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모토 카즈마
1. 개요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새로운 4번 타자이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중심타선 후보로 기대를 모으며 간만에 나타난 요미우리 순혈 거포.
2. 프로 입단 전
여느 일본 야구인들이 그렇듯 만 3세부터 가족과 캐치볼을 하는 것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연식 야구공으로 시속 100km를 던지고 시니어 리그[1] 시절에는 일본 중학 야구 선수권 대회[2] 에서 투수로써 팀을 4강으로 이끄는 등 투수 유망주로 지역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부터 응원하던 고교야구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고향의 치벤 가쿠엔 고등학교[3] 에 진학해 갑자원 마운드에 오르고 싶다는 꿈이 생겼으나, 고등학교 입학 직전에 심한 팔 부상을 당하며 투수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의 피지컬이 키 180cm 몸무게 83kg으로 타자로써도 A급 유망주였기 때문에 치벤 가쿠엔 고등학교진학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진학하자마자 1학년 봄부터 바로 주전을 차지하고 가을부터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야구에서, 특히 고교야구에서 4번 타자의 상징성은 세계 그 어떤 야구 리그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에. 명문 고교야구 팀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1학년에게는 4번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4] , 그런데도 치벤 가쿠엔 정도의 팀에서 1학년부터 4번을 차지했으니 오카모토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승승장구하며 고교통산 '''73'''홈런이라는 마쓰이 히데키와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떠올리게 하는 괴물같은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 기록을 바탕으로 U-18 아시아 청소년 야구대회 일본 대표로 발탁되어 대회 타율 .437을 기록하는 등 거포 유망주로서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2014년 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단독 지명을 받았다.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없었고 지명한 팀이 팀인지라 지명을 받아들이고 고졸 타자 치고는 꽤나 거액인 계약금 8천만엔을 받고 입단하였다.[5]
3. 프로 생활
3.1. 2015년
2군 춘계 캠프에 합류해 훈련 중 개막 직전 부상을 당해1군 개막 엔트리에 오르지 못했다. 8월 27일 처음 1군 엔트리에 합류하였고 바로 다음날 8월 28일 홈 주니치전 7회에 대타로 데뷔전을 치렀다. 첫타석 결과는 내야 플라이.
9월 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서 투런 홈런으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
9월 19일에 무라타 슈이치가 알버트 푸홀스급 크고 아름다운 먹튀 행각을 벌이다 말소 당한 자리를 대체해 첫 선발 출장을 했다.
최종 성적은 타출장 .214 .290 .321로 기대치에 비해 특별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3.2. 2016년
이번에도 2군 캠프에 합류해 시즌을 시작했다. 1군 경기는 3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10타석에서 겨우 안타 한개만을[6] 기록했다. 워낙 파워툴에 대한 팬들의 기대가 크기에 기회를 더 줄만도 했지만. 수비가 1군급이 아니라는 평을 듣고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다. 1군에서는 부진했지만 2군에서는 2군 올스타전에 4번 타자로 출장해 MVP를 수상하고 18개의 홈런에 리그 타점왕을 기록하고 2군 일본시리즈라 할 수 있는 팜 일본선수권 MVP도 수상하는 등의 잠재력을 보여주며 프렌차이즈 정통 거포에 굶주린 요미우리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3.3. 2017년
작년 2군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 처음으로 1군에서 개막전을 맞이하였다. 1루수 자리에 용병 케이시 맥기히가 있었기 때문에 좌익수를 맡았다.
이번엔 좀 터지나 했더니 지적받던 수비는 그대로에 기대했던 타석에서 마저도 홈런은 단 한개도 못치고 풍기질만 반복하다 또 2군으로 강등되었다.
3.4. 2018년
스프링 캠프에서 타격폼을 수정하더니 이 폼이 딱 맞았는지 시범경기에서 날아다니며 급기야 아베 신노스케의 1루수 자리를 빼앗고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였다. 약점폼은 딱 바꿔고, 이 타격폼은 '''전설의 고질라 그분이''' 배움 타법이다.
지난 시즌들과는 달리 개막 후 2경기만에 홈런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9월 8일에는 2010년 사카모토 하야토 이후 8년(...)만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30홈런을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타출장 .309 .394 .541에 33홈런 109타점으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연소 3할 30홈런 100타점이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달성하였다. 참고로 지난 시즌 한자리수 타점을 기록한 타자가 100타점을 기록하는 이색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야말로 팬들이 기대하던 잠재력을 완전히 대폭발 시킨 시즌으로, 아베 신노스케 이후 대가 끊겨버린 명예의 요미우리 4번 타자 자리에 드디어 적자가 나타났다며 현지 반응이 매우 뜨겁다.[7] 특히 같은 거포에 순혈 4번타자 후보로 기대를 모았던 5년 선배 오타 다이시[8] 가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되면서 기대를 접고 닛폰햄으로 트레이드를 했더니 거기서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바람에 타구단 팬들로부터 '''"유망주를 뽑아놓고도 키울 줄을 몰라서 아까운 재목을 썩히고 FA영입에만 의존하는 팀"'''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쓰린 속만 달래고 있던 요미우리 팬 입장에서는 오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훌륭하게 성장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있는 중. 젊은 스타의 부재로 서른 먹은 사카모토 하야토를 막내 취급하고 타팀이 지명해간 오타니 쇼헤이, 후지나미 신타로, 츠츠고 요시토모, 야마다 테츠토, 키요미야 코타로 등을 부러워만 하던 요미우리 팬들의 한줄기 빛이 되었다.
아래는 2018년 1호~30호 홈런모음 영상이다.
3.5. 2019년
시범경기부터 홈런을 뻥뻥 터뜨리더니 4월 3일에는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치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30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상당히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홈런 페이스만 비슷할 뿐, 작년 대비 타율(.309 → .231), BB%(11.7% → 7.5%), K%(19.5% → 24.3%) 지표가 급격히 나빠지며 클래식, 세이버 가릴 것 없이 골고루 처참한 지표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WAR는 -0.3으로 대체선수보다 못 한 상황. 아직 시즌 초반이라 반등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선구안이 무너진 상황이라면 쉽지 않아보인다. 개막부터 꾸준히 4번타자로 기용되고 있는데 나아지지 않을 경우 머지않아 타순 조정 또는 잠시 2군으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결국 후반기에 페이스를 회복해서 전년도 성적과 비교하면 타율은 상당부분 까먹었지만 2년 연속 30홈런에 타점도 사카모토 하야토와 더불어 팀내 최다인 94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성적은 타율 .265, 31홈런, 94타점, 출루율 .343은 타율을 생각하면 준수한 편이고, 장타율 .485와 OPS .828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준수한 성적.
그리고 한신과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3홈런 7타점으로 MVP를 획득하면서 완전히 요미우리의 4번자리를 꿰찼음을 확인시켜줬다.
아래는 2019년 1~30호 홈런모음영상이다.
3.6. 2020년
시즌 시작 후 25경기만에 10호홈런을 달성하였다. 8월 14일 현재 센트럴리그 홈런 선두를 달리는 중이다.
8월 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켐나 마코토를 상대로 프로 입단 후 첫 만루 홈런을 달성하였다.
8월 1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도쿄돔의 좌측 담장을 넘기는 시즌 17호 홈런을 기롱하였다. 이 점수가 이날 경기에서 나온 유일한 점수로 그 점수 덕분에 스가노 도모유키의 125구 완봉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9월 12일 도쿄돔에서 진행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요시다 다이키를 상대로 첫 타석에서 우측담장을 넘기는 시즌 20호 홈런을 3점홈런으로 기록하였다. 그 후 7회 도쿄돔의 좌측담장을 넘기는 시즌 21호 롬런을 쳐내며 그날 멀티홈런을 기록하게 되었다.
9월 25일 도쿄돔에서 진행된 주니치 드래곤스 전에서 야나기 유야를 상대로 구장의 우측담장을 넘기는 시즌 23호포를 기록하였다.
10월 22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진행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시즌 26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이 홈런으로 인해 한신의 오오야마 유스케에게 잠시동안 뺏겼던 센트럴 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11월 7일 도쿄돔에서 진행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오가와 야스히로를 상대로 시즌 30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이 홈런으로 3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하였다. 그 다음 타석에서도 홈런을 쳐내 시즌 31호 홈런을 연타석 홈런으로 기록하였다.
결국 정규시즌동안 총 31홈런 97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첫 센트럴리그 홈런왕, 타점왕 자리에 올랐다. 코로나19로 인해 시즌이 단축된 점을 감안하면 커리어하이로 봐도 무방할 정도.
4. 플레이 스타일
야나기타 유키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역동적인 스윙을 하는 파워히터다. 2018 시즌에 친 홈런 중 밀어친 홈런이 절반 가까이 될 만큼 배트 컨트롤과 컨택 능력도 나쁘지 않고, 볼넷 출루 능력도 준수하다. 그러나 수비에선 아직 갈길이 멀다는 평가가 대다수. 이건 과거에도 여전히 지적받던 고질적인 문제라 성장을 하면서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
5. 여담
- K-POP 덕후다. TWICE의 팬 원스이며 그중에서도 멤버 정연을 제일 좋아한다고. 타석에 들어설 시 등장곡은 2NE1의 내가 제일 잘 나가이며 2018시즌 등장곡 대로 팀타선에서 제일 잘나가는 타자가 됐다. 2019년 국가대표팀 경기에서도 YES or YES를 등장곡으로 하기도 했다. 니혼 TV의 '줌 인 새터데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아침에 일어날 때 기상송으로 트와이스 노래를 많이 듣고, 아내가 하이터치회 참석을 위해 트와이스 음반을 50장 샀다고 한다(!!!). 2019년 센트럴리그 한신과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IZ*ONE의 Rumor가 등장곡으로 나왔다. 공교롭게도 본인이 지금 백넘버를 달고 있는 25번은 제70대 4번타자였던 이승엽이 4년간[9] 달았던 번호다. 다만 2020년에는 한국 노래를 등장곡으로 쓰지 않는다. 등장곡을 워낙 자주 바꿔서 시즌 중에 바뀔 수도 있겠지만.[10]
- 위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야쿠자 같이 험악한 외모의 소유자다. 그래도 나름 남자답게 잘생겨서 인기가 많지만, 웃을 때는 일본인 특유의 나쁜 치열이 드러나서 순박한 동네 바보가 된다.
- 예전에 LG 트윈스에서 용병으로 뛰었던 오카모토 신야와 마찬가지로, 동명의 모 성인용품 기업 때문에 포털사이트 검색을 위해서는 성인인증을 해야하는 슬픈(?) 인물이다.
- 2016년 12월 25일에 결혼을 해서 만 스무살에 유부남이 됐다. 원래 야구 선수들이 결혼을 빨리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 빠른편. 아내는 두살 연상의 평범한 회사원인데 고등학교 3학년 고시엔 대회 때 처음 만났다고한다.
- 2019년부터 도쿄돔에서 오카모토의 이름을 딴 '타피오카모토' 버블티를 판다. #
6. 연도별 기록
[1] 일본의 중학생 대상 클럽형 야구 리그로, 리틀 야구의 중학교 버전이라 생각하면 된다. 연식 야구공을 사용하는 일반 중학교 야구와는 달리 경식 야구공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다수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은 시니어 리그를 포함한 보이즈 리그, 포니 리그 등의 클럽 야구 리그 출신이다. 학원 야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유소년 야구와는 다른 개념.[2] 시니어 리그, 보이즈 리그, 포니 리그 등 일본의 경식 야구 클럽들이 참가 하는 중학생 경식 야구 대회.[3] 智弁学園. 나라 현의 야구명문교로 고시엔 본선에 여러 차례 출전한 야구명문고등학교다. 같은 교육재단 소속인 치벤와카야마(智弁和歌山)고등학교도 고시엔 본선 단골 출전교다.[4] 기요하라 가즈히로도 명문 PL학원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4번 타자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야구부 선배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한다, 원래 PL학원이 대물림되는 심각한 가혹행위 문제가 공론화되어 몰락했을 만큼 가혹행위가 심각한 학교이기는 하다만.[5] 한국과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대졸/사회인 야구 출신들이 고졸 출신 선수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6] 2루타[7] 요미우리 4번 타자 자리는 한 때 요미우리 4번 타자=일본야구 최고의 타자로 통했을 만큼 단순한 타순번이 아닌 왕위처럼 계승되는 상상 이상의 영애로운 자리다. 호날두 이후 지지부진한 맨유 7번처럼 요미우리 4번도 타팀출신, 외국용병 등이 돌아가면서 맡으며 실패를 반복해 가던 와중에, 오카모토가 훌륭한 성적으로 계보를 물려 받은 것은 요미우리 팬들의 프라이드를 제대로 살려준 것이 되었다.[8] 2008년 요미우리의 드래프트 1순위 지명으로 입단하자 마자 받은 등번호가 '''55'''번이었다. 그 번호의 전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요미우리에서 이 선수에게 얼마나 기대를 걸었었는지를 알 수 있다.[9] 06년은 제25대 4번타자이자 본인의 팀대선배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달았던 33번. 07~10 4시즌간 달았다.[10]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한일관계가 파탄난 후에도 일본에서 K-POP을 듣는 사람들은 꾸준히 듣고, 야구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이건 한국 사람들 역시 한일관계가 파탄나도 닌텐도 스위치나 동물의 숲은 살 사람은 사는거랑 비슷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