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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寛仁 / Tomohito
1946년 1월 5일 ~ 2012년 6월 6일 (6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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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호칭
3. 약력
4. 결혼
4.1. 자녀
4.2. 결혼 생활
5. 이슈메이커
5.1. 매스컴 노출
5.2. 자위대 음악제 출석
5.3. 황적이탈선언
5.4. 여계 인정 반대
5.5. 조선학교 학생과의 싸움
6. 투병과 사망
7.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의 황족. 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 나루히토 천황의 당숙. 아소 다로일본 총리 는 그의 처남. 젊어서부터 수염을 기르고 다녀서 '''수염 전하(ヒゲの殿下)'''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2]

2. 호칭


장남인 관계로 미카사 궁가(미야케#s-3)의 당주 자리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해 두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이나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 달리 궁호를 받지 않았는데,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는 바람에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 아닌 불효를 저질렀다.
따라서 그의 정식 호칭은 그냥 '''토모히토 친왕(寬仁親王)'''이다. 일부 언론에서 '''미카사노미야 토모히토(三笠宮 寬仁)'''라고 쓰는 경우가 있지만, 궁호는 궁가의 당주 개인에게만 붙는 게 원칙이고, 토모히토는 미카사노미야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궁호가 붙지 않는 게 원칙이다. 따라서 '미카사노미야 토모히토 친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
예전에는 친왕가를 이을 아들에게 '와카미야(若宮)'라는 칭호를 붙였으니, 굳이 궁호를 쓰겠다면 '미카사노와카미야(三笠若宮)'가 맞다. 아니면 '三笠宮家の寛仁親王(미카사 궁가의 토모히토 친왕)'이라고 쓰던지… 히사히토의 경우도 마찬가지. 하지만 '와카미야'라는 표현은, 황실의 규모가 확 줄어든[3] 2차대전 패전 이후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현재 궁내청에서는 궁가의 당주 여부에 상관없이 궁호를 빼고 그냥 '''XX 친왕 전하'''라고만 한다.
토모히토가 문제 삼았던 건, 당주인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궁호를 붙이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황족에 대한 경칭은 '''"전하"'''인데, 이걸 놔두고 그냥 '''"XXさま(님)"'''이라고만 하는 현실. 참고로 2차대전 이후 언론에서 황족에 대한 경칭 사용이 많이 완화되어, 웬만한 매스컴에서는 공식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딱딱한 경칭보다 '''"XXさま(님)"'''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다. 물론 산케이신문을 비롯한 우파 계열에서는 꼬박꼬박 경칭을 사용한다.

3. 약력


  • 1946년 1월 5일 출생
  • 1966년 1월 5일 성년식(만 2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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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이(三井) 클럽에서 열린 토모히토 친왕의 성년식 때 미카사노미야(三笠宮) 일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첫째 고노에 야스코, 넷째 센 마사코, 셋째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어머니 유리코 비, 막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둘째 토모히토 친왕,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

  • 1970년부터 2년간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1975년에는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 세계해양청소년대회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 자식이 없던 그의 막내 큰아버지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4] 친왕의 영향으로, 장애인 복지 및 체육진흥관련사업에 관여했다. 또한 영국유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영(日英) 협회 명예총재를 지냈고, 훗날 나루히토 황태자와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영국에 유학하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 총각 시절에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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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의 혼잣말>
  • 2012년 6월 6일 오후 3시 35분, 다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 타계 당시 그의 황위계승 순위는 6위였다. 막내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이미 2002년에 사망하여, 그의 후순위 계승자는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뿐이었으나 문제는 그 요시히토 친왕도 독신인 상태에서 2014년 타계하면서 사실상 미카사노미야 가문 남성 계통은 사라졌고 최소 1세대~2세대 후면 절손 확정이 되어버렸다.

4.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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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살 연하의 아소 노부코와 결혼했다. 노부코는 아소 시멘트 회장인 아소 타카키치(麻生太賀吉)의 딸로, 그녀의 큰오빠가 바로 아소 다로이다. 위 결혼사진의 얼굴을 보면 확실히 아소 다로의 모습이 보인다.
노부코의 외할아버지는 요시다 시게루이며, 어머니는 아소 카즈코(麻生和子)이다. 카즈코의 외할아버지, 즉 시게루의 장인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5]화족이자 정치인이었다. 1936년 2.26 사건 때 카즈코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군인들로부터 습격당했는데, 그들과 맞서 총격전까지 벌이면서 무사히 외할아버지와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고조할아버지는 근대 최초의 총리, 증조할아버지는 유력 정치인이었고 할아버지도 총리, 오빠도, 손위올케의 사돈어른[6]도 총리. 대단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셈. 게다가 본인은 황실로 시집가 왕자비가 되었다.
노부코는 쇼토(松濤) 유치원에 이어 가톨릭 미션스쿨세이신 여학원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했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Rosslyn House College[7]를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자신이 다녔던 쇼토 유치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사실 노부코가 17세이던 1972년에 26세의 토모히토 친왕이 청혼했으나, 시집가기에는 아직 어려서 8년 뒤에야 결혼했다. 두 딸 아키코 여왕(彬子女王)과 요코 여왕(瑤子女王)을 낳았다.[8]

4.1. 자녀


  • 장녀 아키코 공주: 1981년 12월 20일생(42살).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사학과[9]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유학을 떠나 일본 미술품 및 미술사를 공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토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큰딸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2016년에는 고쿠가쿠인(國學院)[10] 대학의 특별초빙교수로 취임했으며, 강의도 하고 일본 문화 관련 단체의 일도 맡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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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노부코 비. 왼쪽의 아기가 차녀 요코 공주, 오른쪽의 아기가 장녀 아키코 공주이다.

4.2. 결혼 생활


아내인 노부코 비와의 관계가 좋지못해 결혼 말년쯤부터 별거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아래에도 나와 있지만 토모히토는 노부코 비와의 별거 소문, 알코올 중독여성 천황과 여계 계승을 반대하며 "후궁을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계로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그런 말만 들으면 꽤나 가부장적인 듯하다. 그러나 평소 똑똑한 큰딸 아키코 공주를 자랑스러워했고, 아키코 공주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아키코 공주도 아버지의 충고를 잘 따르고, 어머니 노부코 비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장례식과 제사를 주관하는 걸 봐서는, 딸들과 사이가 나쁘진 않은 듯하다.
한편 노부코 비는 남편의 장례식과 제사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사실상 이혼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5. 이슈메이커



5.1. 매스컴 노출


1975년에는 심야 라디오 방송인 올나이트 닛폰 DJ를 맡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황족으로서는 유일무이했던 일. 비슷한 시기에 테츠코의 방이라는 유명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거나, "사촌형수 미치코 황태자비가 더 이상 아들을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을 했다. 사실 사촌형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자기는 행운의 7을 좋아하는데, 본인 계승권이 7위 밖으로 밀려나기 싫어서"라는 농담조의 말이라는 식으로 넘어갔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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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자위대 음악제 출석


우익적 성향을 보여주듯, 1981년 11월에 자위대 음악제에 출석하겠다고 했다가 난리가 났다. 그간 일본 황실자위대는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를 깨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군대사열과 다르게, 음악제는 개인홍보행사의 성격이 짙어서 토모히토 친왕 & 노부코 비 부부를 행사 주빈이 아닌 특별 게스트로 하는 걸로 타협을 봤다.
그의 응접실에는 쇼와 덴노의 사진이 있고, 공개석상에서 "쇼와 덴노를 제일 존경한다"고 개드립치는 걸 보면 최소한 우파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모히토 친왕이 친하게 지내는 주변인물들을 봐도 마찬가지. 애시당초 토모히토 친왕의 아내 노부코 비의 오빠 토모히토 친왕에게는 손위처남이 우익계통의 정치인 아소 다로.

5.3. 황적이탈선언


1982년, "복지 사업에 힘쓰겠다"며 황적이탈 선언을 해서 일대소동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 밝힌 이유는 황족 신분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제약받는다는 것. 결국 무산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오랫동안 그의 유별난 성격 탓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2014년 그의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이 타계하면서, 이 무렵의 그와 연관된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요시히토 친왕의 가쿠슈인 동창생이 언급한 "국민의 세금으로 사는 주제에(税金で生活しているくせに)!!"라는 말을 듣고서 충격을 받아 그랬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시절 학교에서 들었다는 '''세금도둑'''이란 말을, 이들 형제도 들었다는 것.[12]
그나마 활달한 성격의 토모히토 친왕은 좌충우돌하면서 이런저런 이슈를 만들어 내는 식으로 표현을 하곤 했는데, 이게 폭발한 것이 1982년 '''황적이탈선언'''이라는 것. 물론 일본 황실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게 쉽게 될 일은 아니었기에, 어디까지나 일종의 시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때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도 심적으로는 여기에 동조했으나, 내성적인 성격 탓에 잠자코 있었다고. 어차피 이들 형제는 황위계승순위에서도 밀려나 있었기에, 황실이라는 울타리를 많이 버거워했던 모양이다. 그 소동 이후로도 "젊고 멀쩡한데도 국가로부터 생계보조나 받고 산다"는 자학 멘트를 날린 적도 있다.

5.4. 여계 인정 반대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아들이 없자 대안으로 제시된 여계(女系) 미야케#s-3 인정에 반대한 바 있다. 천황의 여계 계승에 반대해 후시미노미야 등 구황족의 복적을 주장했다. 이 문제만큼은 나루히토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황족들도 보수적 입장에 있다고 보인다. 딸 아키코 공주도 여계 천황에 반대하고 아키히토 덴노도 다른 문제와 달리 이 문제만큼은 보수적인 입장인 게 현실. 다만 왕실에서 보기 드물게 우익 성향을 대놓고 드러냈다.
덧붙여 '''후궁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도 (자긴 대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덕분에 당연히 신나게 까였다.(…)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여계 계승을 추진했는데, 2006년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5.5. 조선학교 학생과의 싸움


2007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 때 조선학교 학생과의 인 연을 언급해서 생긴 일. 한국에서는 이 때문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가쿠슈인 재학 당시 야마노테선을 타고 등하교했는데, 조선학교 학생들은 가쿠슈인 교복을 보면 매일같이 항상 덤벼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일에서는 "재일교포 학생들과 패싸움한 걸 참 잘도 자랑스럽게 떠든다"고 비난한다. 그의 학창시절인 1960년대 초반이면, 일본에서 좌파학생운동이 절정에 치닫고 재일교포 북송에 한창이던 때다. 한편 이 때에 '''"황실은 거대한 스트레스 덩어리"'''라고 발언해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자위대 음악회 출석도 그렇고, 아버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3]에 빗대면, 그야말로 호부견자라고 할까.

5.6. 알코올 중독


타모리의 회고담에도 등장하는데, 젊은 시절부터 말술로 유명했다고 한다. 부부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토모히토 친왕은 2007년부터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을 인정'''한 바 있다. [14] 부부관계는 좋지 않아서, 진작부터 별거상태라는 소문이 있었다. 장례식 때도 아내 노부코 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두 딸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만 나와 울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넘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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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히토 친왕의 장례식에서, 상복 차림의 장녀 아키코 공주(왼쪽)와 차녀 요코 공주(오른쪽).

6. 투병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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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히토 친왕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촌 형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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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황태자와 서양식 상복을 차려입은 마사코 황태자비, 두 딸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
1991년부터 식도암으로 투병하다가 2012년 세상을 떠났다. 10년 동안 대수술을 '''14번'''이나 받았다. 2010년경에 아예 성대 적출수술로 목소리를 잃고, 목에다 스카프를 감은 채 전자 인공후두로 목소리를 냈다.[15] 황족은 병원비를 국비지원해서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가정이 박살났을 것. 결국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3형제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고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도 2016년 10월 27일 100세의 나이로 작고하면서, 결국 부계로 이어지는 적통이 끊기고 말았다.
큰딸 아키코 공주는 시집가지 않고 평생 왕족으로 살며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킬 계획이라고 하며, 작은딸 요코 공주는 언니처럼 독신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다. 토모히토 친왕이 죽은 후로, 두 딸은 아버지가 생전에 하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자위대 행사 참석 등의 우익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7. 관련 문서



[1] 그가 주당이라는 이유로 2ch에서 실제로 쓰이는 표현. 토모히토 친왕이 계승할 것으로 예정된 궁호 미카사노미야(三笠宮)와 같은 발음으로 토모히토 친왕 본인이 공식 인증했다.[2] 반대로 다카히토 친왕의 막내아들인 노리히토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3] 1947년에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귀족)들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신적강하라 한다.[4]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3남. 자식이 없는 이유는, 노부히토 친왕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5] 본래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인데, 마키노 가문의 양자입양되어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다.[6] 아소 다로의 아내는 스즈키 젠코 총리의 딸이다.[7]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Rosslyn House College를 신부학교(花嫁學校)라고 표현하고 있다. [8]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남자는 친왕/왕). 토모히토 친왕의 두 딸 아키코요코다이쇼 덴노의 증손녀이기 때문에 여왕 지위를 받았다.[9] 나루히토 황태자도 가쿠슈인 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10] 아키코 공주의 사촌 여동생인 센게 노리코의 남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가 고쿠가쿠인 대학 신도학과 출신. 구니마로는 졸업 후 신사신관(神官)이 되었다.[11] 토모히토 사후 미치코 황후가 남편과 같이 생전 퇴위를 해서 미치코 상황후가 되는 수백년 만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사실은 황실 내 미치코에 대한 견제와 궁내청의 무능함을 돌려서 비꼬았을 가능성이 크다. 본인도 황적이탈 하겠다고 제대로 폭발한 이력이 있고...[12] 가쿠슈인에서 황족과 함께 수업을 듣는 고가쿠유(御學友)로 있을 정도면, 보통 집안의 자제는 아니다.[13] 다카히토 친왕은 생전에 가명을 쓰고 사령부 참모로 중국 전선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그때 중국에서의 일본군이 저지른 각종 만행을 직접 보았기에 전쟁이 끝난 이후에 "난징대학살이나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하는 등, 전쟁 중 잔학행위에 대해서 전면 부정하는 극우파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주었다.오죽하면 이때 해당 발언 때문에 '빨갱이 왕자'라는 별칭이 붙고, 한동안 미카사노미야 저택 근처에서 극우들이 항의시위를 했을 정도.[14] 실제로 이렇게 인사했다(…).[15] <사우스파크>의 등장인물 네드 거블란스키가 차는 게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