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코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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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여왕(三笠宮彬子女王)
출생
1981년 12월 20일(42세), 일본 도쿄도
가족
아버지 토모히토1946~2012
어머니 노부코 비1955~
여동생 요코 공주1983~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1988~1994)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1994~1997)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1997~2000)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사학과(2000~2004)
옥스포드 대학교 대학원 박사(동양학)
오시루시(お印)[1]
눈(雪)
1. 소개
2. 이름과 지위
3. 외가
4. 학업
5. 가족과의 관계
6. 공적인 활동
7. 극우
8. 연애 및 독신주의
9. 여성 미야케?


1. 소개


일본의 황족.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1946~2012)의 장녀. 토모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덴노의 당숙[2]이므로, 아키코 공주는 나루히토 덴노의 재종자매(6촌)가 된다.

2. 이름과 지위


‘미카사노미야’는 궁호(宮號)로, 일본 황실에서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 결혼으로 분가(分家)하여 가장(家長)이 되면 받는 것이다. 이것을 ‘미야케#s-3(宮家)를 창설했다’고 표현한다. 일본 황족들에게는 성씨가 없어서, 황족들이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이나 단체 등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면 칭호[3]나 궁호를 성씨처럼 쓰곤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장남이 아버지의 궁호를 계승하고, 차남 이하의 아들은 결혼하면 새로운 궁호를 받아 미야케를 창설한다.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르며, 미야케를 창설할 수 없다. 일본의 민간에서는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를 수도 있고, 남자가 데릴사위가 되어 처가의 일원이 될 수도 있지만, 황실에서는 그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왕(女王)’은 덴노의 증손녀부터를 가리키는 것으로,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이라고 한다. 남자는 각각 친왕/왕이라고 한다.[4] 따라서 다이쇼 덴노의 증손녀인 아키코 공주의 지위는 여왕이 된 것이다.

3. 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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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노부코 비, 여동생 요코 공주와 함께.
아키코 공주의 모계는 대대로 정치계, 재계, 교육계 등의 거물들이 많다.[5]
우선 어머니 노부코 비는 그 유명한(…) 아소 다로의 여동생이다. 아소 다로는 일본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고, 그의 아내 아소 치카코(麻生ちか子) 또한 스즈키 젠코 前 총리의 딸이다. 아소 가문은 규슈에서 탄광사업을 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하여 큰돈을 벌었고, 아소 다로 또한 극우 인물로 한국에 대한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외할머니 아소 카즈코(麻生和子)는 요시다 시게루 前 총리의 딸이며, 화족 정치인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의 외손녀이다. 노부아키는 2.26 사건 때 카즈코와 함께 있다가 습격당해 위험에 처했는데, 카즈코가 적들과 맞서 총격전을 벌여 외할아버지를 구했다. 한편 노부아키는 본래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인데, 마키노 가문에 양자입양되어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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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첫째(장남)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낳고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옆에 앉은 중년 여성은 당시 동궁(東宮) 시녀장(侍女長)이었던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
노부아키의 며느리 스미코는 화족 나베시마 가문의 딸로, 미치코 상황후의 황태자비 시절에 동궁 시녀장을 지냈다. 오랜 관례를 깨고 평민[6]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되자,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를 위시한 황족·화족들은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는데, 스미코는 바로 그 나가코 황후에 의해 동궁 시녀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따라서 스미코 또한 나가코 황후 일파와 함께 미치코 황태자비를 괴롭혔다.
스미코의 딸 하야시 사다코(林貞子, 1919-2006)는 교육자로, 가쿠슈인 대학과 도카이(東海) 대학의 명예교수였으며 유아교육 전문가였다. 사다코가 도쿄도 시부야구에 설립한 쇼토(松濤) 유치원일본에서 원비가 제일 비싼 유치원으로 손꼽혔고, 상류층·부유층·연예인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며[7], 원생들을 명문 사립초등학교로 많이 진학시키기로 유명했다. 아키코 공주의 어머니 노부코 비도 쇼토유치원을 졸업했고, 결혼 전에는 쇼토유치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쇼토유치원은 2008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고, 2010년에 최종 폐원되었다.

4. 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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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는 쇼토유치원에 다니다가[8] 전통적 황실학교인 가쿠슈인의 유치원으로 옮겼고, 이후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아키코 공주는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했고[9], 대학 졸업 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유학을 떠나 동양학 전공으로 일본 미술사를 연구하여, 일본 황실의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똑똑한 큰딸 아키코 공주를 자랑스러워했고, “황실 공주들 중에서 아키코가 최고”라고 주변에 항상 자랑하여 아키코 공주가 민망해한 적도 있다고 한다. 토모히토 친왕은 유학을 떠나는 아키코 공주에게 “너는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니까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는데, 국민들이 힘들게 낸 세금으로 공부하는 만큼 ‘중도포기’[10]라거나 ‘노력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라는 말은 절대로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아키코 공주 본인 역시 ‘황족이라는 특권으로 학위를 땄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지라, 아버지의 충고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땄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했음에도, 일본으로 귀국하여 취직했을 때는 ‘황족이라는 배경 덕분’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한편 아키코 공주는 긴 유학 기간 중에 주간지 칼럼을 통해 미술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연재했는데, 이것 또한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의 충고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세금으로 공부하는 만큼 자신의 공부와 관련한 정기적 보고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한 아키코 공주는, 전공과 관련된 주간지 칼럼을 통해 자신의 근황을 알리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본인이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기에, 아키코 공주는 칠촌 조카[11]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가 박물관 비상근[12] 연구원 일과 황족으로서의 공무를 병행하는 와중에 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과정까지 병행하겠다고 하자 비판했다고 한다.

5. 가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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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의 장례식에서 여동생 요코 공주와 함께.
2012년에는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이 병으로, 2016년에는 할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부부관계[13] 및 시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노부코 비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등장하지 않아 구설수에 올랐고, 대신 장녀인 아키코 공주가 행사를 주관하고 고별사도 낭독했다. 큰고모 고노에 야스코와 작은고모 센 마사코는 오래 전에 시집가서 평민이 되었지만, 상주 노릇을 하는 조카 아키코 공주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로 남자가 없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에서, 맏손녀인 아키코 공주는 장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맡았던 중근동 문화센터 총재직과 미카사노미야 재단 총재직을 맡았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당주(當主)가 된[14] 할머니 유리코 비를 보필하고 있다. 유리코 비는 워낙 고령이기에 공무에 참석하기 힘든데, 맏며느리인 어머니 노부코 비 대신에 아키코 공주가 유리코 비를 대리하고 있다.
노부코 비는 남편과 시가뿐 아니라 딸들과도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주간현대>와의 인터뷰에서 아키코 공주는 “어머니와 10년 이상 만난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동안 독자적인 미야케#s-3처럼 대우받던 토모히토 친왕 일가가 본가인 미카사노미야 가문으로 복귀한 것도, 노부코 비가 토모히토 친왕의 뒤를 이어 당주 노릇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공무에서 만나더라도 모녀간에 일절 대화가 없다고 하는데(2020년 1월 주간지 보도), 2019년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식과 나루히토 황태자의 덴노 즉위식 생중계에서도 모녀는 서로 인사하거나 이야기하지도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고.
이렇게 아키코 공주는 어머니와 사이가 나쁜 반면, 아버지 및 친가 친척들과는 돈독했다. 이러한 가족관계는 그녀가 “시집가지 않고 독신으로 황실에 남아서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6. 공적인 활동


2016년에는 고쿠가쿠인(國學院)[15] 대학의 특별초빙교수로 취임했다. 또한 전통 일본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단체인 신유샤(心遊舍)의 총재도 맡고 있다. 신유샤의 홈페이지에는 아키코 공주의 사진 및 그녀가 쓴 글이 게시되어 있는데, 아키코 공주는 이름만 올려놓은 명예총재가 아니라 상당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2020년 6~7월에도 아키코 공주는 신유샤 활동 차 니가타현 등의 농촌을 방문했다.[16] 당시는 아베 신조 정권이 “코로나19가 진정 국면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여 국내 경기 활성화를 위해 GO to 캠페인을 시작하기 직전의 단계였다. 아키코 공주는 에서 잡초를 뽑거나 을 따는 등 비교적 사람들과의 접촉이 적은 활동을 했으며, 그조차도 코로나19 감염이 늘어나기 시작한 시점에는 취소하고 화상회의 등으로 대체했다.
이때 “아키코 공주는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와중에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활동했다”는 식으로 보도한 언론이 있었는데, 이런 보도에 대해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일가가 꾸며낸 짓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문제의 보도에서는 노부코 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했는데, 노부코 비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 아랫동서 히사코 비와 함께 한소리를 한 바 있기 때문. 또한 노부코 비는 궁내청과의 교류도 적은데, 그런 그녀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궁내청 직원보다는 황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7. 극우


아키코 공주는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국민의 자위관’ 표창식에 참석하여 축사(祝辭)와 표창 수여를 하고 있고, 여동생 요코 공주와 함께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우익극우 블로거들은 두 공주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두 공주의 막내 숙부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일가[17]에 대하여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것과는 정반대이다.
참고로 두 공주의 이러한 행보는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이 사망한 이듬해인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어서,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여겨지고 있다.

8. 연애 및 독신주의


2017년부터 시작된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코무로 케이의 약혼 소동으로 인하여, 새삼 일본 황실에 있는 미혼 공주들의 연애사가 주목되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키코 공주에게는 2009년 무렵 남자친구가 있었으나,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현재 아키코 공주는 미카사노미야 궁가를 지키기 위해 평생 시집가지 않고 황실에 남아서 독신으로 살아갈 생각이라고 한다. 오늘날 일본 황실에서는 남녀 모두 평민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데, (황족 남성과 달리) 황족 여성은 평민 남성과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방계 황족들이 많아서 황족끼리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18]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이 평민으로 강등[19]당했고, 1965년[20]부터 2006년[21]까지 41년간 줄줄이 공주들만 9명이 태어나는 바람에[22], 이제는 황족끼리 결혼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23] 따라서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시집을 간다면 어머니 노부코 비가 사망하는 즉시 미카사노미야 가문이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두 공주가 시집가지 않고 황실에 머물러 있으면, 적어도 두 공주가 살아있는 동안만은 미카사노미야 가문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일본 황실의 공주들은 시집간 후로도 신관이나 각종 단체의 명예직 등을 맡아서 하고 있다. 다카쓰카사 가즈코이케다 아츠코에 이어 구로다 사야코이세신궁 신관이 되어있고, 센게 노리코모리야 아야코도 결혼 전부터 맡고 있던 단체의 명예총재직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또한 황실 가족들과 사이가 나쁜 노부코 비조차도 2019년 2월 황실회의 이후로 공무[24]를 맡고 있다. 이는 워낙 일본 황실에 황족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25]으로, 미치코 황후결혼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맏손녀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에게도 (결혼 문제만 제대로 수습한다면) 공무를 맡기려는 듯하다. 논란 와중에도 마코 공주가 공무만은 성실한 태도로 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9. 여성 미야케?


현재 일본 황실은 아버지로부터 황족의 핏줄을 물려받은 남자(남계 남자)만이 황위를 계승하고 미야케#s-3(황족 분가)를 창설할 수 있다.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밖에 없기 때문에, 현행 황실전범대로라면 다음 황위는 나루히토 덴노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이, 그 다음은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인 히사히토 친왕이 이어받게 된다. 그러나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시선이 나빠졌고, 현행 황실전범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도 있고, 아이코 공주와 그녀의 황위 계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가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실제로 옛날에는 여자 덴노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버지로부터 황족의 핏줄을 물려받은 여자(남계 여자)들이었다. 따라서 아이코 공주덴노직을 물려받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아이코 공주와 평민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덴노직을 물려받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므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7년 신적강하 때 평민으로 강등되었던 옛 황족 가문의 아들을 황족 신분으로 복귀시켜 부마로 맞이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주가 옛 황족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면 평민 출가외인이 되지 않고 계속 황족 신분을 유지하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황족 신분을 이어받는 것이다. 또한 방계 공주들도 옛 황족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면 미야케#s-3를 창설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만약 황실전범이 이렇게 개정된다면, 아키코 공주도 옛 황족 가문의 아들들 중에서 신랑감을 골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베 신조 총리의 주변에서는 여성 미야케의 대상을 ‘내친왕’만으로 한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렇게 하면 ‘여왕’인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쓰구코 공주는 제외되고, 마코 공주·카코 공주·아이코 공주만 해당되게 된다.
그러나 ‘내친왕 한정 여성 미야케’는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속한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은 여러가지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의 외삼촌 아소 다로는 집권 여당인 일본 자민당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아소의 파벌은 자민당 내에서 캐스팅보트로서 나름 강한 편이다. 무엇보다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는 앞선 우익 항목에서 보듯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자위대 행사 참여를 하는 사실상 유일한 일본 황족이다 보니, 우익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거기에 여성 황족과 결혼하여 황족 신분으로 복귀하고 싶은 옛 황족 가문들의 입장에서도, ‘내친왕 한정 여성 미야케’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생전에 토모히토 친왕은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과는 달리 여자 덴노나 여계 덴노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하며, “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자만이 덴노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대놓고 말하고 다녔다. 아키코 공주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여계 덴노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나, 이러한 의견 표명은 제법 오래 전의 일이라 현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다.

[1]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지만 식물이 아닌 경우도 있으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2]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의 사촌동생[3] 덴노의 자녀와 황태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노미야(宮)’라는 이름. 황태자에 책봉되기 전(장남), 결혼하여 새로운 궁호를 받기 전(차남 이하), 시집가기 전(딸)까지 쓰인다.[4] 다만 1947년 이전의 황실전범에서는 덴노의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고 했다.[5] 아키코 공주의 어머니 노부코 비뿐 아니라, 황족과 결혼한 사람들은 (남녀 모두) 집안 배경과 능력이 뛰어나다. 미치코 상황후, 마사코 황후 등을 참조. (마코 공주와 결혼하려는 코무로 케이는 제외하고) 가쿠슈인 대학 경제학부 교수의 딸인 키코 비가 제일 처진다고 할 정도이다.[6]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 상황후의 친가인 쇼다(正田) 가문은 재벌이고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이다.[7] 롯데그룹 신동주, 신동빈 형제도 쇼토유치원에 다녔다.[8] 사촌 여동생들인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는 아예 가쿠슈인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고, 쇼토유치원을 졸업한 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했다.[9] 요코 공주가쿠슈인 여대를 졸업했다.[10] 쓰구코 공주는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중퇴하고 귀국했다. 일본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이유는 “아버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사망 후로 다카마도노미야 일가에 주어지는 돈이 줄어들어, 해외유학비를 부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쓰구코 공주의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이 진짜 이유라고 전해진다.[11] 마코 공주의 아버지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아키코 공주의 6촌 오빠이다.[12] 황족으로서의 공무가 우선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근무 시간이 긴 상근 연구원으로는 일하지 못한다고.[13] 결혼생활 말년에는 별거설도 있을 정도였다. 황족 체면에 대놓고 이혼은 할 수 없었기 때문.[14] 미야케#s-3의 당주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면, 당주의 아내가 남편의 뒤를 이어 당주 자리를 물려받는다.[15] 사촌제부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의 모교이다. 구니마로는 고쿠가쿠인대학 신토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즈모타이샤 신사신관이 되었으며, 2014년 다카마도노미야 노리코 공주와 결혼했다.[16] 이때 아키코 공주는 교토의 거처에서 지내고 있었다.[17]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 내외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일본 황실에서 그나마 개방적이고 활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노리히토 친왕 내외의 차녀 센게 노리코가쿠슈인 대학 시절에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방한한 적이 있다.[18] 쇼와 덴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4형제와 그 처자식들.[19] 신적강하라고 한다. 현재는 ‘황적이탈’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한다.[20] 1965년 11월 30일,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58세) 탄생.[21] 2006년 9월 6일,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17세) 탄생. 현재 일본 황실에 남자아이는 히사히토뿐이다.[22]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55세), 1981년 12월 20일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42세), 1983년 10월 25일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40세), 1986년 3월 8일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38세), 1988년 7월 22일 센게 노리코(35세), 1990년 9월 15일 모리야 아야코(33세), 1991년 10월 23일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32세), 1994년 12월 29일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29세), 2001년 12월 1일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22세)[23] 일본에서는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사촌끼리도 결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 친왕을 결혼시키자는 의견도 간혹 있다.[24] 나루히토 덴노 내외가 황태자 시절에 하던 공무와, 후미히토 친왕 내외가 하던 공무.[25] 공주들은 시집가면 평민이 되어버리고, 대대로 아들이 귀하여 남자 황족의 수도 적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