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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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남명의 황제. 재위 기간은 1646년 ~ 1662년이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이다. 묘호는 소종(昭宗), 시호는 광황제(匡皇帝), 정식 시호는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이며 이는 뒤에 정성공이 묘호와 함께 추서한 시호이다. 연호가 영력(永曆)이라 영력제(永曆帝)라고 부른다.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사촌에 해당한다.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는 영명왕(永明王)의 지위에 있었다. 만력제의 7남 계단왕(桂端王) 주상영(朱常瀛)[1] 의 4남이었다.[2]
2. 생애
1643년,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로 도망쳤다. 이 후 주상영이 사망하고 계왕(桂王) 지위를 세습한 둘째 형도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다. 이후 융무제 주율건이 청군에 생포되어 사망하자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1646년 황제로 즉위했다. 소무제 주율오와는 정통성 문제로 광주 삼천에서 대립했다가 대패하고 위기에 처했으나, 편리하게도 청군이 주율오를 발라버리고 멸망시켜 줬다.
당시 명나라는 정성공의 협력 하에 한때 광동,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했다. 그러나 1650년, 청군이 경동과 계림을 함락시키고 1656년에는 주산 열도를 점령했다. 이 때 주유랑은 화남 일대를 방랑하다 1659년 운남까지 잃자 버마로 도주했다. 이 때 그를 따른 가신은 불과 65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다. 결국 청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 왕에 의해서 곤명에 있던 오삼계에게 압송되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 대한 본인의 충성심을 직접 증명할 요량이었는지 주유랑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을 모두 '''직접 목졸라 죽였다.'''[3] 주유랑은 오삼계에게 "역적 상판 보기 싫다." 하며 빨리 죽이라고 했다고. 1662년 6월 1일이었다. 이렇게 영력제 일가는 곤명에서 피살되었고, 대만에서 영력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성공도 "내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황천에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라며 절규하다 한 달 뒤인 6월 23일에 죽었다. 명나라는 잔존조직조차 없이 완전히 멸망했다.[4]
영력제는 일곱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 요절하거나 행방불명됐거나 오삼계에게 피살되었다.남명 마지막 황제의 최후
3. 일화
특이한 이야기가 있는데, 운남에서 밀려나면서 정성공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 이르자 명나라 왕조 재건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듯 뜬금없이 '''교황'''에게 SOS를 친 것을 들 수 있다.[5] 남명 황실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가 주유랑의 태후 왕씨(세례명 안나)의 청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연락을 주선한 것. ''''도와줘서 명나라 재건이 성공하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 조건까지 제시한 상태였으나, 당사자인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미온적 반응과 너무 먼 지리적 간극, 연락책을 맡은 보임(Boym) 신부의 죽음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것저것 여의치 않자 버마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그 결과는 상술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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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왕씨가 교황에게 보낸 구조 요청 문서.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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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번역본.
4. 사후 추서
정성공은 주유랑이 죽자 국상을 선포하고 애도 기간을 가진 뒤 소종(昭宗)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라는 묘호와 시호를 추서했다.
5. 기타
한편 주유랑을 직접 죽인 오삼계는 나중에 강희제의 철번 시도에 반발해 삼번의 난을 일으킬 때 명나라의 부흥을 명분으로 하였기에, 명나라 갑주를 입고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배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앞장서서 역적 노릇을 한 자의 거짓 코스프레를 믿을 사람이 있을 리가. 결국 난은 실패하고 일족이 몰살당하는 천벌(?)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그의 죽음을 접한 유림들이 사적으로 별실에 상청(喪廳)을 마련하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하기도 하여 이를 알게된 청나라에서 조선에 항의하여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이후에도 조선의 유림들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연호인 '영력'을 기년으로 하여 19세기에도 양반 집안이나 공문에는 영력 연호를 사용하여 '''영력 200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6. 둘러보기
[1] 아들에 의해 예종(禮宗) 체천창도장의온홍흥문선무인지성효단황제(體天昌道莊毅溫弘興文宣武仁智誠孝端皇帝)로 추존되었다.[2] 주상영은 여덟 아들들이 있었는데 주유랑을 제외하면 모두 요절했다.[3] 황후는 그릇을 깨뜨려서 그 파편으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4] 이후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대명의 부흥, 복수를 내걸면서 자신이 죽인 영력제의 묘를 참배하고 곡을 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산해관을 열어 청을 맞이한 것도,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영력제를 직접 교살한 데다 반란 직전까지 청의 번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인간이 이제 와서 그렇게 나온다고 감동하는 옛 명의 백성들도, 그를 지지해 반청운동에 나선 명의 유신 및 장수들도 없었다.[5] 물론 아예 뜬금 없는 것은 아니고, J.M. Roberts의 「A History of Europe」에 의하면 주유랑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가톨릭 군주였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모친인 태후 왕씨(세례명 헬레나)와 그의 후계자 모두 Andreas Xavier Koffler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었다고 한다. 얄궂게도 영력제와 함께 교살된 아들 주자훤(朱慈煊)도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콘스탄티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