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군

 



'''조선 성종의 왕자'''
'''회산군
檜山君'''

'''군호'''
회산군(檜山君)[1]
'''시호'''
정간(貞簡)
'''품계'''
현록대부(顯祿大夫)
'''본관'''
전주(全州)
'''이름'''
염(恬)
''''''
보익당(輔翼堂)
'''부왕'''
조선 성종
'''생모'''
숙의 홍씨(淑儀 洪氏)
'''부인'''
영원군부인 죽산 안씨(竹山 安氏)
'''자녀'''
1남 1녀[2]
'''묘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생몰
기간
'''
'''음력'''
1481년 미상 ~ 1512년 미상
'''양력'''
1481년 미상 ~ 1512년 미상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여담
5.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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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왕족. 성종의 5남이자 서4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이다.[3]
친남매로는 누나 혜숙옹주와 형 완원군 및 남동생 견성군, 익양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 그리고 여동생 정순옹주와 정숙옹주가 있다.
전주 이씨 회산군파의 파시조이다.[4]

2. 생애


평소에 원칙과 예를 중요시하여 자손들에게 왕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공정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강직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큰형 연산군에게 간언하다 사약을 받을 뻔했지만 인수대비의 배려로 궁궐 밖으로 쫓겨나는 선에서 그친 일도 있었고,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1506년(연산군 12년)에는 이복동생 영산군 및 중신들과 함께 반정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무위에 그친 일도 있었다.[5] 또한 중종김안로가 왕에게 간교한 말을 하는 걸 보고 면전에서 대놓고 크게 꾸짖기도 했다고 한다.#

3. 사망


1512년(중종 7년)에[6] 사망했다. 향년 31세[7]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4. 여담


  • 1505년(연산군 11년) 6월에, 궁궐과 가까운 회산군과 견성군의 집을 빼앗아 그곳에 가흥청을 두게 하고 대신 견성군과 회산군에게는 다른 집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가흥청(假興淸)은 연산군전국에서 소집한 기생 중 아직 궁궐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8]
  • 평소에 연산군은 동생 영산군의 용맹함과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시기했다. 그래서 숭례문 앞부터 을 타고 달려서 연산군 자신보다 먼저 입궐하면 살고, 늦으면 죽는다는 내기를 강제로 걸었다. 이에 영산군이 괴로워하던 중 회산군이 영산군에게 빠른 말을 구해줘 화를 피하게 했다.# 회산군의 우애심을 드러내는 일화이다.

5. 가족과 후손


영원군부인 죽산 안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 딸은 동래 정씨 정수후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 견성군의 차남 계산군 이수계(桂山君 李壽誡)가 양자로 입적했다. 계산군은 4남 3녀를 낳았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회산군파를 이루고 있다. 제61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귀남이 회산군의 후손이다.
[1] 군호는 경상남도 창원의 별호였던 ‘회산(檜山)’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3] 서삼촌이 실존인물 홍길동#s-2이다.[4] 전주이씨 회산군파 후손들은 종통으로는 회산군파이지만 실제 혈통으로는 친동생 견성군의 차남 계산군의 직계 후손들이다.[5] 그래도 형은 형이라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몇 달 뒤에 죽자 중종에게 고하여 강화 교동(연산군 유배지)에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6] 음력 10월 26일.[7] 세는나이 32세.[8] 가흥청 중에서 다시 선별된 기생들을 흥청(興淸)이라 불렀는데, 바로 우리가 아는 그 흥청망청의 어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