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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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오거리와 왕십리역

往十里 / Wangsimni[1]
1. 개요
1.1. 지명 유래
1.2. 변화
2. 행정적인 왕십리
3. 관련 문서


1. 개요


넓게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서북부 지역을, 좁게는 행정동 왕십리도선동, 왕십리2동만을 이르는 지역이다. [2] 넓은 의미의 왕십리에 포함되는 법정동은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홍익동, 도선동, 마장동, 행당동, 사근동이며 왕십리로 중에서 왕십리뉴타운~한양대 구간이다. 넓은 의미의 왕십리 안에서도 두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경원선 선로를 기준으로 서북쪽은 왕십리, 경원선 선로 동쪽은 한양대 혹은 한대앞이라고 부른다. 다만, 마장동은 두 지역 중 왕십리라고 부르는 쪽이다.
원래 인근 성동구청한양대학교의 배후 상권으로 입지가 탄탄하긴 했지만 상습 침수지였으며, 신당동과 같이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원래 2호선, 5호선 환승역이기도 했으나 주민과 주변 직장인 및 한양대 학생 뿐 외부 유동 인구 유입이 거의 없었으며 초거대규모의 신역사가 건설되면서 대부분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바람에 주변 상권이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왕십리는 인근 뚝섬, 옥수동이 신 부촌을 형성하면서 비로소 그 혜택을 보고 있다. 왕십리의 위상을 가장 다르게 만든 것은 2012년의 분당선 개통으로, 강남구청까지 단 7분, 선정릉역까지 9분에 주파하게 되면서 왕십리가 각광받게 됐다. 중랑천변 공원 및 한양대학교 교정 등 녹지가 많은 장점까지 더해, 살기 좋은 거주지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1.1. 지명 유래


조선 초, 무학대사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지금의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북으로 행당산, 서로 매봉산, 동과 남으로 청계천이 흘러 명당으로 보고 지금의 한양대 캠퍼스 쪽에 도읍을 정하려고 생각하던 찰나에,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가면서 소에게 "야 이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하자, 무학이 깜짝 놀라 그 노인에게 가서 "혹시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아십니까?"하였더니 노인은 '''"북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보시오. 도읍이 될만한 터가 있을 것이오"'''라고 하고 노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학대사가 그 말을 따라 십리를 더 걸어 나온 곳이 지금의 경복궁이다. '''갈 왕(往) + 열 십(十) + 거리 단위 리(里) = "왕십리"'''가 된 것이다. 바로 옆의 청량리와는 달리 왕십리의 리는 "마을 리(里)"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동(洞)이름도 '''(상/하)왕십동'''이 아닌 '''(상/하)왕십리동'''이다.
노인이 사실은 도선대사의 혼백이었다는 전승도 있다. 무학대사경복궁 터를 보고 나서 '그런 곳을 점지할 사람은 도선대사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 동명 중에도 도선동이 있다. 무학대사의 이름도 인근 무학초등학교, 무학중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 하왕십리동 무학봉 등에 쓰이는 등, 도선대사와 무학대사에 관한 지명과 교명이 많다. 사극 용의 눈물 23화에서도 이에 관해 야사로서 소개한 에피소드가 나왔다.
그러나 명칭에 대한 위 유래는 신빙성이 그다지 없는데, 고려시대에 이미 인근 지역을 '왕심리(王深里)'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이 표기가 변화하여 현재의 왕십리가 됐다는 설이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3]. 한자표기 또한 현용 중인 往十里만 있었던 게 아니라 王十里[4], 王尋里 등이 섞여 쓰이는 등 이미 당대에도 중구난방이었다. 이 때문인지 왕'''심'''리는 현대 기준에서는 분명 오타인데도 오타로 취급되지 않는다[5].
그러나 도읍의 중심예정지였던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는 왕십리동이 아니라 행당동사근동에 걸쳐져 있다. 그러니 왕십리동이 경복궁에서 십리가 아니라 한양대 캠퍼스 부지가 경복궁에서 십리인 것이다.

1.2. 변화


예전에는 왕십리 지역의 중심지가 법정동, 왕십리동이었으나, 한양대가 왕십리로 연변에 터를 잡자 왕십리로를 따라서 한양대 앞까지 상권이 형성되었다. 왕십리역민자역사가 들어와 영화관과 쇼핑 구역이 형성되어있다. 1995년, 성동구광진구가 분구하고 구의동의 성동구청이 쫓겨나 왕십리역 앞에 자리잡게 되었고, 2008년 왕십리민자역사가 완공되자[6], 왕십리의 중심은 행당동에 있는 왕십리오거리 쪽으로 굳혀지게 됐다. 즉, 현재 대부분의 외지인이 부르는 왕십리라는 곳은 실제로는 왕십리동에 없고 다른 지역에 있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대표적인 서울의 서민 주택가였으나, 재개발로 인해 이런 서민 주택가들이 많이 사라졌다. 경원선 선로 주변의 판자촌이 있던 자리에는 서울숲더샾이 들어섰고, 왕십리도선동에는 왕십리뉴타운이 들어섰다. 나머지 지역은 아직도 서민 주택가들이 제법 있으나, 이런 곳들도 다수의 경우 재개발에 들어갔거나 재개발 준비 중이다. 또한 원룸업자들은 월세담합 + 기숙사 건립 반대, 가게 점주들은 가격인상을 통해 대학생들의 자산을 즐겁게 탐닉하고 있다. 여담으로 왕십리 지역의 가장 남쪽인 행당동에는 행당○○아파트라는 이름이 많았으나, 재개발 이후 아파트들은 가까운 행당동이나 왕십리 대신 좀 더 먼 서울숲을 넣어 서울숲○○아파트[7]로 이름짓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살아 숨쉬는 왕십리의 분위기를 서울시 홍보대사인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가 바이올린 곡으로 연주한 왕십리 아라리 영상이다.

2. 행정적인 왕십리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도선동, 홍익동 문서 참고.

3. 관련 문서



[1] 여기서 쓰인 '리'는 행정구역 단위로 쓰인게 아니기 때문에 자음동화를 반영한 로마자 표기를 써야한다. 로마자 표기법 참고[2] 성수동, 용답동 쪽은 왕십리와 가깝긴 하지만 같은 지역으로 포함하기에는 약간 이질감이 있어 왕십리라고는 안 부른다. 역사적으로도 현재의 성동구 중에서도 현재 왕십리라고 부르는 지역이 원래의 경성부 성동구(1936년 이전에는 고양군 한지면) 지역이고, 성수동은 고양군 뚝도면, 용답동은 경성부 동대문구(1936년 이전에는 고양군 숭인면) 지역이었다. 자세한 부분은 성동구 문서 참조.[3] 애초에 무학대사는 천도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륜이나 정도전 등에 의해 천도가 구체화되었다고. 물론 그런 거 다 떠나서 태조 이성계가 기득권이 꼴 보기 싫어서 천도하자고 떼쓴 게 가장 크다.[4] 이걸 직역하여 왕십리를 '킹스 크로스'라고 일컫는 개드립도 존재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여 런던,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킹스 크로스'를 한자로 직역하여 왕십리라고 부른다.[5] 심지어 정읍에는 진짜 왕'''심'''리가 있었다고 하니 이쯤되면 말 다 한 거다.[6] 출처[7] ex. 서울숲 더샵 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