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선수 경력
1. 고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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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중 시절부터 타고난 파워 만큼이나 타구가 강력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1]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도 입단 제의가 왔던 듯. [2]
성남고에서 고교야구 최초로 4연타석 홈런을 쳐냈으며 홈런타자에 걸맞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해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아 데뷔하였다.
성남고등학교 시절 박병호의 경기 영상. 이 영상은 KBS에서 당시 중계했던 2004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화순고와의 1회전 경기 영상인데 이 날 박병호는 '''3연타석 홈런'''을 쳐냈다. 홈런 코스도 좌중우를 골고루 넘겼는데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시절임을 감안[3] 해도 엄청난 파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병호는 휘문고와의 2회전 경기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쳐내 고교야구 최초 4연타석 홈런을 달성한다.
2. 선수 생활
2.1. LG 트윈스 시절
LG의 영원한 숙제이자 염원인 부족한 우타 거포의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을것이란 기대감에 2005년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억 3천만원을 받고 LG와 사인했다. LG 팬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프로에 와서는 리듬이나 타격 기술이 부족해 2할 초반이나 1할대를 쳤다. 그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으로 인해 '''박병신'''이라는 별명을 붙인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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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호의 데뷔 초창기 3년 성적.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타율과 타점, 볼넷/삼진 비율로 수많은 LG팬들을 뒷목 잡게 했다. 심지어 동기였던 정의윤보다도 타율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제대로 된 출장 기회도 없었다.[5] 그래서 2006년 시즌 후 상무에 입대해서 퓨처스리그에서는 상당히 활약했지만, 군 복무를 마친 첫 시즌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2010년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연속 홈런과 호수비로 주간 MVP까지 선정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일주일이었지만 '''딱 일주일짜리였다.''' 성적은 그 뒤에도 제자리를 맴돌며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최강의 2군 멤버로 군림했다. 2010 시즌 막바지에는 나주환과 정면 충돌했고, 이 사고로 결국 왼쪽 팔꿈치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게 되어 시즌을 마감했다. 그 와중에 2010년에는 서용빈 코치에게서 대놓고 따귀를 맞기도 했다는 얘기가 후일 안준모의 아프리카방송에서 폭로되었다. 동영상 윤세호 기자가 직접 확인사살.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박병호가 매우 난감해했다고. 아무래도 야구계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편이다 보니 그런듯 한데, 이후 서용빈에게는 맞고 나서 얼마 지나지않아 사과를 받았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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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시절 박병호가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알 수 있는 레그킥 타격폼. 상무 시절 이 타격폼을 만들고 좋은 성적을 기록해서 1군에서도 그대로 써먹어봤으나 처참히 실패하고 다시 타격폼을 고쳤다.
이 시기 LG 팬들은 박병호의 전형적인 레파토리를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했다.
넥센 이적 전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2군 본즈'''. 2군을 씹어먹는데 정작 1군에 오면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게 매년 연례행사였다. 또한 1루 자리에 최동수, 로베르토 페타지니, 이택근이 있던 상황이라 제대로 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도 LG에서 실패한 원인이었다. 어떻게든 비밀번호를 끊고 성적내는데에 혈안이 되어있어 유망주에게 기회를 허락할 여유가 없었다. 외야가 포화상태인데도 굳이 국가대표 외야수 이택근을 데려와 1루수로 기용하며 페타지니와 최동수가 떠난 1루수 빈자리를 꿰찰 기회를 말살했다.
박병호 육성 실패는 결과적으로 LG의 타자 유망주 수집과 육성 정책에 변화를 가지고 왔는데, 2012년도 드래프트 이후 수집한 타자 유망주들은 거포 스타일보다 잠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컨택 위주의 유형이 많다.[6] 즉, 정의윤의 트레이드 이후 우타거포 육성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 꼴. 그런데 정작 거포들 다 내보내고 드디어 내놓은 아웃풋이 팀 역사상 한시즌 최다홈런 3위 최다타점 1위 기록 보유자 채은성, 선풍기이긴 해도 순장타율은 팀내 역대급인 양석환, 아무리 못 해도 15홈런은 때리는 거포포수 유강남, 컨텍보정만 하면 20-20이 가능한 툴을 갖춘 이형종과 오지환... 최훈 카툰
2.2. 넥센 히어로즈 1기
2.2.1. 2011 시즌
시즌 도중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직후의 소감 인터뷰 심재학 코치의 트레이드 당시 회상"50타석 삼진을 먹더라도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너는 4번타자다."
LG 트윈스 시절 줄곧 써왔던 25번을 뒤집은 52번을 쓰기 시작했다. 25번은 송지만 선수가 이미 쓰고 있었기도 했고, LG 시절처럼 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알 수 있는 부분.
2.2.2. 2012 시즌
처음으로 풀 타임 시즌을 맞이한 박병호는 넥센 히어로즈의 막강한 중심 타선의 한 축을 이루며 크게 활약했다. 2011년에 비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으며,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선두권을 달리며 넥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선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데뷔 후 처음으로 전 경기에 나와 20-20클럽에 가입했고 2012년 홈런과 타점, 장타율 1위에 오르면서 타자 3관왕에 등극, 2012년 프로야구 MVP에 올랐으며, 데뷔 첫 KBO 골든글러브(1루수 부문)를 수상했다. 넥센 히어로즈가 타격의 팀으로 팀 컬러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넥센 히어로즈의 선수 트레이드 논란은 이로서 끝.'''
2.2.3. 2013 시즌
2.2.4. 2014 시즌
10월 14일에 사직 롯데전에서 역대 3번째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가 되었다. 박병호의 '''52홈런'''은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4위에 랭크되었다.'''"박병호도 50홈런 칠 수 있다. 할 수 있다."'''
- 이승엽
하지만 데뷔 후 첫 출전하였던 한국시리즈에서는 크게 부진하였다.
2.2.5. 2015 시즌
2.3. 메이저리그 진출
2.3.1.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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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맞는 첫 시즌. 4월까지는 좋은 성적을 보였으나 5월부터 주춤하기 시작하더니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들 중 타율 최하위가 되버리는 바람에 많은 팬들을 걱정하게 했고 결국 한국시간 기준 7월 2일에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었고, 여기에 손목 부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게 되며 8월 26일 시즌 아웃이 확정되고 말았다.
최종적으론 메이저에선 1할 타율, 마이너에선 2할초반 타율이라는 최악의 낙제점 수준 성적을 기록했다.
2.4. 마이너리그
2.4.1. 2017 시즌
2.5. 넥센-키움 히어로즈 2기
결국 메이저리그의 쓴맛을 맛본 박병호는 2017년 11월 27일 미네소타 트윈스와 잔여 계약 해지에 최종 합의하면서 미국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연봉 15억원을 받고 넥센 히어로즈에 컴백'''하여 2년만에 KBO 무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
2017년 한해 넥센 구단이 이장석 문제도 있고 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유독 짠돌이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다. 특히 내부 FA인 채태인을 안잡고[7] 2018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도 포기하며 9억을 얻어냈는데[8] 이것이 박병호의 복귀를 위한 포석이 아니였나 하는 의견도 있다.
윤석민, 황재균 등을 예로 들며 메이저에서 실패한 타자들이 돌아와서 돈만 받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박병호가 메이저리그에 그냥 남을 경우 2018, 2019년 연봉은 연 300만 달러, 얼추 30억이다. 그걸 감안하면 연봉을 반으로 깎아가면서까지 연 15억에 KBO로 돌아와준 건 혜자나 다름없는 셈.
KBO에서 7시즌을 채우고 포스팅 시스템으로 외국 팀에 갔던 박병호는 FA 규정에 따라 앞으로 국내에서 풀타임으로 4시즌을 더 뛰어야 FA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FA 권리를 한번 행사하면 4시즌을 더 뛰어야 다시 행사할 수 있는데, 포스팅을 통한 해외 진출도일종의 FA 권리 행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네소타에서 2년간 600만 달러(한국돈 대략 66억)를 받은 박병호가 앞으로 4년간 연봉 15억을 유지할 경우 결과적으로 6년간 126억이라는 FA 계약을 맺은 것과 비슷해지는 셈이다. 다만, 성적이 부진하거나 부상을 당할 경우 연봉이 삭감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금액이 완전 보장되는 FA에 비해서는 손해가 크다. 역시 포스팅을 통해 외국 팀으로 간 류현진, 강정호도 국내로 복귀할 경우 4시즌을 뛰어야 FA 자격을 얻을 수 있다.
2.5.1. 2018 시즌
2.5.2. 2019 시즌
2.5.3. 2020 시즌
2.5.4. 2021 시즌
지난시즌의 부진으로 연봉이 20억에서 15억으로 5억 삭감되었다.
그리고 2021시즌 주장에 선임되었으며 킹시국으로 인해 고척에서 출퇴근 방식으로 스캠이 진행되었으나 후배들이 출퇴근에 불편을 호소하자 주장이자 선수단을 대표하여 코칭스태프들과 구단에 건의해 2주간 합숙으로 변경되었다.
이번 2021시즌을 잘 마치기만 한다면 선수 커리어 첫 FA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다가 FA등급제 규정상 만35세이상 선수의 첫 FA 등급은 C급이라는 규정에 해당되기에 키움팬들은 박병호가 타팀으로 이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9] 과 FA로이드로 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사이에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3.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이전까지 박병호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 연이 없는 선수였다. 2012시즌 맹활약으로 국대 승선이 유력했던 2013 WBC 당시 국가대표 경험 부족을 이유로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에 밀려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5년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승선하여 커리어 첫 국제대회를 경험하게 되었다.
박병호는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선출되어 9월 15일 열린 기자회견에 류중일 감독, 김광현과 함께 참석했다. 류중일 감독은 주장으로 박병호를 선출한 배경에 대해 "베테랑 임창용과 봉중근도 있지만 투수는 주장 안 시킨다. 타자 중에 누가 좋은가 생각해봤는데, 박병호가 야구를 너무너무 잘한다. 50홈런 등극도 눈앞이다. 그 기를 받아서 선수들 모두 잘할 거라는 믿음으로 박병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10]
9월 18일 열린 LG 트윈스와의 연습경기에서는 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9월 22일 태국과의 B조 1차전에서는 한국이 스코어 0:1로 앞선 1회말 무사 2, 3루 상황에서 삼진을 당했다. 한국이 스코어 0:7로 앞선 1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도 3루수 실책으로 겨우 출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두타석에서 모두 안타를 처내어 결과적으로는 4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며 밥값은 했다. 이 경기 한국은 15:0으로 5회 콜드게임 승을 거뒀다.
9월 24일 B조 8강 경기 대만전에서는 1회 첫타석에서 수비 실책으로 간신히 출루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7:0으로 크게 이기고 있는 2회말의 두 번째 타석에서 비거리 130미터의 솔로포를 터뜨려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9월 27일 준결승 중국전에서는 안타에 도루까지 보여주며 좋은 컨디션을 뽐냈다. 게다가 6회말 낮은 볼을 퍼올리며 좌측담장을 넘기는 쓰리런 홈런까지 처내며 팀을 결승행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팀 동료들의 활약에 힘입어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커리어 첫 국제경기 금메달이다.
최종 성적은 22타석 19타수 6안타 2홈런 5타점 9득점 사사구3 1도루, 타율 0.316 출루율 0.409 장타율 0.684 OPS 1.093을 기록했다.
3.2. 2015 WBSC 프리미어 12
제 1회 프리미어 12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사실상 박병호의 커리어 첫 세계대회 출전이다.
박병호는 대회내내 팀의 중심타자 겸 1루수로 출전했지만 지독한 타격 슬럼프를 겪었다. 이 대회 박병호는 33타석 동안 안타 6개만을 때려내며 타율 0.207, 출루율 0.324에 그첬다. 볼넷을 4개 얻는 동안 삼진은 무려 10개나 당했다.
하지만 박병호가 이 대회 무용한 클린업이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박병호는 6개의 안타중 무려 4개[11] 를 장타로 때려내며 0.841의 OPS를 기록했다. 다만 클러치 상황에서 번번히 범타로 물러난 것은 사실이다.
특히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12] 과의 결승전 4회 떄 3점 홈런을 때려내며 조국을 프리미어 12 초대 우승국으로 이끌었다.
최종 성적은 8경기 33타석 29타수 6안타, 0.207/0.324/0.517, 2홈런 4타점, 4득점, 4사사구, 1도루 OPS 0.841을 기록했다.
3.3.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로써 개인 커리어 3번째 국가대표팀 합류이자, 2번째 아시안 게임 출전이다.
이번 대회 역시 박병호는 대회내내 팀의 주전 1루수 겸 4번타자로 활약했다. 대만전과 인도네시아전에서는 1안타씩만 기록하며 부진했지만 홍콩전 멀티히트에 이어 9회초 드디어 홈런포를 쏘아올렸다.
슈퍼라운드로 들어가서는 공수 모두 맹활약을 했는데 슈퍼라운드 일본전[13] 에서는 2회말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기는 호수비를 한 이후 3회초에 홈런포를 가동시켰다.
중국전에서는 5회말 GBK 구장 백스크린을 크게 넘기는 초대형 3점 홈런을 폭발시키며 괴력을 과시했다.
일본과의 결승전 역시 맹타를 휘둘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박병호는 2:0으로 앞선 3회말 중앙 백스크린을 맞추는 솔로포를 작렬시키며 대표팀에게 추가 득점을 안겨주었다. 이 홈런으로 4경기 연속 홈런을 몰아치며 두 대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종성적은 6경기 28타석 24타수 9안타, 0.375/0.464/0.875, 4홈런, 7타점, 7득점, 4사사구, OPS 1.339
3.4. 2019 WBSC 프리미어 12
한국 국가대표팀의 4번 타자로 낙점 되었다. 김경문 감독은 박민우-김하성-이정후 신인 3인방이 상위 타선에서 뒤흔들고 박병호와 김재환, 양의지, 김현수가 이들을 불러들이는 작전을 구상했으나...오히려 이정후와 김하성이 출루했음에도 뒤에서 불러 들이지 못하는 안습한 상황이 계속해서 나왔다. 오죽하면 의지박약이라는 조롱이 나올 정도.
예선 라운드 1차전 호주전은 5타수 무안타, 2차전 캐나다전은 볼넷 1개로 출루했지만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특히 호주전 3~5번째 타석, 캐나다전 1~2번째 타석까지 '''5연타석 삼진'''을 당했다. 심지어 캐나다는 8회 1사 2루에서 이정후를 고의사구로 거르고 박병호를 골라 아웃을 잡아버리며 박병호에게 제대로 굴욕을 맛보였다.
3차전 쿠바전에서는 드디어 침묵을 끊고 4타수 2안타에 타점도 1개 기록하며 경기 MVP로 선정되었다.
슈퍼라운드 내내 부진에 시달렸던 박병호는 결승전에서 까지 끝까지 부진하였다. 28타석으로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타석을 소화했음에도 단타 5개 만을 기록하며, 이승엽-이대호의 뒤를 잇는 대한민국의 4번 타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경문 감독은 부진에도 믿음을 주어 베이징 올림픽때 경기 내내 부진하다 준결승, 결승전에서 팀을 승리로 이끈 홈런을 기록한 이승엽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결국 마지막 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물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도쿄 올림픽 본선 티켓이라는 목표를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대회 준우승이라는 호성적까지 기록했지만 박병호의 기여는 0이라 봐도 무방한 대회였다.
사실 박병호는 2019년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 문승원에게 손목을 맞고 장타가 실종된 상태였다. 안 그래도 손목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인데, 손목을 맞은 것도 모자라, 장타가 실종된 상태였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호가 홈런왕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병호의 이름값만 보고 나믿박믿을 시전했기 때문에 박병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1] 후술하겠지만, 영남중학교 야구장 쪽에 철조망이 쳐져있는 이유는 바로 '''박병호 때문이였다'''고 한다. 곧잘 강한 타구를 날려, 학교의 창문을 깨는 일이 잦았다고... 특히, 교무실 창문을 많이 깼다고(...)[2] 훗날 인터뷰하길, 보스턴 레드삭스와 미네소타 트윈스였다고 한다. 훗날 미네소타 트윈스에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입단하게 된다.[3] 그 뒤에 열린 2004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부터 고교야구도 나무배트를 쓰기 시작했다.[4] 후술되어있듯 야구선수들 중에도 표현이나 맞춤법, 띄어쓰기가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5] 정의윤 또한 우타거포 자원으로 주목받았지만, 드넓은 잠실 야구장에 살아남기 위해 파워를 일정 부분 희생해야 했다. [6] 반면에 두산은 이미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이런 스카우트 전략을 가져가고 있었다. 2004년 김경문 감독이 부임한 직후에 김현홍 스카우트 팀장한테 했다는 말이 "잠실구장이 크니까 가능한 발 빠르고 수비 잘하는 애들로 뽑아줘요. 타격은 내가 어떻게 만들 테니까"였다고 한다.관련기사.[7] 이후 채태인은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롯데로 이적했다.[8] 지명을 모두 패스하고, 투수 김건태와 금민철을 각각 NC와 kt로, 외야수 강지광과 내야수 장시윤을 각각 SK와 LG로 보내며 9억을 벌었다.[9] C급 FA선수는 보상선수 없이 연봉150%만 보상하면 타팀에서 데려갈 수 있기때문이다[10] 사실 2013 WBC는 멸망했었고, 박병호를 왜 데려가지 않았냐는 비난이 류중일에게 꽂혔던 것도 있어서 이번에 진득하니 한 번 믿어보기로 했던 듯. 그리고 박병호는 그 믿음에 보답했다.[11] 홈런 2개, 3루타 1개, 2루타 1개[12]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은 팀이다. 마이너리그 트리플A 올스타 선수들 위주로 팀이 구성되었다.[13] 프로선수들이 제외되고 실업야구+대학야구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인야구에서도 보듯이, 게다가 NPB의 프로야구단들이 로스터를 아끼기 위해 자신들의 팀에 1,2년 후에 영입되는 것을 전체로 심어둔 사실상 프로선수들에 불과하다. 이유는 2군에 외국인 용병을 무제한으로 보유할 수 있는 반면에, 보유한 만큼 국내 선수의 로스터 보유 한도도 줄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비교하면 안 된다(...) 세상 어느 사회인야구 선수가 마의 기록이라 불리는 140대 공을 던지겠는가. 참고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때도 2명을 제외한 내야수 전원이 NPB로 진출해서 논란이였는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때도 몇 몇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주니치 드래곤즈와 가계약을 했다는 점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