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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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가토 도모히로. 당시 25세(1982년 9월 28일생)
1. 개요
秋葉原通り魔事件(あきはばらとおりまじけん)
2008년 6월 8일 일요일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일어난 일명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KBS 스펀지 249회 방송분[1] 에서 소개되었다.
평범한 시민이자 인력 파견업체 직원인 가토 토모히로(사건 당시 25세/ 남성)[2] 가 '생활이 피곤해서', '삶에 지쳐서'라는 이유로 2톤 트럭으로 횡단보도에 그대로 돌진하여 사람들을 친 뒤, 서바이벌 나이프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마구 찔러서 '''7명 사망, 10명 부상'''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헤이세이 시대에서 가장 악명높은 도리마(묻지마) 사건으로 꼽힌다.
2. 상세
당시 아키하바라는 휴일이었고, 보행자 천국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휴일의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2시 35분경 주오도리에서, 2톤 트럭이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5명을 그대로 덮쳤다. 이후 트럭 운전자는 맞은편 차선에서 오던 택시로 돌진해 부딪친 후 차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이를 단순 교통사고라고 생각했고, 경찰관과 행인들이 트럭에 치인 사람들을 구하러 근처로 다가왔다. 이 때 범인은 미리 준비한 등산용 나이프를 빼들어 괴이한 소리를 질러대며 눈 앞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상했다. 그러고는 출동한 경찰관 오기노 히사시에 의해 붙잡혔다. 오기노는 맨 처음엔 진압봉으로 대응하다가 범인의 칼에 찔렸지만 방호복 덕분에 큰 부상을 입지 않았고, 이후 권총을 뽑아 겨누자 범인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칼을 버렸다. 이는 불과 10여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최초 피해자 무토 마이는 '''교통사고라고 생각해서 도와주러 갔다가''' 살해당했고, 거리에서 메이드 복장으로 아르바이트 중이던 여성, 핸드폰 가판대 아르바이트 등 근처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 또한 변을 당했다.
범인은 25세의 아오모리현 출신 청년 가토 도모히로(加藤智大)로, 기후현의 단기 대학을 졸업한 이후 경비원·자동차 공장과 주택자재회사의 비정규직 직원에 트럭 운전기사 등을 전전하며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사건 당시에 사용한 트럭 또한 도요타의 하청 공장인 간토자동차공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던 중 렌트한 트럭이다.
범인은 등산용 나이프 외 5개의 나이프를 더 소지하고 있었는데, 사건 이틀 전 밀리터리 수입 잡화점에서 구입한 걸로 밝혀졌다. 사건 자체는 2005년 센다이에서 일어난 트럭 폭주 사건에서 범행에 트럭을 이용한 점, 그리고 이 사건 전에 있었던 가나가와 마사히로가 저지른 츠치우라 연속 살상 사건(土浦連続 殺傷事件)에서 트럭과 나이프를 이용한 살인 방식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범인은 2ch(현 5ch)에 1,000건이 넘는 게시물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인터넷 활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갈수록 고립감을 느끼게 되자 결국 6월 8일 새벽 5시 21분, "아키하바라에서 사람을 죽일 겁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차로 사람들을 치고, 차를 쓸 수 없게 되면 나이프를 사용할 겁니다. 모두 안녕"이라는 내용이었다. 범인이 작성한 스레드와 그와 관련된 2ch 스레드는 대부분 삭제됐지만, 당시 다른 2ch 유저들은 범인을 향해 '낚시하지 마라', '할 용기도 없으면서', '해 볼 테면 해 봐라'라는 식으로 자극했다고 한다. 살인을 정말로 이행할 것이라고 믿지 않아서 농담을 한 게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든 말든 상관 없지만 사건이 터지면 그건 그것대로 관람하는 재미를 즐기고 싶어서 자극했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3]
2010년 1월 8일에 1심 재판이 열렸다. 재판과정이 길고 긴 걸로 유명한 일본 법정의 관례로 보아 이 사건의 재판도 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례적으로 5년 만에 끝나게 된다. 범인은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2011년 3월 24일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
범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으로 미뤄보아 항소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항소해 2심 재판이 이어졌다. 변호인은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2012년 9월 12일, 도쿄고등법원 재판부 역시 죄질이 너무 나쁘다는 이유로 사형을 판결을 유지했다.
같은 해 9월 25일 변호인이 상고했으나, 2015년 2월 2일, 최고재판소에서 상고를 기각. 3심까지 간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실 이보다 피살자가 더 적은 사건의 경우라도 사형이 쉽게 내려지는 판이니 예견된 결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사법부는 정상참작의 사유가 없으면서 2명 이상 살해한 자는 예외 없이 사형 판결을 내려왔다.
일본은 연좌제가 사실상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국가여서[4] 그의 가족들은 가토가 범죄를 저지른 뒤 온가족이 사회적 연좌제에 걸려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신용금고에서 해고당하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외할머니는 충격으로 사망했다. 동생 가토 유지도 직장에서 잘렸고 그래도 지방으로 내려가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흉악범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계속 해고되거나 동료들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그만두는 일이 반복된데다 형도 면회를 거부하자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을 이유를 이겨낼 만한 살 이유가 없다(死ぬ理由に勝る, 生きる理由がない)'라는 유언장을 남긴 채 2014년 4월 11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동정론이 나오긴 했으나, 여전히 바뀐 것은 없다.국내기사
현재도 범인 가토 도모히로는 구치소에 수감 중이며, 가토의 부모는 숨어 산다고 한다.
2.1. 피살자 명단
- 나카무라 가쓰히코 (74세, 전직의사)
- 마야모토 나오키 (31세, 회사원)
- 고이와 가즈히로 (47세, 회사원)
- 마쓰이 미쓰루 (33세, 요리사)
- 무토 마이 (21세, 대학생)
- 후지노 카즈노리 (19세, 대학생)
- 가와구치 다카히로 (19세, 대학생)
3. 범행 배경
물론 가토 도모히로가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아무런 동기도,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어려서부터 범인의 어머니가 개막장이라서. 범인은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어머니의 엄격한 자식교육을 빙자한 상습적인 구타와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는 아동학대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그의 유년시절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분노가 쌓여 사람을 7명이나 살해하고선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라고 말하는 최악의 살인마로 자라나게 되었다.[5] #1, #2
이것만이 범행 동기는 아니다. 가토는 여기에 더해 사회적인 멸시까지 겹치면서,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거나, 친구도 없었으며, 인생을 행복하게, 즐겁게, 사람답게 살아본 적이 아예 없었다. 막장스런 부모의 육체적, 정신적인 학대로 인해 상당히 망가진 20대의 청년이 사회적인 멸시와 불안정한 고용 상태까지 겹쳐,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내몰렸으니, 정신상태가 어땠을지 상상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비정규직 출신의 범행'이라는 점에서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고찰이 있었는가 하면, 인터넷상에서는 심화되는 일본의 빈부격차와 관련해서, 그를 "격차사회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시각도 존재했다. 참고로 이 미친 소리의 근원지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2ch. 당장 일본 웹에서 카토 토모히로의 이름과 영웅이라는 한자를 같이 검색해 보면, 일반인들이 감히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신이라느니, 일요일에 아키하바라를 거니는 "인생의 승리자"인 젊은 놈들을 응징함으로써 인생의 패배자들의 한을 널리 알렸다느니 등의 주옥같은 개소리들이 쓰인 스레드들이 주르륵 걸린다. 또한 2ch에서는 이 사건으로 숨진 메이드 알바를 대상으로, 메이드가 저승(冥土)[6] 으로 갔다느니 하는 고인드립 및 경찰이 현장에서 범인과 대치하는 사진을 스타워즈 제다이 검술대결로 합성한, 못된 고인드립 짤방까지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 이 사건 이후로 나이프에 대한 단속도 철저해져서 나이프 휴대는 상상도 못하고, 심지어는 빅토리녹스(통칭 맥가이버 칼)조차도 휴대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7]
- 인터넷상에 올라온 불온한 키워드(살인, 자살, 로리 등)를 감시, 수집하는 예고IN도 이 사건 때문에 제작되었다.
- 카토 토모히로는 2017년에 사형수들의 그림 전시회에 우울할 울자를 A4용지 81장에 빼곡히 써서 아이돌 마스터 극장판 포스터를 만들어 출품했다.#
- 일본인들은 10년이 된 2018년 6월 8일에도 아직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줬다.
- 범인이 갖고 있던 동인지에 동방 동인지도 포함되어 있었고, 범인이 사건 당일, 자기 친구에게 해당 흉기인 나이프를 보여주면서 "이게 '동방'에서 사용되었던 나이프다."라는 발언을 했음이 드러나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동방 프로젝트도 언론에서 까이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키하바라와 동방의 이미지는 꽤나 안 좋아졌다. 동프빠 사이에서는 날조라고 주장하지만, 살인돌 드립을 친 거 보면 사실상 동프빠 확정. #
4. 유사 사건
- 1981년 6월 17일 도쿄 고토구에서 가와마타 군지(川俣軍司)라는 29세 실직자가 지나가는 여성, 어린아이를 상대로 칼을 휘둘러 4명이 숨지고 2명이 크게 다쳤던 후카가와 칼부림 사건이 있다. 범인은 상습적인 폭행, 공갈, 상해, 메스암페타민 투약 등등 전과기록이 있었고, 문신과 불량한 태도 탓에 구하는 직장마다 오래 못하고 잘리기 일쑤였다. 1983년 TV 아사히를 통해 드라마화되기도 했으며, 쇼와 시대 전반은 물론 아키하바라 살상사건 전까지 도리마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묻지마 살인사건들 중 하나였다.
- 1982년 6월 3일 홍콩의 삼서이포(深水埗)에서 조현병(구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28세의 리즈헝(李志衡)[8] 이라는 청년이 어느 유치원에 난입하여 흉기를 휘둘러 6명[9] 이 사망하고 44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범인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피살되었다. 이후 범인 리즈헝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치료감호로 현재까지 수감중이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는 외신 구독자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10] 중화권에서 묻지마 살인사건의 사례 중 하나로 보도되었다.
- 1988년 8월 22일 무차별살인은 아니지만 오타쿠가 4살짜리 소녀를 납치, 살해하여 오타쿠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었다. 미야자키 츠토무 문서 참조.
- 1991년에 일어난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과 유사하다. 차량을 이용해 보행자에게 돌진해 치이게 했다는 것까지는 유사하나,[11] 아키하바라 사건처럼 차에서 내린 뒤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 2008년 3월에 가나가와 마사히로가 벌인 묻지마 살인이 가토 도모히로에게 영향을 준 듯하다. 가나가와 마사히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행인과 지하철역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고 그로 인해 결국 2명이 숨지고 수 명이 중상을 입었다. 실제로 가토 도모히로는 가나가와 마사히로의 범행을 본따 칼을 흉기로 사용했다고 증언했으며 이 증언을 접한 마사히로는 자신을 따라했다며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덤으로 마사히로는 자신이 가토 도모히로보다 사람을 적게 죽인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 2010년 6월 22일 히로시마에서 마쓰다 공장에서 해고된 것[12] 에 앙심을 품은 비정규직 노동자 히키지 토시아키(42세)가 자동차를 몰고 9km를 폭주해 11명을 치어 이 과정에서 공장 생산직원 하마다 히로시(39세) 사망, 중상자 2명, 경상자 8명을 내고 붙잡혔는데, 스스로 '가토 도모히로의 범행을 모방했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 2011년 2월 2ch에 "2월 11일 신주쿠 역에서 아키하바라 사건보다 더한 무차별 살인사건을 저지르겠다."는 요지의 예고가 올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네티즌의 이목을 끌었으나, 매우 다행히도 그저 무개념 중학생이 관심 받고자 쓴 뻘글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2월 17일 오후 1시 20분경 그 중학생의 친형이 "동생이 바보 취급당했다. 형으로서 실제로 무차별 살인이 일어나는 걸 보여주겠다"는 이유로 신주쿠 역 부근에서 칼을 휘두르다가(사상자는 없음.) 경찰에 자수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신주쿠 역 CCTV 어디에도 이 소년이 칼을 휘두르는 광경이 찍혀있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고. 그냥 칼만 챙겨서 경찰서로 직행한 듯하다. #
- 2008년 10월에 한국의 서울에 있는 한 고시원에서 논현동 묻지마 방화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물론 범행 장소가 고시원이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범인이 전형적인 사회의 낙오자로 불특정 다수에게 끝장난 자신의 삶에 대한 복수를 한 점에서 카토 토모히로와 차이가 없다. 다만 카토와는 달리 이쪽은 1심에서 사형을 받은 뒤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수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 실제 범행차량은 이스즈 엘프, 재연에 등장하는 차종은 기아 프런티어로 각색되었다.[2] 사건 초기 언론에서 야쿠자라고 보도했었지만 오보였다.[3] 훗날 미국의 움프콰 칼리지 총기 난사 사건에서도 범인이 4chan에 예고글을 올리자 게시판 스레드에 있는 다른 이들 역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4] 예를 들면 가정폭력을 저지른 가장이 감옥에 가면 원래라면 가장만 비난해야겠지만 일본에서는 그 집안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피해자인 아내와 자녀들까지 사회에서 은근히 배척된다. 그런데 가토처럼 극악한 흉악범죄를 그것도 7건이나 연속으로 저질렀다면 은근히 멀리할 것도 없이 대놓고 사회공동체에서 추방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5] 사실, 범행의 동기가 자신을 괴롭힌 부모를 엿 먹이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일본사회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위신의 추락을 극도로 기피하는 성향이 있다. 이케다 초등학교 무차별 살상사건의 범인도 같은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알려졌다.[6] 메이도라 읽으며, 일본어 발음으로 maid와 똑같다.[7] 마침 1년 전인 2007년에 일어난 사세보 스포츠센터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총기 규제 강화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총기 뿐만 아니라 나이프를 포함한 도검류 규제까지 포함된 총기 및 도검류 규제에 관한 개정 법안이 제출, 통과되어 시행되었다.[8] 당시 중증의 조현병(구 정신분열증)과 과대망상 환자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부모로부터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되었던 일이 있었다.[9] 량후이옌(梁惠娟), 리사오친(李少芹), 루융스(盧詠詩), 펑젠궈(馮建國), 다이치난(戴啟南), 관페이언(關沛恩)[10]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가 한국에서는 군사정권 시기였으며 5개월 전의 야간통행금지 해제 등으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와 약 2달 전에 일어난 우순경 사건, 심지어 이 사건과 같은 날에 일어난 서대문 세 모녀 피살사건과 장영자 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묻혀서 신문에도 기사가 전무했으며 얼마 뒤 일어난 유리병 살인사건은 단신으로 보도되었다.[11] 이 과정에서 2명의 어린이가 사망하였다.[12] 범인은 4월에 해고됐다고 주장했지만, 회사 측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도 출근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