD 1648년 10월 종전에 합의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된다. 이를 통해서 신성로마제국의 각 영방 국가들은 독자적인 주권과 외교권을 갖게 되었고 루터교는 물론 칼뱅파도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신성로마제국은 외형만 유지되었을 뿐 사실상 붕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스웨덴도 서(西) 포메라니아 지역과 비스마르 항구를 영유하고 덴마크로부터 넘겨받은 브레멘-베르덴 공작령에 대한 소유권도 공인받았다. 그 밖에 또 다른 승전국인 프랑스도 영토적인 이득을 얻었고 전쟁의 도화선이 된 라인팔츠 선제후령에 대해서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가 하(下) 팔츠 지역을 돌려받게 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지만 사실상 독립해 있었던 네덜란드 공화국과 스위스 연방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3.6.4. 퇴위 선언과 망명 생활


이제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돌연한 전사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의 승전국 지위를 얻으며 발트 해를 내해로 둔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 사이 크리스티나 여왕도 AD 1644년 성년의 나이에 도달했기 때문에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행하였다. 다만 그동안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악셀 옥센셰르나와는 여러 가지로 마찰을 빚었는데 30년 전쟁 말기에 고종사촌인 칼 구스타브를 스웨덴 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과 AD 1648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 것도 악셀 옥센셰르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리스티나 여왕이 강행한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어려서부터 르네 데카르트를 가정교사로 두면서 학식과 교양 수준이 높았고 외국의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를 가졌으며 특히 연극과 발레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스웨덴의 군주 지위는 부담스러워 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했는데 사실 칼 구스타브를 스웨덴 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도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스웨덴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세우기를 원해서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수많은 유럽 왕가와 스웨덴 귀족들로부터 결혼 구애를 받았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고 독신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AD 1649년 원로원과 악셀 옥센셰르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사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루터교의 나라인 스웨덴에게 이례적으로 로마카톨릭에 심취한 상태였다. 이에 크리스티나 여왕은 이미 로마카톨릭의 본고장이자 문화와 예술의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이탈리아의 로마로 가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AD 1654년 6월 6일 돌연 퇴위를 선언하고 웁살라 성에서 스스로 왕관을 벗으며 칼 구스타브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에 따라 칼 구스타브가 새로운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면서 칼 10세 구스타브로 명명되고 바사 왕조에 이은 새로운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AD 1654년 여름 스웨덴을 떠났고 AD 1654년 8월 28일 악셀 옥센셰르나마저 사망하면서 스웨덴은 칼 10세 구스타브에 의한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한편 퇴위한 크리스티나는 AD 1654년 12월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융숭한 환영을 받은 뒤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스웨덴의 재정 지원 덕분에 남은 여생을 풍족하게 지내며 유럽 사교계에서 여왕 대접을 받으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또한 로마교황 및 추기경과 친분을 맺으며 로마카톨릭 교회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때 나폴리 왕위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지위를 노리기도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AD 1689년에 사망하여 로마의 성(聖) 베드로 성당에 안장되었다.

3.7. 최전성기(上), 칼 10세



3.7.1. 초기 생애 및 즉위 과정


스웨덴은 AD 1654년 6월 크리스티나 여왕이 갑작스럽게 퇴위하면서 '바사 왕조(Vasa dynasty)'가 단절되고 그녀의 고종 사촌인 칼 10세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Palatinate-Zweibrücken Dynasty)'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팔츠백 요한 카지미르와 스웨덴 왕 칼 9세의 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칼 10세 구스타브는 미혼이었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자식이 없는 경우를 대비하여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로 부상했기 때문에 스웨덴 왕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성년이 된 칼 10세 구스타브는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AD 1618년 ~ AD 1648년)'에 참전해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휘하에서 '제2차 브라이텐벨트 전투(Second Battle of Breitenfeld, AD 1642년)', '얀카우 전투(Battle of Jankau, AD 1645년)'에 참여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내심 독신주의를 고수하며 퇴위를 생각했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AD 1648년 독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미처 전공을 세우기 전에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종식되었다. 다만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후 전권대사로 임명받으면서 외교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후계자로 선포되었고 5년 뒤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즉위 직후 AD 1654년 10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인 프리드리히 3세의 딸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는 데 이는 오랜 적대국인 덴마크와 장래에 전쟁을 벌일 것을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5년 3월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의회(스웨덴어 Riksdag)'를 개최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여 전쟁이 필연적이고 스웨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스웨덴 의회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3.7.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의 동맹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며 먼저 명목상 폴란드 왕국의 종주권 아래에 놓인 프로이센 공작을 겸하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동맹을 추진하였다. 본래 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령(State of the Teutonic Order)'이었지만 AD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Second Treaty of Thorn)'에 의해 동서분할되어 폴란드가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Royal Prussia)'이라는 이름으로 서(西) 프로이센을 차지했고 튜튼 기사단령은 나머지 동(東) 프로이센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AD 1525년 마지막 튜튼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가 루터교로 개종하고 튜튼 기사단을 해체하면서 튜튼 기사단령은 '프로이센 공국(Duchy of Prussia)'으로 재편되어 폴란드 왕국의 종주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AD 1618년 아들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사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간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는 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시절에도 이어지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이지만 프로이센 공작으로서는 폴란드의 봉신이 되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에 칼 10세 구스타브의 동맹 제의는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로부터 독립시켜 장차 자신의 두 영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신중한 성격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로이센 공국의 항구들만 제공하는 조건으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만 하였다.

3.7.3. 제2차 북방 전쟁



3.7.3.1. 제2차 북방 전쟁의 시작

스웨덴 의회의 승인에 이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묵인까지 얻은 칼 10세 구스타브가 AD 1655년 7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위해서 출병하면서 5년 간 이어질 '제2차 북방 전쟁(Second Northern War)'이 시작되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얀 2세 카지미에슈가 즉위한 이후 루테니아(Ruthenia;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쟈 카자크족(Zaporozhian Cossacks)이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지도 아래 AD 1648년부터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AD 1653년 10월에는 자포로쟈 카자크족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까지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고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오면서 동쪽 영토의 상당수를 상실하고 말았다. 여기에 스웨덴도 이미 AD 1655년 7월 1일 망누스 드 라 가르디의 스웨덴 군 7,200명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인 리보니아의 뒤나부르그(지금의 다우가우필스)를 공격하고 7월 12일 함락에 성공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시작한 상태였다.

3.7.3.2. 스웨덴의 대공세


3.7.3.2.1. 우이시치에 전투의 승리와 대(大) 폴란드 점령

제2차 북방 전쟁은 북독일 내 스웨덴의 영토인 서(西) 포메라니아, 일명 '스웨덴령 포메라니아(Swedish Pomerania)'의 아르비드 비텐베르그가 AD 1655년 7월 2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르비드 비텐베르그의 스웨덴 군은 병력 13,650명과 대포 72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도 대(大) 폴란드(폴란드어 Wielkopolska) 지방의 징집병(pospolite ruszenie) 13,000명과 상비군 보병 1,400명이 나섰다. 다만 폴란드 군의 지휘를 맡아야 하는 보구스와프 레시친스키는 병에 걸려 브로츠와프로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포즈난 총독 크시슈토프 오파린스키와 칼리시 총독 안제이 카롤 그루진스키가 폴란드 군을 지휘하였다.
폴란드 군은 노테치 강에서 스웨덴 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이 당시 스웨덴 육군은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당대 최강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AD 1655년 7월 24일 벌어진 '우이시치에 전투(Battle of Ujście)'에서 승리하고 오히려 폴란드 군을 포위해 버렸다. 본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자신들의 군주를 슐라흐타(Szlachta)라고 불리는 귀족들의 자유 선거로 선출하기 때문에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인 얀 2세 카지미에슈에 대한 충성도가 약했고 심지어 '황금의 자유(Golden Liberty)'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자신들의 특권만 보장된다면 누가 군주가 되든 상관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우이시치에 전투에서 스웨덴 군의 우수성을 통감한 포즈난 총독 크시슈토프 오파린스키와 칼리시 총독 안제이 카롤 그루진스키를 비롯한 다수의 대(大) 폴란드의 폴란드 귀족들은 항복하여 칼 10세 구스타브의 봉신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3.7.3.2.2. 바르샤바 함락과 얀 2세 카지미에슈의 실롱스크 망명

비록 아르비드 비텐베르크가 단 한번의 전투로 대(大) 폴란드 지방을 손쉽게 점령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도인 바르샤바로 향하는 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포즈난과 칼리시 등 대(大) 폴란드 지방의 주요 도시만 점령한 뒤 수비 태세만 굳히며 칼 10세 구스타브가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AD 1655년 8월 20일 칼 10세 구스타브가 도착한 후에야 함께 바르샤바로 진격했다. 스웨덴 군의 진격은 파죽지세로 이어져 9월 2일 '소보타 전투(Battle of Sobota)'에서 폴란드 군을 격파하고 9월 4일 워비치를 점령했으며 9월 8일 바르샤바를 함락시켰다. 외국 군대에게 수도인 바르샤바가 함락된 것은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후 칼 10세 구스타브는 바르샤바를 버리고 도망친 얀 2세 카지미에슈를 뒤쫓아 남진했고 AD 1655년 9월 16일 '자르노프 전투(Battle of Żarnów)'에서 또 다시 승리했다. 이에 놀란 얀 2세 카지미에슈는 아예 폴란드 국경을 떠나 실롱스크(독일명 슐레지엔)로 도망쳤으나 10월 13일에는 소(小) 폴란드(폴란드어 Małopolska) 지방에 위치한 폴란드 왕국의 옛 수도인 크라쿠프마저 함락되었다. 이제 폴란드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10월 26일 크라쿠프 근처에서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가 항복했고 10월 28일 폴란드 군을 이끄는 두 명의 최고 사령관인 폴란드의 야전 헤트만(Field Crown Hetman) 스타니스와프 란츠코론스키와 폴란드의 대(大) 헤트만(Great Crown Hetman)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가 항복했다. 그리고 10월 31일 마조프셰(폴란드어 Mazowsze) 지방의 프워츠크 총독인 얀 카지미에츠 크라신스키가 패배하면서 이제 폴란드의 주요 지역인 대(大) 폴란드, 소(小) 폴란드, 마조프셰 지방이 모두 스웨덴의 차지가 되었다.

3.7.3.2.3. 리투아니아의 항복

그 사이 AD 1569년 루블린 조약(Treaty of Lublin) 이래로 폴란드와 연합 상태에 있던 리투아니아에서는 이미 러시아의 침공으로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얀 2세 카지미에슈가 실롱스크로 도망쳐버리자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가 공세를 이어가자 리투아니아의 대귀족이자 리투아니아의 대(大) 헤트만(Great Lithuanian Hetman)인 야누슈 라지비우가 자신의 조카인 보구스와프 라지비우와 함께 칼 10세 구스타브와 협상을 추진하여 AD 1655년 10월 20일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대표하여 '케다이네이 협정(Agreement of Kėdainiai)'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의 연합을 해체하고 스웨덴과 동군연합을 이루는 대신에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향유하던 기존 특권과 자유를 계속해서 보장받고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도 스웨덴의 보호를 받기로 합의했다.

3.7.3.2.4.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점령

한편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의 국경 바깥으로 도망친 얀 2세 카지미에슈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북부의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으로 진군로를 옮겼다. 이에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스웨덴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AD 1655년 11월 2일 프로이센 공작 겸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린스크 조약(Treaty of Rinsk)을 체결하고 자신들에 대한 방어를 위임하였다. 단 여기에서 그단스크(독일명 단치히), 엘블롱크(독일명 엘빙), 토룬(독일명 토른)은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의 스웨덴 군이 AD 1655년 11월과 12월에 그단스크, 푸츠크(독일명 푸치히), 말보르크(독일명 마리엔부르크)를 제외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전역을 점령해 버렸다.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의 스웨덴 군이 후퇴하는 프로이센 군을 뒤쫓아 프로이센 공국의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추격해 왔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칼 10세 구스타브와 서둘러 강화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AD 1656년 1월 17일 '쾨니히스베르크 조약(Treaty of Königsberg)'을 체결하고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은 물론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칼 10세 구스타브의 종주권까지 인정해야만 했다. 또한 AD 1656년 3월 말보르크마저 항복하면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 중 스웨덴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은 그단스크가 유일하게 되었다.

4. 근대


1792년 즉위한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1802년 나폴레옹 전쟁 때 반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공격을 받아 포메른을 빼앗겼으며, 1808년에는 러시아에게 공격당해 핀란드까지 빼앗겼다. 결국 반란 끝에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대신 즉위한 칼 13세는 늙어서까지 후손이 없어 스웨덴 의회는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프랑스의 육군 원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칼 13세의 양자로 추대해 칼 14세 요한(현재 스웨덴 왕실인 베르나도트 왕조의 첫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1812년 칼 14세 요한은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해 나폴레옹을 배반했고, 덴마크를 공격하여 노르웨이를 차지한다. 이후 노르웨이는 자치령의 형태로 스웨덴의 지배를 받는다.
1800년대 말에는 신대륙으로의 이주가 활발했는데 1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넘어갔으며(전체 인구의 20% 정도) 미국 중부의 초원을 중심으로 이주한다. 지금도 '~손'이라는 이름이 붙은 미국인들은 이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이런 대이주는 스웨덴이 산업 발전기에 접어들면서 나온 주거 문제, 노동권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
스웨덴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산업 발전을 이루었고, 키루나의 광산과 새로운 수력 발전 방식을 기반으로 산업 생산량을 빠른 속도로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1905년에는 스웨덴이 노르웨이 왕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권리를 포기하고 노르웨이가 분리된다. 노르웨이가 분리된 이후로 스웨덴은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비동맹 무장 중립을 선언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7년과 1918년은 격동적인 시기였는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서 스웨덴 사회민주당 내부의 볼셰비키 세력이 사회당(Vänster partiet)을 형성하면서 빠져나갔고, 1918년의 독일의 패배로 인해서 독일을 모델로 삼고 있던 보수주의 세력도 급속도로 규모가 작아졌다. 이후 사회민주당이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1921년 여성 참정권을 포함한 보통 선거권을 획득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과거부터 핀란드를 정복하고 북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러시아의 볼셰비키즘의 영향으로 스웨덴은 사회민주노동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생산량이 급증하기도 하는데 독일의 U보트 계획으로 인하여 영국의 직물들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스웨덴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로의 철 수출도 최고조였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제지펄프 산업은 증대되었고 철 수출량은 감소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무장 중립을 유지했으나 스웨덴인 무장친위대 부대가 편성되고, 철광석 교역 등으로 나치 독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스웨덴은 이 당시에 나치가 노르웨이로 침공할 때 철도를 내주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통보에 철도를 빌려줘 노르웨이가 빠르게 나치의 지배를 받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전후 연합국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노르웨이에서는 스웨덴에 대한 악감정이 남은 노인이 조금 있다. 또한 주변 국가인 핀란드를 돕기 위해 8,000명의 스웨덴 자원병이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웨덴에도 오스카 쉰들러같은 사람이 있었다. 라울 발렌베리[3]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재벌'로 유명한 스웨덴의 최대 재벌 발렌베리 가문의 사람이다. 발렌베리는 자신이 외교관 신분이라는 것을 이용해 수용소에 끌려갈 유대인들에게 위조 스웨덴 여권을 돌려 우방국의 국민으로 보이게 해 구출했다. 그러나 종전 직후 난민 보호를 위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련군 사령부로 향했고 그 후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스메르시에게 체포, 구금된 뒤 수용소에서 병사했고 시신은 화장하였다고 소련 측이 밝혔으나 시신이나 유품도 인도되지 않아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이 많으며 그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

5.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NATO, WTO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의 지위를 고수하며 북유럽 국가들의 중립 정책, 노르딕 밸런스(Nordic Balance)를 선도했다. 하지만 친미국적 정책을 취해 소련으로부터 서방 세계의 북방 측 방벽 역할을 하였다. 나중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등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지만 최근 비밀 해제된 외교 문서들을 보면 NATO와 WP 간 전쟁이 일어나면 NATO측으로 참전하기로 미국과 합의하기는 했다. 스페츠나츠의 주요 실전 훈련용 침투 루트가 아프가니스탄, 체첸과 더불어 스웨덴 방면이었으며, 이 때문에 스웨덴 군의 평시 스페츠나츠와의 교전 비율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스페츠나츠가 하수구를 통해 스웨덴 왕궁 정문 앞까지 침투했다가 경비대에 발각되어 총격전 끝에 도주하기도 했을 정도다.
스웨덴은 복지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고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해서 매우 살만했고,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금 부담이 과중해지면서 점차 사민당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고 1970년대 초반에 원자력 발전 건설 논란도 일어났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오일 쇼크의 영향으로 경제가 다소 침체되었고, 이것의 영향으로 잠깐 보수 3당의 연합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래도 이 시절에도 사회민주당은 원내 1당이었다. 사실 이 때의 스웨덴은 이미 소득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삶의 질도 상위권을 유지했기에 이전에 비해 비교적 안 좋은 상황이었지,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기존 정권의 지지가 높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오일 쇼크의 후유증을 차츰 극복하였고 자산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에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다시 침체를 겪었지만 침체가 장기화되지는 않았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성장세였다.
공산권 붕괴 후에는 중립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였고, 1995년 유럽연합에 가맹하였으나 NATO에는 가입하지 않고 유로화 사용도 거부하는 등 아직도 독자적인 정책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이민자의 급증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선거에서 극단 세력이 약진했다. 다만 그렇게 부상했던 정당은 이미지 실추를 걱정해서 내부적인 자정을 했고, 현재는 다른 국가의 극단 세력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정당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쓸려 나간 극단 세력의 인사들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이전보다 더 노골적인 극단성을 띄는 중이다.

[1] 이 영상은 스웨덴의 군주이자 스웨덴을 북방의 사자로 불리게 만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2] 자세한 사정은덴마크/역사노르웨이/역사 참조 [3] 독일식 발음은 발렌베르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