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군

 



'''영성군파의 역대 종주'''
영성군가 역사 시작

'''1대 영성군 이계'''

2대 회원군 이윤
'''조선 선조의 왕자'''
'''영성군
寧城君'''

'''군호'''
영성군(寧城君)[1]
'''시호'''
효경(孝景)
'''본관'''
전주(全州)
'''이름'''
계(㻑)
'''부왕'''
조선 선조
'''생모'''
온빈 한씨(溫嬪 韓氏)
'''부인'''
회산군부인 창원 황씨(昌原 黃氏)
'''자녀'''
1남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생몰
기간
'''
'''음력'''
1606년 12월 24일 ~ 1649년 9월 19일
'''양력'''
1607년 1월 21일 ~ 1649년 10월 24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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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서13남으로 선조의 막내아들이다.[2] 어머니는 후궁 온빈 한씨[3]이다. 이름은 이계(李㻑). 친남매들로는 형 흥안군과 경평군, 그리고 누이로 정화옹주가 있다. 광해군원종(인조의 아버지), 그리고 인성군, 경창군, 영창대군의 이복동생이다.

2. 생애


1606년 12월 24일에 한성부 정릉동 행궁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고 처음 공식 기록에 등장하는 것이 17세이던 1632년인데 그 해 6월 15일 영성군의 종이 무단으로 감옥에 들어가 갇혀있던 죄수들을 시켜 관원들을 욕보이게 하여 물의를 빚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대간들은 영성군의 종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워낙 삼촌들에 대해 무른 인조는 별다른 처벌 없이 지나갔다. 이듬해 열린 인목왕후 연제[4]에는 둘째 형 경평군과 함께 병을 핑계로 불참하여 또 탄핵을 받았으나, 역시 인조가 눈감아주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 별탈없이 지내다 1649년 9월 44세의 나이에 사망했으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있다.

3. 가족과 후손


인열왕후 한씨의 외숙부 황이중의 딸 회산군부인 황씨와 결혼하여 아들은 회원군 1명, 딸은 이덕이, 이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2명을 낳았다.그리고 소실 승춘과의 사이에서 회천도정 이선을 얻었으나 회천도정은 일찍 죽어 대가 끊겼다. 회원군 역시 아들 이규령 하나만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는 바람에 후사가 끊겨 세종대왕의 적7남 광평대군의 8대손 이홍을 양자[5]로 들이고 함평군(咸平君)에 봉하여 대를 이었고 함평군은 아들을 6명을 낳아 현재까지 대가 이어온다. 그래서 지금 현재 영성군의 후손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광평대군의 자손이다.[6]
현대 인물로는 제2공화국 시절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재항이 있다.

[1] 군호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옛 이름인 '영성'에서 따왔다.[2] 인조의 숙부이지만, 나이는 인조보다 더 어리다.[3] 한명회의 6촌 청평군 한계순의 6대손이다. 아들보다 오래 살았고 현종 연간에 사망.[4] 練祭. 죽은 후 1년이 되는 날 지내는 제사인 '소상'이 끝날 때에 치르던 의식이다.[5] 임진왜란 이후로 혈연관계가 8촌 이상이 되는 경우라도 다른 파간으로 입계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1902년에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를 보면, 선원선계 3파와 도조 이후의 자손들의 계보 여러군데에서 이런 일이 나오는 걸 볼 수 있다.[6] 일부는 광평대군의 자손이 아닌 다른 파에서 입계한 경우가 몇 군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