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

 



1. 개요
2. 경위
3. 경과
4. 결과
5. 관련 자료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


'''무전유죄 유전무죄'''[1]

용의자 김용제가 외친 말

1991년 10월 19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광장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범인은 20대 시각장애인 김용제.[2] 이 사람의 일대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마지막 사형수>로 교도소 안에서 조성애 쟌 마르코 수녀[3]와 나눈 편지를 바탕으로 제작된 책이다.

2. 경위


[image]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용제는 어릴 때부터 시각장애[4][5]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초등학교 때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몇 년 후에 아버지마저 농약을 마시고 음독자살했다. 그후 시각장애와 소극적인 성격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초등학교졸업했다.
그리고 을 지니고 다니다 '강도 예비 음모'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3개월간 복역을 한 적도 있다. 이후 서울부산에서 중국집 배달원, 멍텅구리배 선원, 나이트클럽 웨이터 등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갔지만 시각장애로 인해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양말 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3. 경과


김용제는 양말 공장을 다니던 시절 사장의 기아 프라이드 열쇠를 복사해서 가지고 다녔고, 그 차를 몰아 복수할 생각을 했다. 결국 1991년 10월 19일, 차를 몰고 여의도 KBS 본사 우측의 광장에 진입해 질주를 벌인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지현일 군(12)과 유치원생 윤신재 군(6)이 먼저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뒤에도 계속 질주를 하여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21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200m를 더 달리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 그 뒤 시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이를 뿌리치고 여중생 김병춘 양(13, 당시 신도림중학교 1학년)을 인질로 잡았으나 시각장애로 인해 제대로 대치하지 못했고, 이윽고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4. 결과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방화로 인해 16명이 사망하는 거성관 방화 사건이 일어난지라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11월 19일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항소상고를 제기했지만 전부 기각됐고, 1992년 8월 1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집행되었다.[6]

여기서 그에게 치여 즉사한 당시 유치원생 윤신재 군의 할머니인 서윤범 할머니는 이런 사정을 듣고 되려 범인을 이해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서를 썼으며, 기도까지 해 주었다. 당시 기도 내용이 얼마전 방송에서 나왔다. "지금도 용제가 정말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신다면..." 사형 집행 당일에도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여서인지 이 자리에 온 신부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썼는데, 그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한다.
<표창원의 사건추적>에 따르면, 정작 해당 살인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생존자나 유족들에겐 보상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이미 1988년부터 '범죄 피해자 구조법'이 시행 중이었으나 법 내용이 미비하고 이 법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범행에 쓰인 프라이드가 가입된 종합보험은 도난 뒤 발생된 피해에 대해 보상해 주는 제도가 없었고, 대신 '책임 보험'에 따라 사망자는 최고 5백만 원, 부상자는 3백만 원까지 보상이 가능했으나, 이들의 아픔은 그마저도 갈음할 수 없었으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5. 관련 자료


  • 김용제의 자서전 '마지막 사형수'

6. 관련 문서


  • 묻지마 테러
  • 숀 넬슨
  • 킬도저
  • 대구 지하철 참사 (2003)[7]
  •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 (2008)
  • 여의도 흉기난동 사건 (2012)[8]
  • 2017년 스페인 연쇄테러 (2017)
  • 유전무죄 무전유죄
  • 지강헌
  • 가해자가 된 피해자

7. 둘러보기



[1] 이 말만 놓고 보면 불의에 항거한 약자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후술하듯이 이런 말을 외친 김용제가 해친 사람들은 자신에게 비극을 안겨다 준 당사자인 사회적 강자들이 아닌 무고한 어린이, 노인, 여중생 등 자신과 같거나 더 못한 사회적 약자들 뿐이었다. 그 이전에 그 '복수'의 개연성마저 부족한 상황. 따라서 변명의 여지 없는 명백한 악질 범죄자이자 살인마이다. 그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이다. 사족으로 이 말을 처음한 사람인 지강헌은 탈옥범이긴 하나 절대 살인을 하지 않았고 은거지 주민들에게도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 했던 사람이었다.[2] 1970년~1997년 12월 30일[3]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공지영 마리아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등장하는 문 모니카 수녀의 모델이기도 하다.#[4] 전맹은 아니었고 약시였다.[5] 아버지는 청각, 어머니는 시각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김용제의 시각장애는 유전으로 추정된다.[6]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의 주범 김선자도 이 날 형이 집행되었으며, 이 집행은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의 마지막 사형집행이다. 이후에는 구형이나 선고는 하지만, 실제 집행은 하지 않고 있다. 26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어서, 한국은 현재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7] 여의도광장 사건과 대구 사건 모두 자신의 신변을 비관한 장애인이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묻지마 테러를 저지른 사건이었지만 대구 사건의 범인 김대한은 김용제보다 더 악질이고 피해 규모가 훨씬 컸음에도 겨우 무기징역밖에 선고받지 않았다.[8] 경찰청 사람들 2015에서 두 사건을 다 묶어서 방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