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

 


1. 개요
2. 정황
2.1. 사건 직전의 상황
2.2. 사건 발생
2.3. 사건 직후
2.4. 사건 후의 이야기
2.4.1. 공황 윳코 신드롬
3. 죽음의 이유에 관한 많은 설


1. 개요


1986년(쇼와 61년) 4월 8일, 일본의 아이돌이었던 당시 만 18세의 오카다 유키코투신자살한 사건.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낮다. 이후 이 사건을 모방하는 식의 자살 사건이 빈번해져서, 일본 언론들은 '''"윳코 신드롬"'''(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고 칭한다.

''' 자살 직후의 생방송 ''' [1]
오카다 유키코 양, 18살인데요. 이제 3년 째 데뷔했습니다. (중략) 오늘 12시 15분 소속사 선뮤직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입니다. 오카다양은 자살하기전 한번의 자살시도가 있었습니다 (맨션사진) 여기는 유키코 양이 살던 맨션입니다. 여기서 가스를 틀고 손목을 긋고 병원에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별로 심하지 않다'라고 듣고 소속사에 돌아와서 오던 중 뛰어내렸습니다
(현장)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만, 매니저가 뛰어내린 걸까요? [자막: 이 때는 매니저가 떨어진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확인 결과 오카다 유키코 양이었습니다] 저기는 여성의 시체가 있습니다. [전화: 지금 누가 뛰어내린건가요? 매니저일지도 모른다?] 선뮤직에 가보겠습니다. 5층일까요?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몇시였어? 아까? [20분 쯤 이었습니다] 20분? [그 때 119가 왔습니다.] 여성이었죠? [네]
〈사무소로 간다〉아 잠시만 실례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겁니까? 누가 뛰어내렸나요? [오카다 유키코.] 죄송합니다, 오카다 유키코 본인이었습니다 매니저라고 해버렸네요.
후쿠다 전무: 그 때 저와 3명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와서 제가 전화를 받고 한명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 티슈를 찾다가 사라져서 찾다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슬리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보니까 뛰어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2]
자살 직후의 영상으로 거적이 덮힌 오카다 유키코의 사체와 핏자국이 버젓이 나오고 있다. 충격적이게 떨어져 세상을 떠났지만, 그 때 바로 생방송을 진행한 것을 보면 그녀가 떨어지기 전에 얼마나 준비를 꼼꼼하게 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일본은 옐로저널리즘이 극에 다다른 상태였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방송을 위해 안달나 있었기 때문에 방송의 리포터인 나시모토 마사루(梨元勝, 2010년 사망)의 무리한 취재는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정황



2.1. 사건 직전의 상황



''' 사망 4일 전인 4월 4일에 출연한 버라이어티 방송[3] '''
1986년 4월 4일, 사망 4일 전엔 소속사 선배인 하야미 유, 남성 아이돌 시부가키대와 함께 'スターどっきりインタビュー(스타 깜짝 인터뷰)'라는 일반 어린이들이 스타들에게 질문을 하는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했다.여기서 출연자인 어린이에게 엉뚱한 질문을 받는데 사회자의 성희롱에도 센스있게 대답하는 유키코의 기지가 보인다. 당시 활동하던 노래, 입술 Network를 부르는 그녀의 눈의 힘이 없음과 다크서클이 당시 그녀의 힘듦을 말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오카다 유키코의 사망을 추모하는 자막이 송출되었다. [4]
어린이: 오카다 유키코씨에게 질문합니다! 몸은 말라서 작은데 어째서 가슴은 그렇게 크신 건가요?
유키코: 아,아뇨..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전혀 마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크지 않아요.
야쿠마루 히로히데: 커.
유키코: 그렇지 않아요.
하야미 유: 그래도 괜찮죠.
유키코: 평범해요, 진짜로.
사회자: 자신을 가지는 게 좋아.
출연자: 맞아 맞아, 자신 있는 편이 좋지.
사회자: 얼마?(=몇 사이즈)
유키코: 에? 보통이에요. 두 개.
[image][image]
''' 1986년 4월 5일에 직접 사인한 포스터.'''
4월에는 12일에 열리게 될 오카다 유키코 콘서트를 위해 매일 선뮤직에서 새벽 3시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5]
4월 5일, 사망 3일 전 인기가도를 달리던 유키코는 소속사의 동료 아이돌들과 합숙하던 사장 아이자와의 자택을 떠나 미나미 아오야마에 있는 맨션으로 자취를 시작하기 위해 사장의 자택에서 이삿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3일 후 사망 당일엔 유키코가 살고 있던 방에는 막 데뷔한 사카이 노리코(통칭 노리삐, 같은 선뮤직의 후배 아이돌)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이 날 아이자와 사장은 사카이 노리코, 오카다 유키코와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유키코가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여서 '''"앞으로 네가 우리 회사를 책임질 테니까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하자 '''"저같은 건 더 이상 안되는걸요. 더 괜찮은 애(=사카이 노리코)가 있잖아요."'''라는 어두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이 날 짐을 정리하면서 나온 본인의 포스터에 사장의 부탁으로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에게 사인을 적어 선물했다.
4월 6일, 사망 2일 전에는 고향인 나고야에 돌아가 콘서트를 열었고 콘서트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본가에 들러 가족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였다. 본가에서 가족과 모여 식사를 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언니의 성인식 사진을 보고있을 때 묘하게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던 사진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고 한다. '''원래 그녀는 "왜 나만 없는 거야? 힝!"이라고 할 성격이었지만 아무 말 없었고, 원래 자신의 무대 비디오도 보면서 그것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 해야 하지만 아예 보지도 않고 미소도 없어서 왠지 모를 낯섬이 느껴졌다고 어머니는 사후 얘기했다.[출처]''' 그 후 당일 저녁 오후 8시 53분 부모님의 차를 타고 나고야역에 도착해 도쿄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고 그것이 어머니가 본 딸 '사토 카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 때 유키코는 부모에게 묘한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아빠나 엄마가 혼자 도쿄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역시 아빠나 엄마가 도쿄로 오시는 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유키코는 데뷔 3년 째에 이미 30억 엔(액수는 사후 국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루어졌다.)이라는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톱 아이돌이었는데, 고향에서 떨어져 살던 부모님을 도쿄로 오라고 한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해석된다.
당일 심야 도쿄로 돌아간 유키코는 매주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화 녹음을 마쳤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방송 스케줄이었다. 이 방송에서는 앞으로의 스케줄에 대한 보고 같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얘기하고 있었다.

''' 1986년 4월 6일 녹음한 레귤러 라디오 방송 '夜遊びしナイト!'의 마지막 방송. '''
4월 7일은 오후 시부야 판테온에서 열린 '록키 4'의 시사회 참석 이외에 간만에 빽빽히 들어차 있던 스케줄이 없었던 날이었다. 이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자택으로 돌아온 유키코는 가스 자살을 시도하기에 앞서 연습 비슷한 행동을 하였고 금방 가스 냄새가 유출되어 맨션 내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후 오후 10시 경 미조구치 매니저가 유키코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8일) 예정되었던 새 드라마의 촬영이 하루 연기되었음을 알렸고 그 얘길 들은 유키코는 "어머, 아쉽네"라고 말했으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침 밝았다고 한다. 이후 아이돌 동료였던 이시노 마코가 오후 11시 반 경 유키코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4번 정도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고 얘기했다.

2.2. 사건 발생


1986년 4월 8일, 정오를 넘긴 12시 20분 경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숨졌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람의 통행량이 많은 대낮 신주쿠 요츠야의 자신이 소속돼있던 선뮤직 건물 7층에서 20m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했을 당시 건물 1층에는 점심 시간이라 사람들이 가득찬 도시락 가게가 있었고, 더욱이 사망 당일 오전에 가스 중독 자살미수를 일으켰다는 것이 보도되면서 기자들도 다수 진을 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적인 투신자살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진을 치고 있던 기자 중 한 명은 검은색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해 순간 검은 물체의 쓰레기가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이내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주변의 목격자들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특종을 위해 잠복해있던 한 기자는 그녀의 사진을 얻어간다.
당시, 그녀가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누군지 식별을 하지 못해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가 투신한 건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오카다라는 걸 알게 된다.
[image] [image] [image]
''' 사진은 사망 전날 스케줄로 찍힌 모습. 사망 당시의 복장은 사진 속 복장 그대로였다고 한다. '''
다음의 내용은 그녀가 죽기 전 당시 상황이며, 충격적인 사진은 없지만 글의 내용 때문에 열람시 주의 틀을 달았으니 유의.
[ 펼치기 · 접기 ] 열람 시 주의
1986년 4월 8일 오전 9시.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 아오야마 로터리 맨션.
6층의 거주자가 짙은 가스의 냄새를 맡았다.
통보를 받은 관리인은 가스의 누출이 어디인지 한 채씩 찾아 다녔고, 402호실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반응이 없고 다급해진 관리인은 보조키로 문을 열었다.
이 방의 거주자는 사토 카요(오카다 유키코의 본명). 차주는 선뮤직.
보통 맨션이었고 출입도 자유롭지만 떠오르는 아이돌 스타였던 그녀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관리인 외에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관리인은 체인락 때문에 더 이상 열지 못하고 "사토 씨 괜찮습니까?" 여러 번 외쳐 댔지만 반응은 없었다.
오전 10시 9분. 관리인의 연락을 받은 경시청이 아카사카 소방대원을 대동한 채 출동하고 소방대원이 체인락을 절단한 후에야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실내에는 강한 가스 냄새가 진동했고, 한 가운데 한 명의 소녀가 왼손에서 피를 흘린 채 울고 있었다.[15]
왼손에는 커터 칼로 자른 듯한 5cm의 자상이 두 개나 있었고 주변엔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에 급히 호송된 오카다. 곧 바로 왼손의 상처를 봉합수술로 치료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 의외로 침착한 그녀의 반응에 의사는 곧바로 퇴원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당시 휴가를 얻고 있던 오카다의 매니저 미조구치는 회사의 사장인 아이자와와 또 다른 매니저 야마구치에게 알렸고. 두 사람은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 오카다와 대면했지만 그녀는 자살 이유에 대해선 함구한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아이자와 사장에게 "유키코가 큰일이다. 키타아오야마병원에 빨리 데리러 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병실 커텐 안에서 손목에 붕대를 감싸고 울고있던 유키코와 대면했다. 엉엉 울고 있기보다는 조용히 훌쩍훌쩍 울고 있는 느낌으로. 다행히도 깊은 상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입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은 후쿠다 전무는 유키코를 데리고 나와 택시에 오른다.
'어디로 가고 싶니? 나고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까? 자택 맨션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사무소로 갈까?'라고 묻자 유키코는 '사무소가 좋아요'라고 대답하여 사무소가 위치한 신주쿠의 요츠야로 향했다. 소속사 건물 6층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오카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에 무언가를 눈치 챈 후쿠다 전무는 매니저인 야마구치와 사장 비서에게 철통 같은 감시를 지시하고 여기서 오카다의 2차 자살시도가 무위로 끝나는 듯 했다.
"딸기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 오카다의 부탁에 후쿠다가 사장 비서에게 이를 부탁하고 감시인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갑자기 전화를 해온 사장. 이미 자살 미수가 기자들의 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향후 대처를 의논하기 위해 후쿠다는 오카다의 옆을 떠나며 야마자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둘만 남게 된 오카다와 야마자키. 순간 생수를 엎지른 오카다.
"가만 있어. 내가 티슈를 찾을 테니." 야마자키가 티슈를 찾는 일순간의 틈에 오카다 유키코가 없어진다.
"유키코가 없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야마자키가 옆방에서 사장과 전화 통화를 하던 후쿠다 전무에게 달려가 외쳤고, 다급해진 두 사람은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 바로 그때 휴가 중이던 오카다 유키코의 전담 매니저 미조구치가 택시를 타고 선뮤직 사옥에 도착했다. 12시 6분.
택시에서 내려 사옥으로 들어가려던 미조구치의 눈에 갑자기 검은 물체가 쿵 하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감으로 오카다 유키코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다가갔지만 사람으로 생각되는 물체는 이미 머리통이 터져 하얀 뇌수가 사방에 흔재, 식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만이 그 물체가 오카다 유키코였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녀가 자살한 선뮤직 사옥은 요츠야 4가의 교차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오카다가 먹고 싶다던 스트로베리 주스를 배달하기 위해 온 웨이트리스는 사체를 보고 기겁. 구토를 해댄다.
"유키코, 유키코!" 눈물을 쏟아내는 미조구치.
매니저로서 그녀의 참담한 사체만은 매스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조구치는 회사에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서 조각나고 터진 머리와 뇌수를 주워 담으며 사체를 수습한다.[16](이하생략...)

매니저로서 그녀의 참담한 사체만은 매스컴에 노출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조구치는 회사에 올라가 모포를 가져와서 조각나고 터진 머리와 뇌수를 주워 담으며 사체를 수습한다.[6](이하생략...) ||}}}

2.3. 사건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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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당시 신주쿠 요츠야의 현장 전경.'''
시신이 수습되고 난 직후 보도를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수백명의 팬들은 사건 현장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모여 묵념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고 이윽고 젊은 청년들이 울부짖는 현장으로 변했다.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이 쌓이고 쌓여 2미터에 이르렀다. 황색언론 잡지인 프라이데이와 포커스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않은 적나라한 시신의 사진을 날 것의 묘사와 함께 그대로 잡지에 실었다.
자살이 확실한 상황이라 검증만 했을 뿐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고향인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부모가 올라와 요츠야서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날은 모든 방송에서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밤까지 연이어졌으나, 단 한 곳 TV 아사히의 간판 뉴스 채널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아나운서였던 쿠메 히로시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살 관련 보도를 절제하였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사건에 대한 보도를 일체 하지 않았다. [7]
사건 직후 연예계에서는, 오카다가 첫 정규 출연을 했던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사회자가 오카다의 인물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추모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녀를 귀여워했던 선배 가수 콘도 마사히코나카모리 아키나가 출연해 눈물을 보였다. 4월 10일 음악 방송 '더 베스트텐'에서는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시청자를 향해 “유키코씨의 밝은 미소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키코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 라며 눈물을 흘리며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음악 버라이어티 '가요 깜짝카메라 대방송'은 그녀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화를 마친 방송이었기 때문에 추모하는 자막을 띄워 보냈다. 사건은 동년 2월 발생한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과 맞물려 청소년 문제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도 다루어질 정도였다.
이 후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쓰인 유서에 대한 내용이 일부 노출되어, 유서 속에 남겨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8]가 동일 밤 오후 10시 경 TBS 테레비의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심정은?
"솔직히, 엄청난 충격입니다."
-어떤 교제였었나?
"같이 일하며 여러 가지로 귀여워했었고 저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여워한 존재였습니다."
-유서에 당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렇다고 해도...같이 일하고 밥을 먹거나 그녀를 배웅한 것뿐이라..."
-사랑의 파국같은 것이 있었나?
"그녀는 의외로 섬세해서 밝은 면과 훅하고 깊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빠같은 존재였지만 그녀에겐 동생이 아니라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같은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첫사랑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안 했나?
"나이도 다르고 그런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호의를 드러내지 않게 주의하던 정도였습니다. 정말 저에 대한 일로 자살했는지 어떤지는 의문입니다."
-좋아한다고 고백받았습니까?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추상적도 저는 뭐라고 할 수 없네요."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에겐 로맨틱한 면이 있었으니 발라드 시라도 써주었다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책임은 느낍니다. 비난은 받을 생각이니 제 딸이 크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주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시신은 이틀 뒤인 4월 10일 나카노의 호센지(宝仙寺)에서 회사장을 치뤘다. 친구이자 동세대 아이돌인 오기노메 요코, 미나미노 요코와 데뷔곡을 시작으로 많은 작사를 해준 다케우치 마리야, 소속사 선배인 사쿠라다 준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타치 히로시 등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죽음에 그녀와 함께 작업했던 선배 가수 마츠다 세이코, 재일 작곡가 강진화, 그녀에게 준 곡이 작곡가로써 첫 작업이었던 코무로 테츠야, 수록곡을 함께 작업한 사카모토 류이치 외의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유골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성만사(成満寺)로 돌아가 잠들었다.법명은 侑楽院釈尼佳朋(유교인샤쿠니카호)로 유키코의 '유'와 '음악'의 '악', 본명인 카요의 한자 '佳'를 따서 만들어졌으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던 아이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하 1986년 5월 발매된 잡지 '위클리 세븐'에서가 오카다 유키코의 영결식에서 취재한 연예계 동료들의 코멘트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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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기시 토오루: 오늘은 향을 피우러 온 것 뿐입니다.
타치 히로시[9]: 착하고 총명한 여자 아이였다.
킷카와 코지: 신인상을 받을 때 함께였어서 도저히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음악) 장르가 달라 많이 만날 순 없었지만 동기였고 신경 쓰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시부가키대의 후카와 토시카즈: 사망 4일 전에도 TV아사히 방송[10]에서 함께여서 언제나와 같이 밝게 인사했었는데. 하지만 신인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연약해보이는 여자애라 괜찮은 걸까하고 걱정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
시부가키대의 야쿠마루 히로히데: 유키코는 혼자서 우울해지는 타입. 나랑 닮았다고 생각해서 자주 얘기를 걸곤 했다. 굉장히 머리가 좋은 애라 더욱이 혼자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게 좋지 않았던 걸수도. 여러 가지 상담에도 응했었지만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말할 수 없다. "너무 고민하지 마"라고 얘기했었는데...죽을 거라면 그냥 연예계를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타하라 토시히코: 같은 포니캐년 소속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할 기회도 많았었는데...작년에 추락한 JAL에 같이 타고 갈 예정이었는데 직전에 변경되어서 "아, 안 타서 다행이다. 럭키" 같은 얘기를 나눴었는데. (중략) 반 년 정도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모습은 있었다. 하지만 상담같은 건 없었고 무엇에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가볍게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너무 순수했던 걸까.
나카모리 아키나: (향을 피우며 계속 울고 있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오기노메 요코[11]: (충격으로 얼굴이 파래진 채 교복을 입은 채로 뛰어왔다.)

2.4. 사건 후의 이야기


사고가 일어난 직후 요츠야서로 달려온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그 해 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카요와 대면한 것은 요츠야서였습니다.

카요의 얼굴은 전부 포대에 둥글둥글 휘감겨 씌워져있었습니다.

단, 입가는 붕대에 감겨있지 않아서 그 입가를 보고

저는 바로 카요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건 어릴 적부터 계속 보아온 카요의 잠든 입가 그대로였습니다.

조금은 오므라든 듯한, 부끄러운 듯한.

'카요'라고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항상 밝았던 그 목소리로

"뭐야? 엄마"라고 대답해줄 것 같은.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물론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습니다.

사건 직후 1시간 뒤 아이자와 사장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속사 선뮤직의 사장이자 현재는 고인인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밝힌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일, 제가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니 사무실 빌딩 아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습니다. 유키코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저를 기다리던 유키코가 아침에 있었던 자살 소동에 대하여 제게 무슨 말을 듣는 것이 싫어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린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남긴 하나의 일기풍 노트가 발견되어 그것을 읽고나니 자살의 진상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상대 남성의 이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은 물론 그녀가 그 남성을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스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풀솜으로 목을 조르는 듯이 괴롭다고 극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키코는 미네기시씨에게 연심을 품고 플라토닉한 사랑을 계속 이어오다 자살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아이지와 사장은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 원인이 '''미네기시 토오루에게 품어왔던 연심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사장은 아직도 사무실에 오카다의 사진을 걸어놓고 휴대전화의 배경이나 수첩에도 오카다 유키코의 사진을 갖고 있으며 '선뮤직이 있는 한 오카다 유키코는 영원하다'고 오카다 유키코를 아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같은 기자회견에서, 유키코의 생전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후쿠다 전무는 "기자회견 당시엔 정말로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자와 사장과 기자의 질문엔 정직하고 전부 대답하자고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배우와의 교제가 원인이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지만 진상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유키코는 정말 멋진 아이였다는 것. 장례 때 그녀의 아버지가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응축한 것같은 행복한 아이였습니다'라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아이자와 사장도 저도 그 말에 얼마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후에 회상하였다.
사망 후에는 그녀가 맡고 있거나 예정 중이었던 모든 스케줄이 중지되었다. 사건의 악영향을 우려해 사망 전날 발매한 사진집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오카다가 집필하여 실릴 예정이었던 연재 소설도 게재가 중지되었다. 4월 12일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생전 마지막 방송을 함께 한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캔슬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의 콘서트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하였다. 오사카의 콘서트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망 후에도 인기의 바로미터로 불리웠던 브로마이드 포스터의 판매는 계속 되었으며 한동안 판매 인기 순위에서도 5위 이하로 떨어진 날이 없었다고 한다.
오카다 유키코의 매니저이자 데뷔 이전부터 그녀를 지켜봐왔고 죽음의 모습까지 눈 앞에서 목격한 미조구치 노부로는 훗날 그녀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반짝 반짝한 눈을 빛내며 인사하는 유키코를 보며 이 아이는 되겠구나, 하고 저는 직감했습니다. 긴 시간 매니저를 하고 있으면 눈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스타가 될 지 아닐 지를. 그녀의 눈은 제가 담당했던 적이 있는 마츠다 세이코의 반짝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다른 아이들의 5배 이상을 노력하며 열심히 해왔습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이코처럼 무리를 하지 않고도 그 자질이 빛나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빛을 내는 타입이며 세이코가 천재형이라고 하면, 유키코는 노력형이라고 하는 편이 좋았을 지 모릅니다. 유키코는 지는 걸 싫어하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집중력은 놀랄 만큼 굉장했습니다.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하면 그것에 몰두해 몇 번을 불러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아이였기 때문에 매니저인 저로써는 전혀 관리할 필요가 없는 편한 아이였습니다."
유키코의 시신을 수습했었던 미조구치 매니저는 유키코의 사후 후배 아이돌인 사카이 노리코의 매니저를 담당하다가 2000년(헤이세이 12년) 7월 8일, 유키코가 생전 마지막으로 들렸던 선뮤직 사무실 5층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앓고 있던 지병을 괴로워하여 목을 메어 54세의 나이로 자살하였다.
1986년 5월 오카다 유키코의 팬클럽이 해산했고, 마지막 팬클럽 전보에는 미조구치 매니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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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사랑받은 오카다 유키코는 먼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여러분에겐 정말 면목이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고 싶은 기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카다 유키코는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 덕에 아주 행복한 탤런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응원 덕에 마침내 여기까지 와 준 오카다 유키코는 이제부터 여러분과 함께 걸음을 같이 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후 오카다 유키코의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주신 마음이 정말로 따스해지는 응원은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의 응원이 오카다 유키코를 향한 더할 나위 없는 공양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카다 유키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갈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2년 간의 응원,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립니다. 치프 매니저 미조구치 노부로.

미조구치 매니저의 바람대로 그녀가 사망한 신주쿠 요츠야 교차로 앞에는 매년 4월 8일마다 팬들이 꽃과 그녀의 사진, 앨범 등을 가지고 나와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나고야 성만사(成満寺)에 잠든 그녀의 묘에는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활짝 핀 신선한 꽃이 마를 날이 없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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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しも ゆっくり休みがとれたら 油絵を描きたい・・・

만약 긴 휴가를 받는다면 유화를 그리고 싶어요・・・

ファーストビデオで行った スイスの山々を

퍼스트 비디오를 찍을 때 갔던 스위스의 산등성이를

まっ白なキャンバスに描きたい・・・

새하얀 캔버스에 그리고 싶어요・・・

幼い頃 どうしても画家になりたかった私

어릴 적 어떻게든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나.

いま 素顔の私に戻って キャンバスに色をほどこしていく時

지금 보통의 나로 돌아가 캔버스에 색을 입혀가면서

いいようのない安らぎを覚えるのです

더할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낄 거예요.

나고야에 있는 오카다 유키코의 묘비에 적힌 직필로 쓰인 기념비.

2.4.1. 공황 윳코 신드롬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은 한 연예인의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베에 사는 16살 소녀의 자살을 시작으로 자살 직후 일주일 만에 소녀 7명이 "오카다 유키코가 되고 싶다"고 유서를 남기며 투신 자살, 같은 해 5월 5일에는 21세의 재수생이 선뮤직 건물 옥상의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그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여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자살을 기도한 청소년의 수는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한 4월 한 달 내에만 전년의 2배 이상인 114명, 1986년 한 해에만 799명이 자살을 하는 등 전년 대비 자살률 증가 44%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공황 오카다 유키코 현상(윳코 신드롬)''''이라고 불렸다.

3. 죽음의 이유에 관한 많은 설


인기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가 왜 갑자기 스스로 삶을 포기했는지에 관해서는 34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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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BS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의 광고.'''
표면적으로는 '''"1985년 11월 초부터 86년 1월 말에 걸쳐 TBS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함께 출연한 배우 미네기시 토오루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그에게 거절당한 그녀가 자살을 택했다."'''라는 소문이 죽음의 이유로 퍼져 있다. 사후 나온 유키코의 어머니가 쓰신 책, ‘사랑을 주세요’ 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카요 (윳코의 본명) 의 유서 - 지금도 그것을 유서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그 중 미네기시 토오루씨의 이름은 확실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미네기시씨를 좋아했다'''고.
(중략)
저는 그 후 두 번 다시 그 “유서”를 보지 못했습니다.
일부 노출된 유서에는 연필로 쓴 오카다 유키코의 직필로 '''미네기시씨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제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위에 적힌 것처럼 미네기시 토오루가 사건 투신자살 당일 밤에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오루와는 드라마 촬영 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서 바래다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망 전날 오후 11시 반 이후부터 택시를 타고 미네기시 토오루가 살고있던 세이죠의 자택 앞으로 찾아가 새벽 5시까지 혼자 기다렸다 돌아왔다고 하는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후일 발매의 주간지에서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사건이었다."라는 발언이 게재되기도 했다. 미네기시 토오루는 당시 유키코와 나이차가 20살 이상이었던, 어린 딸이 있는 이혼남이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투신자살 사건 발생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유키코에 대해 "귀여운 동생같은 느낌이나 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치 '형'(アニキ)같은 느낌이었다"며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었다고 극구 부인했다.
미네기시 토오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저 유키코에게 선배로서의 후배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어린 유키코가 미네기시의 호의에 반해 연심을 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오카다 유키코 사후에 그녀의 모친이 직접 엮어서 낸 출판물 '사랑을 주세요'에서는 "미네기시 씨에 대한 일은 여성 주간지, TV 등에서 이래저래 퍼뜨려져서 그때마다 저는 미네기시 씨에게 죄송했고, 또 딱하다는 마음만이 들었습니다"라고 적어놓은 것, 후쿠다 전무와 아이자와 사장이 밝힌 유서의 내용에서 남들이 생각하는 이상한 관계가 아닌, 플라토닉한 짝사랑이었다는 증언을 보면 그것이 더더욱 확실해진다. 지금으로선 이 이유가 거의 아주 확실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 배우 칸다 마사키가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흐르기 시작했다. 칸다 마사키와 오카다 유키코는 연인 관계였으며 그의 아이를 임신까지 한 상태였는데, 칸다 마사키와 마츠다 세이코의 결혼 발표로 충격에 빠진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카다 유키코가 둘의 약혼식에 소속사 후배로써 한껏 밝은 얼굴로 축하를 해주는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고, 임신으로 휴업 중이던 마츠다 세이코가 오카다 유키코를 위해 직접 작사와 데모 레코딩까지 해준 '입술 Network'를 듣고 오카다가 감격해 했다는 레코딩 관계자의 증언도 있는 등 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은 어디까지나 찌라시가 써내려간 루머일 뿐이다. 오카다 유키코의 어머니가 유키코의 사후 쓴 자서전에서도 해당 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분노할 정도였다. 그녀의 일기장과 유서를 갖고 있다는 선뮤직의 아이자와 사장도 마츠다 세이코와 칸다 마사키 커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내용의 메세지를 전했다.
이 외에도 원래 오카다 유키코가 좋아하던 대상은 배우 타치 히로시[12]라는 등 그녀가 성소수자였다는 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자살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선뮤직 소속사의 후쿠다 전무는 방송에서 '''첫 번째 자살 미수 때는 연심이나 기타 사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두 번째 자살 시도는 자신의 자살 시도가 알려져서 사무소나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심적 부담이 커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그는 그녀가 사라졌을 당시 무언가를 직감하여 사내 건물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고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 위에서 그녀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생전 혼자서 고민을 끌어 안는 성격이었고, 자살하기 전부터는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이 잦았다고 한다.
그녀의 자살의 원인에 대한 일각에서의 의견 중엔 평소 풍부한 감수성을 소유하고, 때묻지 않았던 순수함을 지녔던 유키코가 일본 연예계의 추악한 일면을 알게 된 이후부터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갖고 있던 꿈과 환상이 깨져 버리는 바람에, 연예계 자체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이돌을 그만두려고 하였지만, 그녀를 세이코처럼 톱 아이돌로 육성시키고 싶었던 아이자와 사장의 격한 반대로[13] 인해 은퇴가 무산되어 버리자 절망해 투신자살을 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생전에 근면성실하며, '''굉장한 노력가'''라고 알려진 그녀가 연예계에 대한 실망, 연애 문제 등의 사유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오히려 과도한 스케줄로 인한 피로로 인한 우울증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자살기도를 했다가, 사건이 너무 커지자 가족들과 소속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막대한 죄책감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위에도 전술했지만, 그녀의 소속사 사장 아이자와 사장은 그녀의 일기장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는 분홍 종이에 쓰인 그녀의 '유서'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걸 가지고 대중들이랑 계속 보여줄까 말까 밀당을 했으며, 결국엔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공개한 적은 없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이 내용들을 모른다고 한다.[14] 아이자와 사장은 끝까지 이 유서 내용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2013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금고가 열어지지 않는 한 그녀의 자살 원인은 밝혀질 가능성이 이제 없다고 보면 된다.


[1] 35초 쯤에 60년 5월 31일이라고 나오는데, 1960년이 아니라 일본 연호식으로 표기되어, 쇼와 60년인 1985년이다.[2] 갑자기 충격적이게 일어난 일이라서 굉장히 당황한 어투로 생방송 되었다.[3] 방송은 사건 이후였으므로 자막으로 '이 방송은 4월 4일(금)에 녹화한 것입니다'라는 자막이 뜬다.[4] "삼가 오카다 유키코 님의 명복을 빕니다." 라고 적혀져 있다.[5] 당시 인터뷰에서는 "팬들과 같이 즐겁게 즐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힘들지 않다" 라곤 했지만 역시 성장기에 3시까지 연습을 굴리는 소속사도 유키코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출처] 오카다 유키코 사후 책 <사랑을 주세요>[6] 이러한 미조구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의 사체 사진은 황색언론 기자들에 의해 뿌려졌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저곳에 돌아다닌다.[7] 쿠메 히로시는 유키코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많이 나왔던 음악 프로그램인 더 베스트 텐의 MC였지만 이후 뉴스 스테이션의 MC를 맡기 위해 그만두었다. 당시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도 많이 있었다.[8] 1943년 07월 17일생으로, 유키코와는 24살 나이 차이로 거의 아빠와 딸와 같은 나이차였다. 1977년에 결혼해 1983년에 이혼해 딸이 있었다. 이후 2008년 폐암으로 사망.[9] 당시 인기 있었던 배우로, 유키코는 생전에 항상 그를 가장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라고 대답했다.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 중 1명이며, 현재 이시하라 군단의 3거두(와타리 테츠야, 칸다 마사키, 타치 히로시) 중 1명이다.[10] 상단 영상 19초에 나온다. 해당 촬영이 유키코의 마지막 녹화였다.[11] 데뷔 동기이자 동시대 여자 아이돌로 현재도 활동 중.[12] 사건 당시 칸다 마사키와 같은 이시하라 군단의 멤버였다.[13] 당시 유키코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는 거대한 타이틀 쥐고 있던 대형 신인이었던 데다가,''' 자살했던 해인 1986년에 첫 번째로 발매 된 싱글인 '''입술 네트워크'''가 '''처음으로 오리콘에서 1위를 차지한 뒤로 가파르게 오르던 인기에 한창 박차를 가하던 참이어서, 선배 아이돌이었던 세이코나 아키나처럼 톱 아이돌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14] 유서는 소속사의 금고에 철저한 보안 아래 현재도 보관되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