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순례

 


王循禮
? ~ 1485년(성종 16)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조선 문종~성종 시기의 개성 왕씨 후손. 왕씨 제거 이후에 발견되어 조선 왕조로부터 손님의 예로 대우받으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살 수 있게 된다.

2. 생애


왕순례의 원래 이름은 왕우지(王牛知)로 고려 현종의 후손[1]인 왕휴(王休)의 손자이고, 왕미(王美)의 아들이다.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최초 거주지는 충청도 공주목. 친모는 1463년(세조 9)에 상을 당해 기년복을 입었으며 또 양모가 따로 있었다.
조선에서는 유교 예법을 중시했기 때문에 제사 역시 중요한 행사였고, 특히 유교의 성군은 선대 왕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됐다. 개성 왕씨의 경우 건국 초기에는 공양왕의 동생 왕우가 그 제사를 담당했으며 여러차례 왕씨 몰살의 참화를 피해갔지만 1차 왕자의 난때 그의 딸이 무안대군 이방번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아들들이 몰살당했다. 태종 뒤의 세종이 고려 왕실의 후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러다가 태종의 손자인 문종 시기에 와서 발견된 것이 바로 왕순례다.
문종은 왕씨의 후손을 찾게 했고 그 결과 1452년(문종 2) 3월 4일, 당시 충청도 관찰사가 공주목에서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우지를 찾아내어 역마를 비롯해 의복·갓·신발·안장 얹은 말·쌀·콩 등을 하사했으며#, 직후에 왕우지를 한양으로 불렀다. 그러나 문종은 같은 해 5월 14일 죽었고#, 단종이 즉위한 뒤에 의정부에서 다시 의논한 끝에 왕순례의 처우가 결정됐다. 왕순례는 공주에서 숭의전(崇義殿)으로 승급된 고려 태조의 사당이 있는 경기도 마전군(지금의 연천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같은 해에 황표정사로 봉상대부와 소윤(정4품) 아래 등급의 숭의전 부사(副使)에 임명된다. 제사를 지내는 비용을 대기에 충분한 밭과 봉록을 받고, 높은 관직도 받았다. 순례라는 이름도 이 시기에 받는다.
1459년(세조 5) 본처를 내치고 첩을 총애하며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군다는 이유로 첩과 헤어지고 처벌을 받는다. 끝내 본처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하고 서자밖에 없던 것은 본처와의 소원함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4년 뒤인 1463년(세조 9) 복직한다.
1465년(세조 11) 세조에게 불려 태조비 신의왕후를 모신 문소전의 초하루 제사에 참가했는데, 세조는 왕순례가 직위가 낮더라도 왕실의 빈객으로 예우해 2품 아래에 앉는 대우를 받는다. 그 외에도 세자의 생일잔치(세조 12년, 세조 13년), 종친과 재상들, 당직 호위병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자리(성종 2년), 회례연(성종 7년, 성종 8년) 등에 참석했다.
1467년(세조 13) 행 숭의전사(行崇義殿使)에 임명된다.
1478년(성종 9), 왕순례가 성종에게 글을 올려 자신이 왕휴의 친손자로, 왕휴의 외손자이며 자신의 고종사촌인 이영상이 몰아서 받은 조부의 노비를 적실인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482년(성종 13) 왕순례가 다시 글을 올리자 경연을 마친 자리에서 성종이 대신들과 이를 논의하게 됐다. 조부 왕휴가 죽은 뒤에 왕순례는 자신이 왕씨의 후손임을 밝히면 화제가 될 것을 우려해 처음부터 노비를 포함한 재산 등을 상속받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 왕조로부터 인정을 받은 뒤에서야 이를 논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왕휴는 첫번째 부인 권씨에게서 이영상의 모친을 얻었고, 뒤에 들인 부인 오씨에게서 왕순례의 부친인 왕미를 얻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오씨가 왕휴의 첩인지 후처인지 하는 것이다. 사실 앞서 이영상과 왕순례의 첩의 아들을 취조한 문서와 이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올릴 문서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 취조문은 찢겨 없어진 상태였다. 승정원의 관리들은 파손된 취조문에 따르면 왕순례가 첩의 아들임이 명확했다고 하는 반면 왕순례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사헌 김승경은 예조나 실록을 통해서도 그 진위를 알 수 없었다고 밝혔다.
결국 적첩의 여부는 따로 가리지 않고 이전의 공사(公事)에 따라 시행하도록 했다.
1485년(성종 16) 죽고 종2품 실직의 예에 맞춰 부의를 내렸으며 숭의전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왕순례의 첩의 아들 왕천계(王千繼)에게 맡기게 했다. 왕순례의 후손은 손자 왕적 이후로 단절됐다.

3. 기타


동시대에 살았던 같은 왕씨 왕방연처럼 왕씨 학살이 한창 진행중일 때 태어나 숨어살다가 문종의 명으로 왕씨 학살이 중단된 후 세상에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순례는 세상에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유정난이 일어나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수십년 전 자신들의 왕을 몰아내어 왕좌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충신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자기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씨를 말리다시피하고 잘 나가던 왕조가 다시 골육상쟁을 벌이며 왕을 몰아내어 왕좌를 찬탈하고 충신들을 무더기로 죽이는 것까지 전부 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 덕종이나 정종, 문종 등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종의 아들 정간왕의 후손(평양공파)으로 보인다. 덕종은 아들이 없었고 정종은 아들이 요절했으며, 남은 것은 문종과 정간왕 뿐인데 정간왕의 후손이 '''매우''' 번창했다. 고려사 열전 종실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것도 정간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