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삼각
二王三恪
동아시아사에서 선양 등으로 양위를 받은 황제가 이전의 제실을 우대해주는 조치를 뜻하는 중국식 한자어다. 《예기》 교특생(郊特生)편에, 선대 두 왕조의 후예의 혈통을 보존하는 것은 옛 어진 임금의 혈통을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보인다.[1]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전통으로, 과거의 성군을 기리고 그들의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럴듯한 작위와 함께 실제로 땅을 조금 떼어주고, 그 땅의 수익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건국 초기에는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찾는데도 도움이 된다. 대부분 왕조의 후손들은 실권과는 한참 떨어져 정치적으로 관심을 받는 일이 드물었지만, 반란 모의에 이름이 오르내리거나, 실제로 반란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왕삼각의 삼각(三恪)은 주무왕이 선대 세 왕조의 후손을 제후로 봉해 대우했던 것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하의 제후 중 '''황제·요·순(축·계·진)''', 또는 '''순·하·상(진·기·송)'''[2] 의 3대를 가리킨다.
당나라에서는 수나라와 북주 황실의 후예를 각각 휴국공과 개국공으로 봉하고 '이왕후(二王後)'라 불렀다.
후주의 공제 시종훈이 조광윤에게 양위한 뒤, 조광윤은 시종훈을 정왕에 봉했다. 시종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자 조광윤은 애통해하면서 황제의 예로 장사지내고 시씨를 보호했다. 이후 후주 시씨 황실은 송태조의 유명으로 송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우대받았고, 시씨 또한 송나라가 멸망할 때 최후를 같이 했다.
조선에서는 삼각의 예를 따라 팔전을 세우고 선대 여덟 왕조[6] 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조선 성립 직전의 고려 왕실에 대해서는 팔전이 정립되기 전부터 작위를 내리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왔다.
진짜 군주는 천황이지만 일본 무사 정권 지도자 또한 실질적 군주로 분류되므로 여기에 등재한다.
1. 개요
동아시아사에서 선양 등으로 양위를 받은 황제가 이전의 제실을 우대해주는 조치를 뜻하는 중국식 한자어다. 《예기》 교특생(郊特生)편에, 선대 두 왕조의 후예의 혈통을 보존하는 것은 옛 어진 임금의 혈통을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보인다.[1]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전통으로, 과거의 성군을 기리고 그들의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럴듯한 작위와 함께 실제로 땅을 조금 떼어주고, 그 땅의 수익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건국 초기에는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찾는데도 도움이 된다. 대부분 왕조의 후손들은 실권과는 한참 떨어져 정치적으로 관심을 받는 일이 드물었지만, 반란 모의에 이름이 오르내리거나, 실제로 반란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2. 이왕삼각으로 우대된 사례
2.1. 중국
2.1.1. 주나라
이왕삼각의 삼각(三恪)은 주무왕이 선대 세 왕조의 후손을 제후로 봉해 대우했던 것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하의 제후 중 '''황제·요·순(축·계·진)''', 또는 '''순·하·상(진·기·송)'''[2] 의 3대를 가리킨다.
- 신농 : 주무왕이 신농의 후손을 초나라(焦)에 봉했다.
- 요(삼황오제) : 주무왕이 요임금의 후손을 계나라(薊)에 봉했다.
- 상나라 : 주무왕이 주왕의 아들 무경을 상나라의 수도 은(殷)에 봉하고, 주왕의 이복 형 계를 송나라(宋)의 공(公)으로 봉했다. 무왕 사후 무경은 은(殷) 인근의 관(管), 채(蔡), 곽(霍)에 봉해진 주무왕의 동생들과 함께 곧바로 반란을 일으키고, 섭정인 주공 단에.의해 제거된다. 계의 가계는 전국시대까지 이어진다.
2.1.2. 한나라
- 흉노 : 흉노 번왕 휴저왕(休屠王)의 장남 김일제는 곽거병이 이끄는 전한 군대에게 포로로 끌려가 노비가 되었으나, 한무제 암살 시도를 막은 공으로 거기장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으며, 이후 김씨 성을 받고 투현 지방을 하사받아 열후(列侯)가 되었다.
2.1.3. 삼국시대
2.1.4. 서진
- 조위 : 진무제가 조환을 진류왕으로 봉했다. 진류국은 서진과 동진을 거쳐 유송대까지 존속했으나 유송을 멸망시킨 남제 때인 고제 건원(建元) 원년(479) 8월 계사일에 폐지되었다.
2.1.5. 당나라
당나라에서는 수나라와 북주 황실의 후예를 각각 휴국공과 개국공으로 봉하고 '이왕후(二王後)'라 불렀다.
2.1.6. 요나라
2.1.7. 송나라
후주의 공제 시종훈이 조광윤에게 양위한 뒤, 조광윤은 시종훈을 정왕에 봉했다. 시종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자 조광윤은 애통해하면서 황제의 예로 장사지내고 시씨를 보호했다. 이후 후주 시씨 황실은 송태조의 유명으로 송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우대받았고, 시씨 또한 송나라가 멸망할 때 최후를 같이 했다.
2.1.8. 금나라
- 요나라 : 요나라 멸망 후 천조제는 금나라 황실에 의해 해빈왕(海濱王. 바닷가에 사는 왕이라는 조롱의 의미)으로 봉해졌으며, 천조제의 후손인 요나라 황실 직계 후손들은 금나라에 의해 나라를 잃은 후에도 금나라 황실에게 전 왕조 후손 자격으로 대접을 받았으나, 결국 해릉양왕 치세에 멸족되어 대가 끊어졌다. 요나라 황실의 방계 후손들 또한 해릉양왕 치세에 숙청을 피해 숨어 사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으나, 해릉양왕 사후 금세종 치세에 복권되어 금나라의 관리로 일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2.1.9. 청나라
- 명나라 : 청나라 황실은 1724(옹정 2)년, 대간왕(代簡王) 주계(朱桂: 주원장의 13번째 서자)의 12대손인 주지련(朱之璉)을 연은후(延恩侯)에 봉하여 명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신해혁명까지 11대에 걸쳐 작위를 세습하였다.
- 정씨 왕국 : 대만 정씨 왕조 일가는 청나라에 항복한 후에도 명예를 인정받아 중국 대륙에서 괜찮은 대접을 받으며 살아갔는데, 마지막 왕이었던 정극상이 청나라 황실로부터 해징공 작위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
2.1.10. 중화민국
- 청나라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는 청나라 소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구 청나라 황실을 우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1924년에 청나라 소조정이 폐지되었으며, 1931년에는 장제스가 선통제에게 청나라 소조정 부활을 제안하였으나 이내 거절당했다.
2.1.11. 중화제국
- 몽골 제국 보르지긴 왕조, 청나라 :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세워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건국 초기의 중화민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구 청나라 황실 및 몽골 팔기 소속 보르지긴 씨족에 대한 대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2.1.12. 중화인민공화국
- 몽골 제국 보르지긴 왕조 : 몽강연합자치정부를 세운 것 때문에 전범 신분으로 수감되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특사된 후 자서전을 집필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내몽골 인민위원회 참의가 되었다.
- 청나라, 만주국 : 1964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동시에 만주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이기도 했던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만주족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로도 가문의 후계를 이은 이복동생 푸런(진유즈)과 그의 아들인 진위장도 계속 정협 대표 활동 경력을 이어 가고 있어 청황실 가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보호 속에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2.2. 한국
2.2.1. 신라
2.2.2. 고려
- 신라 : 고려 태조가 경순왕을 신라의 전 수도 경주에 봉하고 낙랑왕(樂浪王) 작위를 내렸다. 경순왕의 자식들이 낙랑왕의 작위와 봉지를 승습하지는 않았다. 실직군왕의 예를 보면 후손들도 군왕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2.2.3. 조선
조선에서는 삼각의 예를 따라 팔전을 세우고 선대 여덟 왕조[6] 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조선 성립 직전의 고려 왕실에 대해서는 팔전이 정립되기 전부터 작위를 내리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왔다.
- 고려 : 조선 태조가 공양왕의 동복동생 왕우(王瑀)를 기내 마전군(麻田郡)에 봉하고 귀의군(歸義君)의 작위를 내려 고려 왕조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태조는 왕우의 두 아들은 외가의 성 노(盧)씨를 쓰게 하고는 왕씨를 몰살했는데, 왕우 등 삼부자를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게 했다. 왕우의 아들 노조(盧珇)는 왕우 사후 귀의군을 습봉하고 왕씨로 복성해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왕우의 두 아들은 태조 7년(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모두 죽는다.
제사는 잠시 중단됐으나 문종이 처음으로 고려 태조의 제사를 위한 숭의전을 세우고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휴(王休)의 손자 왕우지라는 인물을 찾았다. 단종은 왕우지에게 왕순례라는 이름을 주고 숭의전사(崇義殿使)로서 제사를 잇게 했다. 전(殿)의 관직은 감, 영, 수, 부사로 나뉘었으며, 한 명만 임명돼 승진을 거치는 방식이다. 숭의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은 빈객의 예, 삼각(三恪)의 의전으로 대우받았다.
왕적 사후 후사를 이으려는 왕씨가 많아서 조정에서 왕희를 왕씨의 적통으로 삼기로 정했다. 그러나 사실 왕희는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닌 전주 왕씨였음이 밝혀졌고 이를 밝혀낸 왕훈(王勳)이 정파가 되어 그 후손이 숭의전에서 봉사하게 됐다. 왕훈의 후손이 고종 시기까지 11대에 걸쳐 제사를 지냈는데, 왕희의 후손이 또 기어들어와서 참봉에 임명되니 암행어사 이헌영에 의해 발각돼 파면됐다.
왕적 사후 후사를 이으려는 왕씨가 많아서 조정에서 왕희를 왕씨의 적통으로 삼기로 정했다. 그러나 사실 왕희는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닌 전주 왕씨였음이 밝혀졌고 이를 밝혀낸 왕훈(王勳)이 정파가 되어 그 후손이 숭의전에서 봉사하게 됐다. 왕훈의 후손이 고종 시기까지 11대에 걸쳐 제사를 지냈는데, 왕희의 후손이 또 기어들어와서 참봉에 임명되니 암행어사 이헌영에 의해 발각돼 파면됐다.
2.3. 일본
진짜 군주는 천황이지만 일본 무사 정권 지도자 또한 실질적 군주로 분류되므로 여기에 등재한다.
2.3.1. 에도 막부
- 무로마치 막부 : 아시카가 가문은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아들 아시카가 기진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본가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재로 간토쿠보에서 분열된 코가쿠보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딸 우지히메와 오유미쿠보 아시카가 쿠니토모가 결혼, 쿠니토모 사후에는 그 동생 요리우지와 결혼하여 영지에서 이름을 따와 키츠레가와씨(喜連川氏)를 칭하였다. 석고는 5천석에 불과했지만 겐지의 동량을 표방한 에도 막부에서는 겐지 일문/전대 막부 쇼군가라는 명분으로 우대하여, 석고 10만석격의 다이묘로 대우하였다. 마찬가지로 무로마치 막부에서 관령/관동관령을 역임하며 유력 중신으로 활약했던 호소카와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 역시 우대하여 호소카와와 우에스기의 역대 당주는 쇼군의 편휘를 받았다.
- 오다 정권 : 오와리 오다 가문은 혼노지의 변의 여파로 오다 정권이 멸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몰락하다시피 했으나, 훗날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가 오사카 전투 당시 에도 막부의 편을 든 공으로 우다 마쓰야마 번주로 임명되면서 불완전하게나마 재기에 성공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노부카츠의 직계 후손들이 오와리 오다 가문의 당주를 배출하고 있다.
2.3.2. 일본 제국
- 도요토미 정권 :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미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계 후손들을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 류큐 왕국 :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어 멸망한 후 류큐 왕국 쇼씨 왕가는 일본 제국의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 청나라 : 일본 제국은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을 승인함으로써 구 청나라 황실(=만주국 황실)을 명목상 극진히 대우하였다. 그러나 정작 선통제 본인은 일본인이 옹립한 괴뢰 황제라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만족하지 못하여 일본인들을 경계했다.
2.4. 몽골
2.4.1. 몽골 제국
2.4.1.1. 보르지긴 왕조
2.4.1.2. 아이신기오로 왕조(청나라)
2.4.2. 몽골 인민 공화국
- 복드 칸국 : 복드 칸은 담딘 수흐바타르로부터 몽골의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몽골 국가 주석이 되었다. 다만 실권은 공산당에 있었으며, 복드 칸 서거 후에는 몽골이 완전히 공화국이 되고 더 이상 새로운 대칸이 즉위하지 않음에 따라 몽골 제국 자체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같이보기
[1] 天子, 存二代之後, 猶尊賢也. 尊賢, 不過二代.[2] 우·하·은의 3대를 가리킨다는 설명도 많다.[3] 신찬(臣瓚)의 말에 의하면 위(衛)나라의 공자 자남미모(子南彌牟)의 후손이라고 한다.[4] 명칭이 여러 번 바뀌다 서기 37년 위공(衛公)이 되었다. 사마염의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후작으로 강등.[5] 다음 해에 살해되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이왕삼각의 예로 적절하지는 않다.[6] 단군조선+고구려, 기자조선, 백제, 신라(박씨, 석씨, 김씨), 금관가야, 고려.[7] 왕성원의 증조 이래 숭의전부사까지 오른 경우는 처음이다.[8] 이에 대해서는 야율초재가 자신의 공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많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래도 점령지를 통치하는 데 있어 매우 필요한 실무자들까지 전부 학살하여 몽골 제국을 단명시키는 꼴이 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좋게 평가할 수 있다. 당장 원나라가 멸망한 이유들 중 하나가 한족 왕조 및 다른 유목민계 중국 왕조에 비해 부족했던 통치력인데, 만약 몽골 제국이 야율초재의 조언을 전부 무시하면서 계속 실무자들을 학살했다면 몽골 제국의 통치력은 실제 역사보다 더욱 부족해졌을 것이며, 그에 따라 몽골 제국은 실제 역사보다 더욱 빨리 중원을 잃었을 것이다. 비록 실제 야율초재는 자신의 일방적 주장과 달리 몽골 제국 치하에서 대재상급 직위는 아니었을 거라고 추정되지만, 적에게 너무나도 극악무도했던 몽골 제국 윗선에 조금이나마 온건한 정복을 하라는 내용의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것만 해도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