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모토 신야

 

[image]
'''이름'''
오카모토 신야(岡本真或[1])
'''생년월일'''
1974년 10월 21일 (50세)
'''국적'''
일본
'''출신지'''
교토부 타케노군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0년 드래프트4위
'''소속팀'''
사토 공무점
아베 기업
야오한
암웨이 레드삭스
야마하
주니치 드래곤즈(2001~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2008~2009)
LG 트윈스(201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2011)
'''LG 트윈스 등번호 56번'''
이경민(2008~2009)

'''오카모토 신야(2010)'''

송윤준(2011~)
<color=#373a3c> '''2004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2]'''
2003년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31.15RP

'''오카모토 신야'''
'''(주니치 드래곤즈)'''
'''24.80RP'''

수상기준 개편[3]
1. 개요
2. 커리어
2.1. 프로 데뷔 전
2.2. 프로 데뷔 후
2.3. 대한민국 에서의 2010 시즌
2.4. 그 후
3. 연도별 성적
4.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LG 트윈스외국인 선수. 포지션은 투수.
LG에서 활동 당시 등번호는 56번. LG에서 뛴 유일한 일본 국적의 선수이다. 별명은 그것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CD옹'''. 이유를 모르겠다면 "오카모토"로 검색을 해 보자. 성인 인증이 뜬다.[4]
'세이브에 성공하면 피임 성공.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면 찢어졌다' 등의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이것에 착안한 이사만루2018에 있는 본인 전용 스킬인 '''콘돔쥐'''가 있다.

2. 커리어



2.1. 프로 데뷔 전


74년생이지만 프로 입단은 2001년[5]으로, 주니치 이전의 팀은 모두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이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고교 졸업 후 프로의 지명을 받지 못해 사회인야구 쪽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토 공무점은 입단 1년 후 해체, 야오한 재팬은 입단 3년 후 부도가 나서 회사 자체가 도산했다고.
야마하[6]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된다.

2.2. 프로 데뷔 후


입단 3년차인 2003년에 12차례 선발 등판, 4승 6패 방어율 3.34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체력 문제로 다음 해인 2004년부터 중간계투로 보직을 변경, 올스타전에 출장하고 센트럴리그 최후의 릴리프포인트[7]왕을 차지했다. 당해 성적은 9승 4패 ERA 2.03.[8]
2007년 개인 최다인 38홀드를 기록하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하지만, 이듬해 강타자 와다 가즈히로[9]의 FA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세이부에서도 팀내 홀드 2위를 기록하며 알찬 활약으로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한다. 선수 본인에게는 두 번째이자 2년 연속으로 우승반지를 챙겼다. 그리고 주니치와 세이부 모두에서 아시아 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2009년 스트레칭 도중에 목을 삔 것이 팔저림 증상으로 발전하여 시즌 중반 2군으로 강등, 이후 1군 무대에 복귀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시즌 종료 후 NPB 12개 구단이 참여하는 트라이아웃에 참여하지만, 입단에 실패하며 무적선수가 된다.
2009년까지의 NPB성적은 357시합(12선발) 32승 19패 2세이브 92홀드 / 방어율 3.21. 426이닝 / 421탈삼진 / 169볼넷

2.3. 대한민국 에서의 2010 시즌


2010 시즌 LG 트윈스로부터 대한민국행을 제의받고 입단 테스트를 받아 계약한다. LG로서는 역사상 첫 일본인 선수이자, 1998년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래 리그 6호 일본인 선수다.[10] 일부 LG 팬들의 경우 오카모토가 로베르토 페타지니의 대체 요원이라는 이유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었다. 오카모토의 보직은 마무리 투수로, LG의 마무리 부재는 김용수, 이상훈 이래로 꾸준히 문제시된 데다가 우규민마저 경찰청 입단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클로저의 역할을 맡게 된다. 특히 우규민이나 이재영처럼 불안한 9회를 보던 LG 팬들은 9회마다 개안하는 느낌인지라, 얼마나 감격했으면 시즌 중에 '''페타지니의 응원가를 오카모토 등판 시에 부르기도 했다'''.
다만 피안타율도 WHIP도 다른 마무리 투수들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은데, 이상하게 경기만 보면 똥줄이 탔다. 특히 한 끗 차이로 애매한 볼이 볼 판정을 받는 다거나 장작을 쌓는다던가 할때 나오는 그의 난처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애초에 터프 세이브 상황에서 등판하거나, 위기를 자초하고 그 위기를 막아내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이가 있는 탓에 구속이 많이 올라오지 않았고, 구위 또한 썩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비록 시즌 초반 출중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미스터 제로'''로 불린 모습만으로는 LG의 용병 농사가 성공하는가 했지만, 역시 나이 때문인지 슬슬 체력적으로나 구위에서 힘에 부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11] 시즌 최종 성적은 46경기 48이닝 5승 3패 1홀드 16세이브(4위), 평균자책점 3.00으로 클로저치고는 꽤나 높은 방어율을 기록했다. 블론세이브는 5개. 평균자책점은 일년 동안 꾸준히 높아졌다. 후반에는 오카모토 대신 김광수+이동현으로 마무리를 꾸려가야 할 정도였다.
이 와중에 박종훈 감독에게 연투시키지 말아달라고 떼쓴 사실도 밝혀져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는 거의 휴업 상태에서 덕아웃의 음료수는 마구 비워대서 더더욱 욕먹었다. 이쯤되면 태업이 의심되는 상황.
2010 시즌 종료 후, 선발 투수 2명으로 용병 계획을 잡은 LG 트윈스는 오카모토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보류명단에서 제외했다.

2.4. 그 후


LG에서 방출된 뒤에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부임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 합격하면서 일본야구로 복귀했다. 그러나 1군 복귀는 못하고 2군에서만 24시합에 4.01의 방어율을 남긴 채 2011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방출되었고,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2012년 7월 센다이에서 곱창집을 개업했다.
2020년에 근황이 전해졌는데, 현재도 곱창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10년전 같은 팀에서 뛰었던 오지환의 수비가 많이 발전했다고 평가하였다. #관련기사

3. 연도별 성적


<color=#373a3c> 역대 기록[1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10
LG
46
48
5
3
16
1
3.00
36
6
29
4
40
1.35
<color=#373a3c> '''KBO 통산'''
(1시즌)
46
48
5
3
16
1
3.00
36
6
29
4
40
1.35

4. 관련 문서


[1] 2001~2008년 시즌까지의 등록명은 岡本真也, 2009년 시즌의 등록명은 岡本慎也.[2] 이때의 수상기준은 지금의 홀드가 아닌(이 당시엔 퍼시픽 리그에서만 사용중이었다) '''릴리프 포인트(RP)'''라는,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만 독자적으로 사용한 중간계투 평가 수치였다. 릴리프 포인트에 관해선 홀드(야구)의 해당 항목 참고.[3] 2004년을 끝으로 릴리프 포인트가 폐지되었고, 양대리그 모두 홀드홀드포인트(홀드+구원승, 세이브 포인트와 비슷한 기준이다) 도입을 결정하여 홀드포인트가 많은 투수에게 최우수 중간계투 타이틀을 시상하는 것으로 수상기준이 개편되었다.[4] 일본의 콘돔 제조 회사로 유명하며, 웬만한 편의점에서 이 회사 콘돔이 진열대에 올라있는 걸 볼 수 있다.[5] 2000년 드래프트 4위.[6] 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 세 번이나 우승한 명문이다. 축구가 강세인 시즈오카에서도 이 팀만큼은 인지도가 높다.[7] 센트럴리그가 메이저리그홀드를 모방해 1996년~2004년까지 채택한 독자적 중간계투용 기록. 홀드 상황에서는 +, 블론세이브분식회계, 장작쌓기는 -포인트를 부여했다.[8] 당시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이적한 오츠카 아키노리에게서, 투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9] 주니치는 후쿠도메 고스케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로 그의 자리를 메꿀 중심타자가 필요했다.[10] 2003년 이리키 사토시(투수, 두산), 모리 카즈마(투수, 롯데), 2006년 시오타니 가즈히코(3루수, SK), 2008년 타카츠 신고(투수, 히어로즈), 2009년 카도쿠라 켄(투수, SK)[11] 일본에서 뛸 때도 초반에 극단적으로 낮은 방어율을 기록하다가도 후반 들어 맞아나가기 시작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결국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테크를 탔다.[12]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