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

 



'''하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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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7ㆍ9ㆍ11 代》'''
'''忠穆王 3年~
太宗 16年'''

'''제7대'''
'''1408.2.11~
1409.8.10'''

'''제9대'''
'''1409.10.11~
1412.8.21'''

'''제11대'''
'''1414.4.17~
1415.5.17'''


'''조선 초기의 역대 수상(首相)'''
7대 김사형

'''8대 좌정승 하륜
(1402 ~ 1404)
'''

9대 조준
9대 조준

'''10대 좌정승 하륜
(1405 ~ 1407)
'''

11대 성석린
11대 성석린

'''12대 좌정승 하륜
(1412 ~ 1414)
'''

13대 남재
13대 남재

'''14대 좌의정 하륜
(1415 ~ 1416)
'''

15대 유정현









河崙[1]
(1347 ~ 1416)
1. 개요
2. 생애
2.1. 기복이 심했던 관직 변천사
2.2. 태종의 킹메이커
2.3. 불도저 재상
2.4. 탐욕스러운 호정대감
2.5. 어쨌든 인생은 하륜처럼
3. 여담
4. 사극에서
5. 관련 문서


1. 개요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진양 하씨 4대손이며 고려 현종 때의 문신 및 무장이자 여요전쟁에서 활약했던 하공진[2]의 자손이다.
할아버지는 식목녹사 증 하시원, 할머니는 정균의 딸 증 정경부인 진주 정씨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증 진양부원군 하윤린, 어머니는 증 진한국대부인 진주 강씨이다. 하륜은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의 딸 진한국대부인 성주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1명, 딸 2명을 얻었는데 장남은 좌군도총제 하구이고 첫째 사위는 홍섭, 둘째 사위는 이승간이다.
일흔살까지 천수를 누리며 고려조선 두 왕조의 신하로서 충목왕 대부터 태종 대까지 아홉 왕의 시대를 살았으며 공민왕부터 태종까지 일곱 명의 왕을 섬긴 인물. 덤으로 2년만 더 오래 살았다면 세종의 즉위도 볼 수 있었다. 여담으로 정몽주보다는 10살, 정도전보다는 5살 어리나 이방원보다는 20살 많다.

2. 생애



2.1. 기복이 심했던 관직 변천사


순흥 부사를 지낸 하윤린의 아들로 정도전, 정몽주 등 신진 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이후 보문각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치다가 최영의 요동 정벌에 반대하면서 양주로 추방되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이성계 일파의 눈 밖에 나서 추방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실제 온건 개혁파이기도 했고 본인부터가 이인임의 조카사위[3]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4] 그래서 관직 변천사가 제법 파란만장하다.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이 고려 조정에서 대립하던 공양왕 시절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나가 있었고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태조가 개성에서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시작하자 풍수학설을 근거로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고 무악 일대(지금의 신촌 근교)를 새 도읍지로 밀었으나 정도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다'며 하륜의 주장을 대차게 깠다.[5] 오늘날의 경복궁 일대로 조정의 대세가 모아져도 끝까지 무악을 고집했으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2.2. 태종의 킹메이커


재주도 있고 출세욕과 성욕도 강했던 하륜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도전이 정계를 쥐고 있었고 사적으로도 한양 천도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에서 정도전에게 거의 모욕을 당하다시피해서인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정도전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말 같지만 '술수하는 자'라는 말은 유학자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다. '음양술수 같은 괴력난신이나 논하는 소인배'라는, 즉 사이비와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도전과 하륜은 이색 휘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이었는데 나중에 이색의 비문을 쓰다가 경을 칠뻔한 하륜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개국 이후 스승과 동문들을 가혹하게 대우했으니 하륜 입장에서는 정도전을 좋게 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정권에서는 하륜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고 정도전처럼 중앙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륜은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는데 민제를 통해서 이방원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원의 사람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어 종국에는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륜이 이 과정에서 한 일은 또다른 인재인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기도 했고 사병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이숙번의 병력을 1차 왕자의 난 때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당시 이숙번은 지안산군사(안산 군수)였는데 정릉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어 사역군을 이끌고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숙번의 사역군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기동 호위 병력이 될 수 있었다.
민담집에 의하면 하륜과 이방원을 떼어 놓기 위해 정도전이 하륜을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이방원이 하륜을 불러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은 취한 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빡친 이방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륜은 사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방원을 쫓아가 독대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책략을 진언했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하륜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진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 이방원)의 잠저[7]

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 이성계)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어쨌든 하륜이 이숙번을 추천하면서 그 병사를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있던 움직임을 피해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으며 정종이 즉위했을 때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마침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야말로 태종의 킹메이커.

2.3. 불도저 재상


태종 즉위 후 그토록 바라던 재상의 반열에 오른 하륜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아래 태종의 개혁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데 앞장섰다. 6조 직계제의 도입이나 도평의사사의정부로 개편하는 등의 정치 개혁, 관제 개혁에 직접 관여했고 태종이 실시했던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 제도 정비 등에서도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신문고 설치에도 일익을 담당했는데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주장이나 실효성이 있느냐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요지의 말로 비판들을 반박했다. 이외에도 저화(화폐)를 유통시키고자 태종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당시 상품 화폐 경제의 미발달로 실패로 끝났다.[8]
조선 초기의 법률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조선 최초의 법전은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이었으나 태조 6년 영의정 조준의 지휘로 경제육전을 새로 편찬하게 된다. 이를 속칭하여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원육전' 또는 중심 인물인 조준의 이름을 따서 '조준육전'이라고도 한다. 태종 7년 이두 혼용이었던 이 원육전을 하륜이 주도해 순한문화하며 논란이 되던 부분들을 다듬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속육전은 세종 시기에 이직황희에 의해 다시 수정되었고 경국대전의 바탕으로서 조선시대 법률 체계의 원형으로 자리잡는다.
태종의 뜻에 따라 고려사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도 감독했으며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의 편찬 주임이기도 했다. 다른 신하들은 왕자의 난 등 관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르다고 반박했지만 오히려 하륜은 '노성한 신하가 살아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되는거 아니냐'며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실록 편찬을 실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이듯이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 스타일은 전형적인 불도저 타입으로 일 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다고 한다. 일 처리 방식은 태종의 장인이자 친구인 민제까지 화나게 하여 민제가 "저러다가 정도전 꼴나지"라고 디스하게 된다. 이에 하륜은 "어차피 생사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하고 받아쳤다. 이후 민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다.
태종을 섬기며 정승 반열에도 올랐고 능력과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는 했으나 결국 무악 천도는 태종 밑에서도 이루지 못했다. 태종이 종묘에 들어가 돈으로 점을 쳐서 한양의 궁궐터를 정했는데 무악이 한양보다 더 낮게 나오고 만 것이다.
2번이나 운하 건설을 주장한 적이 있다.[9]. 본래 삼남(충청, 전라, 경상)에서 세금으로 걷혀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은 당시에는 섬이 아니었던 안면곶 앞바다를 지나 태안 반도를 돌아 올라가는 항로를 거쳐갔는데 안면곶과 태안 안흥항 앞바다, 강화도 일대의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배 수십 척이 한꺼번에 침몰하면서 손실되거나 바닷물에 젖어 못쓰게 되는 곡식들의 피해량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고려 시대 때부터 태안 반도의 좁은 지협을 굴착해 만과 만 사이로 항로를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하륜이 이때 완공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1412년 충청도 안흥량에 운하를 팔 것을 건의했는데 태종이 사람을 보내 주변을 확인하자 다녀온 이들은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하륜은 5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강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1413년 한강과 면해 있는 용산 포구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또 주장했지만 1412년 운하 건설 시도가 발린 것을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태종이 나서서 의견을 기각했다.
서얼금고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는데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참고로 하륜과 함께 무인정사에 가담하여 태종을 왕으로 만든 이숙번도 재가녀의 아들이고 태종을 지지한 의안대군 이화, 완산부원군 이천우, 완원부원군 이양우도 첩의 자손인데 쿠데타 동지들에게 굉장한 불이익을 주자는 저런 주장을 당당하게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봐야할지 아니면 용기가 가상하다고 봐야할지... 당연히 의안대군, 완산부원군, 완원부원군이 하륜에게 눈총을 주었으나 태종이 비호해주었다.

2.4. 탐욕스러운 호정대감


태종 휘하에서 신생국가 조선의 확립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행정을 처리하거나 정책을 입안하거나 정치적 판세를 짜는 부문에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큰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권문세족 시절의 버릇을 못고쳤는지 '''물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 일례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백 보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에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들을 낼름 집어삼켰다.[10]
또한 친인척들과 함께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전답을 개척한 후 은근슬쩍 자기걸로 해두고 해쳐먹었다가 탄핵당하기도 했고, 고려 시절 이인임 일파가 하던 뇌물수수에도 손을 댔는지 심지어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욕도 먹었다. 또한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자 일도 제대로 모르는 관리들을 추천했다가 태종에게 질책당하기도 했다고. 대간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지만, 그때마다 태종이 극구 하륜을 비호해줘서 무사히 넘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 인내심이 줄었는지 말실수를 자주 하여 태종에게 핀잔을 들은 적도 많았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처리할 때는 가볍게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건 옳지 못하다"는 태종의 지적에 기겁한 적도 있고 나중에 "세자도 아니고 '''겨우 왕자를''' 죽이려 한거니까 죄가 크지 않다"고 했다가 태종이 대놓고 '''그딴 개드립 다시는 치지 마라'''고 말해서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데꿀멍한 적도 있었고, 선위 파동 때는 민제를 찾아가 '전하 뜻이 정 그렇다면 선위하시라 합시다' 라고 했다가 들킨 적도 있다. 그리고 스승인 이색의 비문을 지을 때 조선의 건국과정을 부정적으로 적은 것이 들통나 거의 목이 달아날 뻔도 했지만 태종은 끝내 하륜을 지켜 주었다. 영의정을 지냈던 이직이 안치되는 일이 있자 하륜이 대놓고 태종의 결정을 비웃으며[11] 이직이 외방에 보내질 죄가 어딨냐고 디스를 하자 태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탐욕스러웠음에도 정작 하륜은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고 생각했다. 저서 호정집에서 인간의 본성은 인의예지신이라고 했다. 하륜의 주장은 후대의 이기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5. 어쨌든 인생은 하륜처럼


어쨌든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친구 민제의 아들들이나 이숙번, 이거이 등과는 달리 달리 공신으로서 부귀영화와 천수를 모두 누렸다. 고금의 예를 보면 보통 개국공신은 장자방처럼 아예 정치와 부귀영화에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은 토사구팽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는 법인데, 하륜은 용케 토사구팽을 피해갔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모사 라이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진짜로 오늘 내일하던 1416년에야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부원군 작위를 받고 그해 말에 함길도에 있는 조선 왕가 시조들의 무덤을 살피러 갔다가 객지에서 졸(卒)했다. 향년 70세. 하륜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몹시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직접 애절한 조사를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에 있는데 하륜 묘 뿐만 아니라 하륜의 부친과 조부의 묘도 있다. 이 묘들을 '오방리 팔각형 고분군'이라 하는데, 특이하게도 봉분이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형태라서 여말선초의 장례나 묘지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묘들이기도 하다.
실록은 하륜에 대해 "천성적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어 평생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서는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대왕은 하륜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12] 세종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평을 내리고 있다.

"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요약하자면 '''아버지가 단수가 높으셔서 쟤 데리고 일하셨지 나였으면 진작에 박살냈다''' 정도의 의미다. [13] [14]
임용한은 저서 <조선국왕 이야기>에서 그래도 하륜이 선을 지키면서 욕심을 부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하륜이 절제력이 뛰어나서 그런건 아니고, 당시 관료들에게 용인되던 수준이나, 더 욕심을 부리면 태종에게 목이 달아날 수준까진 넘지 않을 정도로 해먹었다는 의미. 그리고 '''하륜이 살면서 온갖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주로 재물을 해쳐먹은 일과 늙어서 태종의 정치쇼를 잘 못참아넘긴 일 뿐이고, '''혈연으로 연결되어 관련성을 피할길이 없었던 민씨 형제, 세자와 어울리고 뇌물을 바친 구종수 형제에게 얽히고 양녕 면전에서 태종의 정책을 비판한 이숙번과 달리 주군 태종 이방원이 극도로 혐오하던 외척짓거리, 귀족짓거리와는 끝까지 담을 쌓았으며, 언행의 실수는 했어도 태종이 숙청한 외척과 공신들의 주 레파토리이던'''네가 누구덕에 보위에 올랐느냐?''' 드립은 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다른 공신들과 달리 가능한한 오래도록 태종의 정치적 실무를 계속해서 주도함으로써 자신의 이용가치를 유지했다. 말년에 몇번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긴 했지만 역린을 자극하는 것은 끝까지 피하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태종이 더 건드리지 않은 건 태종보다 20살 더 나이가 많아서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면 이미 사망했을 게 뻔했던 것도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하륜은 태종보다 일찍 사망했다.

3. 여담


  •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륜은 죽기 직전에 꿈에서 태조가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나서 병이 나 죽었다고 한다. 사실 태조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조상의 묘를 돌아보러 왔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 기본적으로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천문이나 의술, 풍수, 지리 등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에도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사람의 관상도 볼 줄 알았다고. 용의 눈물에서 묘사된 하륜은 이런 면모를 강조하여 묘사된 셈이다.
  • 왕족이던 태종의 종친 이백온[15]이 하륜의 첩실을 탐내 하륜이 죽은지 얼마안돼 부하들을 보내 보쌈(...)하려다가 걸리자 그동안 이백온의 온갖 더러운 짓을 눈감아주던[16] 태종도 더 이상 봐주지 않고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 -
  •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바로는 태종의 목숨을 두 차례나 구한 은인이기도 하다. 태종이 아버지를 달래서 함흥에서부터 오게끔 하였는데 하륜은 아직 태조의 앙금이 다 가라앉지 않는것을 간파하여 태종에게 그에 대해 대비할 것을 일러주었고 그것이 적중하여 태종의 목숨을 구원했다고 한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이 서로 만나자,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동궁에 백우전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 뒤에 몸을 가려 화살이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것이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하려할때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친히 하지 말고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꺼내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1권 <태조조 고사본말>, 축수편
  • 하륜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인물로는 홍윤성이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하륜은 그냥 물욕이 좀 많았을 뿐이지 홍윤성 같이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패륜을 저지르는 식으로 넘어서는 안 되는 최후의 선[17]을 넘지는 않았지만, 홍윤성은 자기 권세만 믿고 무고한 사람들을 막 괴롭혀대면서 살인과 패륜까지 저지렀다. 야사에서는 살인마 정승이라 불릴 정도의 악행을 저질렀으니(...)[18] 그리고 그 다음 세종시대에 황희도 하륜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황희가 도승지였을때 하륜을 만난적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 그와 가까운 인물이 있다면 킹메이커라 볼 수 있는 한명회이다. 둘다 능력과 행정은 뛰어났지만 탐욕이 있었고 실질적 2인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 위치한 명승지 하조대는 과거에 하륜과 조준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만화가 마사토끼는 하륜의 기묘한 행적을 베이스로 한 단편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4. 사극에서


  •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신충식이 역을 맡았다. 꾀주머니라는 평이 맞도록 탐욕스럽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 역. 실록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정도전의 이미지도 모두 하륜에게 옮긴 냄새가 난다. 참고로 하륜을 맡은 신충식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원균이나 미우라 고로도 맡았던 배우이나 태조 왕건에서는 강직한 석총을 연기하였다.
  • 용의 눈물에서는 사극에서 강직한 배역을 자주 맡았던 임혁이 열연을 펼쳤다.[19] 아래 정도전에서와는 달리 어느 시점부터 이성계를 돕는 역할로 슬슬 갈아타기 시작했다.[20] 태종을 보좌하여 왕위에 올리는 지략가의 이미지가 매우 두드러지며 악연이자 정적 관계인 정도전을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편히 뫼셔 드리게나"라고 태종의 집사에게 부탁할 정도.[21] 그래서인지 탐욕스러운 모습은 크게 묘사되지 않았고[22] 오히려 강직하고 호탕한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는 민씨 형제에 대한 태종의 처분을 두고 이숙번이나 정승들 앞에서 "그들은 무고하게 희생된 것 뿐 아닌가?"라고 일갈. 그 말을 들은 이숙번이 몸 조심하란 식으로 반 협박을 하자 오히려 "천하의 이숙번 대감께서 이 하륜의 목숨을 걱정해주다니 별일이구만!"이라며 받아넘기는 모습도 보여준다.[23] 여기까지만 보아도 알겠지만 글자 그대로 킹메이커이자 지략가의 포스를 제대로 뿜어낸다. 그런 묘사와 배우 보정이 합쳐져서 실제 하륜이 가지고 있었던 탐욕스럽거나 경솔한 면모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제 갓 출사한 이숙번에게 도량이 좁아서 남의 집 모사꾼 노릇이나 할 만하지 재상감은 아닌 양반 이라는 평을 들은 바 있고, 실제로도 작중에서 정도전이 그야말로 한 국가를 설계할 수 있는 톱 오브 톱클래스의 천재라면 하륜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똘똘하고 충직한 참모 정도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쨌건 용의 눈물을 열렬히 시청한 세대들은 추억보정 때문에 실제 하륜의 이미지에 가까운 다른 배우들의 하륜보다 임혁 버전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 대왕 세종에서는 초반기에만 등장했는데 왕과 비에서 한명회 역을 맡았던 최종원이 배역을 맡았다. 처음 등장시에는 조그마한 떡을 먹고 다른 대신들에게도 권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얼마안가 자신을 찍어내려고 작정한 박은을 연거푸 엿먹이며 노회한 정객의 포스를 드러낸다. 오래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태종의 어전에서 나와 물러나는 23회의 퇴청 씬은 호평이 많았다. 이쪽의 하륜은 용의 눈물의 충신 하륜과 실제 역사의 하륜을 반반쯤 섞어놓은 듯한 모습[24]으로 태종을 위해 셀프 탄핵을 시전한 하륜에게 던지는 "그렇게 충심이 깊은 놈이 비리를 그따위로 저질렀냐?"는 태종의 질문이 이를 아주 잘 나타낸다. 이에 대한 하륜의 대답은 "전하를 왕위에 올려놓은 댓가로 그 정돈 챙겨도 된다고 생각했나봅니다." 그리고 셀프 탄핵 후 궁을 나설때까지도 박은을 제대로 놀려먹는다(...)[25]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전작에서 한명회 역할을 맡았던 조희봉이 연기하여 2015년 12월 15일 22회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책략으로 이성계와 삼봉을 견제하며 발휘하며 첫등장한다. 이인겸이 죽었다는 소식이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정도전그의 일파들의 관심을 죽은 이인겸에게 쏠리도록 만들고 이인겸의 이름을 이용해 창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재밌는 것이 훗날 하륜의 도움을 받아 왕자의 난으로 끝내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이방원이 첫 대면에서는 하륜에게 제대로 농락을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인데, 여기서 이방원과 하륜의 첫만남은 역대 사극 중 가장 최악의 관계로 시작했다.[26] 그런데 22회에서 보여줬던 지략이 무색하게 24회에서 이방원에게 털리고, 정도전에게 털리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한 건 여기 참조.

5. 관련 문서


[1] 1990년대 이전에 나온 역사책에는 간혹 '하윤'이라고 표기되어있기도 하다. 현행 맞춤법에는 하륜과 하윤 둘 다 맞다. 원칙적으로 이름(성씨 제외)의 첫 글자는 두음 법칙에 따라 두음으로 적게 돼 있지만, 외자인 경우 원음대로 적는 것도 허용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면 본인의 의사를 물어서 바라는 표기대로 적으면 되는데, 하륜은 옛날 사람이라 그에게 의사를 물을 수는 없으므로(...) 두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다만 현재는 하륜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듯하다.[2] 강조의 정변에 참여한 인물로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의 철수 교섭에 성공하였다. 이후 거란에서 탈출하려다 발각되어 친국을 당하고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여 살해되었으며 고려에서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하였다. 후일 '하공진 놀이'라 하여 하공진의 충절을 기리는 잡극(일종의 연극)이 예종 때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3] 이인임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4] 이색 이전에 학문을 배웠던 스승이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이어서 이러한 인연으로 조카사위가 되었다.[5] 하륜을 일부러 저격했다고 하기는 좀 그런게 사실 정도전이 한양 천도를 미는데 있어 진짜 난적은 하륜 따위가 아니라 한데 똘똘 뭉쳐 부소명당(송악)에 남자고 빼액대는 서운관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을 밀었던 정도전 이외에는 저마다 음양풍수를 가지고 논했으니 하륜도 싸잡아 까인 건 맞다.[6] 정도전은 무악 일대가 너무 좁다고 반대했다.[7] 즉위하기 전의 왕이 있던 집을 의미한다.[8] 이는 태종의 후계자세종대왕도 이루지 못했으며 뒷날에도 다른 왕들과 재상들이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의 화폐 유통은 먼 훗날 숙종 때에야 정착된다.[9] 하륜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편이었다[10] 그러나, 혹자는 이런 행위가 태종의 하륜에 대한 의심을 풀기 위한 처세술의 하나로 해석하기도 한다.동아비즈니스리뷰[11] 왕의 면전에서 말 그대로 '''피식 웃었다.'''[12] 그럴수 밖에 없는게 세종이 본 하륜은 리즈 시절이 아니라 말년에 삽질하던 모습이기 때문. 참고로 세종과 하륜은 서로 50살이나 차이가 난다.[13] 그런데 세종은 '''자기 집이 시끄럽다고 서대문까지 틀어막은 이숙번'''에 대해서는 의외로 하륜보다 좋게 평가했다. [14] 다만 세종의 이말은 자기부정이기도 했다. 세종 본인 또한 총신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온 힘을 다해 비호한 전력이 아주 화려한 왕인지라... 까놓고 말해 능력만 있으면 관리들의 인성적 결함은 끝까지 실드쳐준 건 세종이나 태종이나 부전자전. [15] ?~1419. 태종의 사촌(이성계의 이복형제인 이원계의 아들)들 중 하나로 왕자의 난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태가 불량하고 주색을 너무 밝혀 왕조 초기부터 저런 왕족이 있으면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다는 공신들의 권고를 자주 들었음에도 태종은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죄도 없는 머슴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다 죽이고 여색을 탐하는게 심해져서 결국 하륜의 첩실까지 탐내어 그가 죽은 직후 보쌈하다 걸리자 모든 특혜를 박탈당하고 유배당하여 초라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오래못가 죽었다. 참고로 이 작자의 이야기는 고우영의 '수레바퀴'에도 실려있다.[16] 다 눈감은 건 아니다. 1405년 이백온이 죄도 없는 여종의 남편을 잔혹하게 꼬챙이로 찔러죽이자, 대사헌 이래(李來) 등 대신들이 아무리 신분이 낮다고 해도 죄도 없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악귀같은 왕족은 왕조에 이로울 게 없다고 끈질기게 탄원해 곤장 20대를 치고 멀리 3년동안 유배를 보낸 바 있다. 헌데...지평(持平) 이흡(李洽)이 이백온을 묶어 호송하자 이걸 본 태종은 분노해 이흡을 하옥시켰다. 그러자, 이래는 "이흡은 맡은 일을 다한 것 뿐이온데, 왜 처벌하십니까?" 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태종도 분노해 "경(卿)은 이씨 나라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종친(宗親)을 이와 같이 대우하는가!”라고 화냈으나 이래는 굽히지 않고 “신은 종친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덕을 보필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래는 1400년에 회안대군(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태종으로부터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올랐고 나중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계림군(鷄林君) 칭호,즉 준왕족급 칭호를 받은 1등 공신이니 태종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이릅을 풀어줘야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먹을 거 잘 먹고 그렇게 이백온은 고생하지 않았다.... 이래는 1416년 하륜보다 같은 해, 몇달 먼저 세상을 떠나서 이백온의 처벌을 다시 주장하진 못했다.[17] 윤리적,도덕적으로도 말이다.[18] 심지어 삼촌까지 죽이기까지 한 막장이다. 하륜과는 비교도 안된다.[19] 임혁은 1980년 파천무에서 단종의 충신 성삼문을 맡아 김흥기가 연기한 수양대군과 대립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본인이 이방석을 죽이는데 앞장서는 쿠데타의 수괴 역할을 맡았고 김흥기가 이방석의 충신 정도전을 맡은 것이다.[20] 이를테면 정몽주가 이성계를 죽이려고 할때 이성계를 꼭 살려야 하는 등, 이성계를 위한다. 그것과 반대로 정도전에선 정몽주가 죽고 본격적으로 이방원을 점찍기 전까지 이성계를 제대로 돕는면이 없다.[21] 실제 이색 문하에서 같이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정도전에서는 이 점이 좀 더 강조되어서 애증관계의 사형-사제 관계로 나온다.[22] 경기 관찰사 시절 이방원이 하륜에게 '신수가 훤한데 혹시 가렴주구하시는 게 아니오?', '많이 해 먹었냐? 기방도 많이 섭렵했지?' 라고 묻는 장면이 두어 번 스치듯 나오기는 한다.[23] 그 외에도 풍수지리와 역학에 능하고 천기를 읽을 줄 알아 이성계의 사주를 듣고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으며 이방원이 왕이 될 것을 읽어내었고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고 있었다. 죽을 때에도 역사는 이 하륜이를 어찌 평가하겠는가 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다가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라는 글을 남기고 걸어나가다가 그대로 쓰러져 사망하는데 이 때의 모습도 폭풍간지.[24] 훗날 정도전에서 실제 역사에 더 부합하게 묘사된 하륜(이광기 분)이 "소생 하륜입니다"라는 대사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이 작품에서의 하륜도 "나 하륜이야! 하륜!"이라고 박은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25] 여담으로 박은의 아버지인 박상충은 하륜과 이색 문하에서 공부한 사형-사제 지간이다. 애초에 아버지뻘하고의 싸움이니 짬밥자체가 다르다.[26] 1년 앞서 방영한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둘은 각각 이인임의 당여와 정도전의 혁명파 소속으로 정적 관계로 시작하긴 했지만 조선 개국 전까지 둘 사이의 접점은 같은 사대부이자 스승 목은 이색의 제자이자,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