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하라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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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본 야구계에서 카와카미 테츠하루, 미하라 오사무, 츠루오카 카즈토와 함께 4대 명감독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다카마쓰 상업학교 시절 투수와 3루수로 플레이하며 학교를 고시엔 대회 우승 2회로 이끈 주역이었다.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게이오대가 도쿄 6대학리그에서 5번 우승하는 동안 주전으로 뛰는 등 맹활약 했으나, 마작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면서 야구부에서 제명당한 흑역사도 있다.
와세다대학 소속이던 미하라 오사무와는 1931년 양 팀의 정기전 중 홈스틸 사건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라이벌이 되었으며, 이 관계는 프로에 와서도 계속 이어졌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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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과 1934년 방일한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발팀과의 경기를 위해 결성된 일본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1936년 도쿄 교진군에 입단하여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린[3] 미즈하라는 1942년 시즌 종료 후 군에 징집되어 만주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교전중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혀 5년 넘게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49년 7월에야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 미즈하라는 수만명의 관중이 운집한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기 직전 열린 환영회에 참석하여 "미즈하라 시게루, 지금 돌아왔습니다"라는 보고로 팬들을 감동시켰고 당시 감독이던 미하라 오사무는 꽃다발과 뜨거운 포옹으로 돌아온 미즈하라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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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시즌 종료 후, 그해 요미우리를 우승으로 이끈 감독 미하라가 총감독 직으로 떨려났고 프런트 직원이던 미즈하라가 신임 감독으로 올라왔다. 구단 내 미즈하라 옹립파의 파워게임에 미하라 파가 밀린 것이었다. 미하라는 크게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1년을 쉰 뒤 1951년 니시테츠 라이온즈 감독으로 적을 옮겼다. 사실 미즈하라는 미하라의 해임에 대해 '''"우승 감독을 자르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라며 반발했지만 구단 내 여론에 밀려 결국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요미우리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는 1951~53년, 55년에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고 구단 수뇌부는 그에게 무한 신뢰를 보이며 종신감독으로 임명하겠다는 둥 설레발까지 떨었다. 그러나 후쿠오카[4] 에서 칼을 갈던 미하라 감독이 이끄는 니시테츠에게 1956~58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기를 내주었고, 특히 1958년 시리즈에서는 먼저 3연승을 따놓고도 내리 4연패로 역관광 당하며[5] 미즈하라의 신뢰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일본시리즈에는 니시테츠 대신 난카이 호크스가 올라왔으나 스기우라 타다시의 맹활약에 밀려 또 준우승. 급기야 1960년에는 미하라 오사무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센트럴 리그의 만년 하위팀 다이요 훼일즈에게 리그 우승을 뺏기면서 인내심이 폭발한 구단은 미즈하라에게 해임을 통보하였고[6] 미즈하라는 '''"그라운드에서의 치욕은 그라운드에서 갚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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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 감독 시절의 미즈하라.
하지만 예전부터 명감독의 이미지가 강한 미즈하라인지라 감독으로 오라는 곳은 많았다. 수많은 구단들의 추파가 있었는데,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구단주인 오카와 히로시의 삼고초려 급의 간곡한 요청을 못이겨 결국 1961년 도에이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 때 오카와 구단주는 미즈하라 감독 취임식에서 '''"돈은 얼마든지 내겠지만 입은 내지 않겠다"'''[7] 라는 일본 야구계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당시 도에이는 장훈, 부스지마 쇼이치, 야마모토 하치로 등의 중심타선과 도바시 마사유키를 필두로 하는 마운드의 주축 인원이 대부분 20대 중초반의 젊은 팀이었지만, 만년 하위권에 머물며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분위기였다. 미즈하라는 특유의 근엄한 카리스마로 젊은 선수들을 잘 추슬러 선수들에게 이기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고, 취임 첫해인 1961년 난카이 호크스에게 아쉽게 퍼시픽리그 우승을 내주었지만[8] 리그 2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에는 고교 최고의 투수이던 오자키 유키오[9] 를 중퇴시켜 영입하고, 투수 안도 모토히로, 내야수 이와시타 코이치[10] , 아오노 슈조 등을 팀에 끌어들여 중용하는 등 적절한 전력 보강과 미즈하라 야구에 확실히 녹아들어 한몸이 된 팀워크를 바탕으로 1962년 처음으로 퍼시픽리그를 우승해 일본시리즈에 진출, 난적 한신 타이거즈를[11] 꺾고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 제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도에이는 미즈하라가 재임하던 1967년 까지 줄곧 A클래스(시즌 3위 이상)를 유지했지만[12] 더 이상의 투자와 전력보강을 원치 않는 구단의 태도에 실망한 미즈하라는 1967년을 끝으로 도에이 감독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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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복귀하였으나, 팀은 4위-5위-2위에 그치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미즈하라는 호시노 센이치, 야자와 켄이치 등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주력하며 수석 코치로 자신을 보좌해 준 요나미네 카나메가 주니치의 후임 감독으로서 197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센트럴리그 10연패를 저지하는 우승을 거두는 데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덧붙이자면, 일본 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블록 사인을 구사한 인물이 바로 미즈하라였다.
1971년 시즌을 끝으로 주니치 감독을 사임하고 현장을 떠나 야구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1977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1978년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TV에 출연하여 리그 준우승에 그친 요미우리에 대해 '''"패배의 원인은 나가시마에게 있다. 그의 야구를 보고 있자면 도대체 야구를 알고 하는건지 모르고 하는건지 라는 생각이 든다"'''라면서 나가시마 시게오를 대놓고 깠다. 당시로선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던 나가시마에 대한 비난의 포문을 처음으로 연 셈이다.[13]
1982년 1월 한국야구위원회의 초청으로 장훈, 나가시마와 함께 내한,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있던 야구인들을 상대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에 귀빈으로 초대받은 상태였지만, 공교롭게도 개막 전날인 그해 3월 26일 간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73세.
장례식은 요미우리 사상 두 번째의 구단장으로 거행되었다.[14]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본 야구계에서 카와카미 테츠하루, 미하라 오사무, 츠루오카 카즈토와 함께 4대 명감독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2. 아마추어 시절
다카마쓰 상업학교 시절 투수와 3루수로 플레이하며 학교를 고시엔 대회 우승 2회로 이끈 주역이었다.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게이오대가 도쿄 6대학리그에서 5번 우승하는 동안 주전으로 뛰는 등 맹활약 했으나, 마작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면서 야구부에서 제명당한 흑역사도 있다.
와세다대학 소속이던 미하라 오사무와는 1931년 양 팀의 정기전 중 홈스틸 사건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라이벌이 되었으며, 이 관계는 프로에 와서도 계속 이어졌다.[2]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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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과 1934년 방일한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발팀과의 경기를 위해 결성된 일본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1936년 도쿄 교진군에 입단하여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린[3] 미즈하라는 1942년 시즌 종료 후 군에 징집되어 만주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교전중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혀 5년 넘게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49년 7월에야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한 미즈하라는 수만명의 관중이 운집한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기 직전 열린 환영회에 참석하여 "미즈하라 시게루, 지금 돌아왔습니다"라는 보고로 팬들을 감동시켰고 당시 감독이던 미하라 오사무는 꽃다발과 뜨거운 포옹으로 돌아온 미즈하라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4.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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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시즌 종료 후, 그해 요미우리를 우승으로 이끈 감독 미하라가 총감독 직으로 떨려났고 프런트 직원이던 미즈하라가 신임 감독으로 올라왔다. 구단 내 미즈하라 옹립파의 파워게임에 미하라 파가 밀린 것이었다. 미하라는 크게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1년을 쉰 뒤 1951년 니시테츠 라이온즈 감독으로 적을 옮겼다. 사실 미즈하라는 미하라의 해임에 대해 '''"우승 감독을 자르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라며 반발했지만 구단 내 여론에 밀려 결국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요미우리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는 1951~53년, 55년에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고 구단 수뇌부는 그에게 무한 신뢰를 보이며 종신감독으로 임명하겠다는 둥 설레발까지 떨었다. 그러나 후쿠오카[4] 에서 칼을 갈던 미하라 감독이 이끄는 니시테츠에게 1956~58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기를 내주었고, 특히 1958년 시리즈에서는 먼저 3연승을 따놓고도 내리 4연패로 역관광 당하며[5] 미즈하라의 신뢰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일본시리즈에는 니시테츠 대신 난카이 호크스가 올라왔으나 스기우라 타다시의 맹활약에 밀려 또 준우승. 급기야 1960년에는 미하라 오사무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센트럴 리그의 만년 하위팀 다이요 훼일즈에게 리그 우승을 뺏기면서 인내심이 폭발한 구단은 미즈하라에게 해임을 통보하였고[6] 미즈하라는 '''"그라운드에서의 치욕은 그라운드에서 갚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다.
5. 도에이 플라이어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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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 감독 시절의 미즈하라.
하지만 예전부터 명감독의 이미지가 강한 미즈하라인지라 감독으로 오라는 곳은 많았다. 수많은 구단들의 추파가 있었는데,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구단주인 오카와 히로시의 삼고초려 급의 간곡한 요청을 못이겨 결국 1961년 도에이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 때 오카와 구단주는 미즈하라 감독 취임식에서 '''"돈은 얼마든지 내겠지만 입은 내지 않겠다"'''[7] 라는 일본 야구계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당시 도에이는 장훈, 부스지마 쇼이치, 야마모토 하치로 등의 중심타선과 도바시 마사유키를 필두로 하는 마운드의 주축 인원이 대부분 20대 중초반의 젊은 팀이었지만, 만년 하위권에 머물며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분위기였다. 미즈하라는 특유의 근엄한 카리스마로 젊은 선수들을 잘 추슬러 선수들에게 이기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고, 취임 첫해인 1961년 난카이 호크스에게 아쉽게 퍼시픽리그 우승을 내주었지만[8] 리그 2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에는 고교 최고의 투수이던 오자키 유키오[9] 를 중퇴시켜 영입하고, 투수 안도 모토히로, 내야수 이와시타 코이치[10] , 아오노 슈조 등을 팀에 끌어들여 중용하는 등 적절한 전력 보강과 미즈하라 야구에 확실히 녹아들어 한몸이 된 팀워크를 바탕으로 1962년 처음으로 퍼시픽리그를 우승해 일본시리즈에 진출, 난적 한신 타이거즈를[11] 꺾고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 제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도에이는 미즈하라가 재임하던 1967년 까지 줄곧 A클래스(시즌 3위 이상)를 유지했지만[12] 더 이상의 투자와 전력보강을 원치 않는 구단의 태도에 실망한 미즈하라는 1967년을 끝으로 도에이 감독을 그만두었다.
6.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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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복귀하였으나, 팀은 4위-5위-2위에 그치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미즈하라는 호시노 센이치, 야자와 켄이치 등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주력하며 수석 코치로 자신을 보좌해 준 요나미네 카나메가 주니치의 후임 감독으로서 197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센트럴리그 10연패를 저지하는 우승을 거두는 데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덧붙이자면, 일본 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블록 사인을 구사한 인물이 바로 미즈하라였다.
7. 이후
1971년 시즌을 끝으로 주니치 감독을 사임하고 현장을 떠나 야구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1977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1978년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TV에 출연하여 리그 준우승에 그친 요미우리에 대해 '''"패배의 원인은 나가시마에게 있다. 그의 야구를 보고 있자면 도대체 야구를 알고 하는건지 모르고 하는건지 라는 생각이 든다"'''라면서 나가시마 시게오를 대놓고 깠다. 당시로선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던 나가시마에 대한 비난의 포문을 처음으로 연 셈이다.[13]
1982년 1월 한국야구위원회의 초청으로 장훈, 나가시마와 함께 내한,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있던 야구인들을 상대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에 귀빈으로 초대받은 상태였지만, 공교롭게도 개막 전날인 그해 3월 26일 간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73세.
장례식은 요미우리 사상 두 번째의 구단장으로 거행되었다.[14]
8. 에피소드
- 시베리아 억류 시절 전우였던 나카지마 하루오가 오사카 나니와 상고 야구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교를 찾아갔다가 당시 나니와의 투수이던 장훈을 보고 좌완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과 훌륭한 재목을 확보한다는 생각으로 장훈에게 고교를 중퇴하고 요미우리에 입단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훈은 뛸 듯이 기뻐하며 고향 히로시마의 형님에게 편지를 썼는데, "프로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지만 배움은 때를 놓치면 기회가 없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라는 형님의 충고를 듣고 미즈하라 감독의 권유를 사양하였다. 이때 미즈하라는 장훈에게 "훌륭한 형님을 두었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미즈하라는 도에이 감독에 취임하여 팀의 중심타자이던 장훈과 기어이 사제의 연을 맺었고, 1976년 장훈은 고등학교 때 입을뻔 했던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이 둘의 기막힌 운명의 퍼즐이 맞춰진 셈이다. 공교롭게도 장훈이 요미우리로 이적할 당시 니혼햄의 사장은 미즈하라의 라이벌이던 미하라 오사무였다. 미하라는 당시 미즈하라 감독 시절 입단한 선수들의 정리에 앞장섰다고 한다.
- 도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팀의 주전 포수는 야마모토 하치로[15] 였는데 미즈하라는 타격은 약하지만 투수 리드나 수비는 안정적인 백업 포수 안도 준조를 주전으로 중용했고 야마모토는 타격을 살리겠다는 의미에서 1루수로 전향하도록 지시했다. 도에이의 4번타자로 타선의 중심이기도 했던 야마모토는 미즈하라의 포지션 변경 요구에 "포수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는데 굳이 1루수 수비를 시키려 드느냐"면서 불만을 품은 채 태업을 일삼았고, 미즈하라는 바로 야마모토를 2군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후 시간이 지나도 미즈하라가 자신을 다시 1군으로 부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야마모토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미즈하라에게 반항해서 죄송하다며 사과했지만, 미즈하라는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다. 자네가 팀 분위기를 흐리는 바람에 피해를 입은 동료들에게 직접 사과하라!" 며 단호하게 답했다. 결국 야마모토는 팀 메이트들 앞에서 팀워크를 해쳐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선수들은 독불장군에 망나니로 통하던 야마모토의 태도를 변화시킨 미즈하라 감독의 리더십에 감탄하며 더욱 미즈하라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야마모토는 이 때 금이 가버린 미즈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서 1963년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 한신 타이거즈와 맞붙은 1962년 일본시리즈 당시, 1~2차전을 내리 한신에 내준 도에이는 영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야간 열차로 칸사이에서 도쿄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마침 상대팀 한신도 같은 열차에 탑승하였다. 그런데 2승으로 앞서가던 한신 선수들은 열차에서 대부분 조용히 숙면을 취한 반면, 2패로 몰린 도에이 선수들은 오히려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고 신나게 떠들면서 이동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과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미즈하라 감독은 선수들에게 "지금 뭐하는 거야. 다들 그만하고 일찍 자라"고 한마디 할 만도 했지만, 미즈하라는 자신의 방의 커튼을 굳게 닫은 채 도쿄에 도착할 때 까지 선수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장훈이 미즈하라에게 "그 때 열차에서 왜 조용히 계셨습니까?" 라고 묻자 미즈하라는 "처음엔 '저 녀석들은 생각이 없는 건가 철딱서니가 없는 건가?' 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니다, 저 녀석들은 젊다.[16] 저놈들이 여기서 울분을 털고 젊음과 패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었다"며 털어 놓았다고 한다. 이후 열차에서의 미즈하라의 판단이 적중하였는지, 결국 도에이는 3차전을 무승부로 끝낸 후 4~7차전을 연달아 승리하면서 창단 후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할 수 있었다.
- 더불어 1962년 시리즈에서 3승 1무 2패로 앞서던 도에이가 7차전 때, 한신과 9회까지 0대 0 으로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가다 10회초 선두타자 안타를 치고 진루타로 3루까지 나간 장훈이 다네모 마사유키의 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으며 1대 0 리드를 잡았다. 미즈하라는 10회말에 평소 수비가 약한 장훈 대신 대수비 요원인 히모토 사치오로 좌익수를 교체했지만 뜻밖에도 한신의 후지이 에이지가 동점타를 터뜨리며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2회초 공격, 장훈의 교체 좌익수 히모토가 타석에서 범퇴하자 미즈하라는 덕아웃 내의 선수단이 다 들을 정도로 "내가 실수했다. 장훈을 바꾸지 말고 좀 더 끌고 갔어야 했다"라며 탄식을 내뱉었고 이에 장훈은 '감독님은 나를 정말로 신뢰하고 계신다'며 뿌듯해 했다고 한다. 다행히 후속 타자 사이온지 아키오의 결승 홈런[17] 과 12회말 한신의 공격을 봉쇄한 도에이의 에이스 도바시 마사유키의 호투로 인해 앞서 말한대로 그 해 일본 제일은 도에이가 차지했다. 미즈하라는 시리즈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10회말 수비 때 장훈을 바꾼 것은 나의 판단 미스였다"면서 다시 한번 장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1] 1955~1959년에는 미즈하라 노부시게(水原円裕)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 하지만 둘은 평소에 서로 미워하는 사이는 아니었다.[3] 미즈하라의 명성은 주로 수비로 쌓았다. 의외로 타격 성적은 평범하여 프로 8년간 통산성적은 타율 0.243, 홈런 12개, 184타점에 불과하다.[4] 니시테츠의 연고지[5] 니시테츠의 에이스 이나오 카즈히사가 혼자서 4승을 따냈다. 5차전에서 스스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끝내기 홈런을 치고 구장 밖으로 나오던 중 팬으로부터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이라는 칭송을 들은 것이 바로 이 때였다.[6] 1960년 시즌 리그 우승 실패가 사실상 확정된 10월 경, 사진을 집요하게 찍어대는 기자에게 뚜껑이 열린 미즈하라가 그 기자를 폭행하고 필름을 빼앗아 물의를 일으킨 것도 원인이었다. 신사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구단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게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은 듯. [7] 원문은 '''金は出すが, 口は出さない。'''팀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않겠으나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는데, 정작 오카와는 스크루지 영감 저리가라 할 정도의 짠돌이였다(...). 같은 도쿄를 연고지로 하던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는 그래도 자기 팀 아낀다고 사재를 털어 홈구장인 도쿄 스타디움(위치선정 미스와 팀의 저조한 인기로 막대한 적자만 내고 결국 철거당했다)을 지을 정도였다만...[8] 그리고 난카이는 일본시리즈에서 미즈하라 시게루가 물러난 뒤 감독을 맡은 1년차의 카와카미 테츠하루의 교진군에게 패했다. [9] 장훈의 나니와 상고 후배이기도 하다.[10] 빙그레 이글스 초대 타격코치를 역임했다.[11] 한신 타이거스도 이 해 양대리그제 시행후 처음으로 센트럴리그를 우승하고 올라왔다. [12] 미즈하라 재임 당시인 1961년~1967년의 도에이 성적은 2-'''1'''-3-3-2-3-3등 이었다.[13] 이것도 미즈하라가 나가시마의 교진군 대선배이자 신인 시절 그를 붙박이 4번 타자로 만든 은인이며, 교진군을 4번이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명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쨌거나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시기는 교진군 감독에서 해임당한 뒤의 일이고, 이 정도면 성골은 아니지만 진골대접은 받을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 적어도 나가시마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비판 의견을 낼 수 있었던 존재는 당시에는 미즈하라와 카와카미 테츠하루 둘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상황이었다. [14] 요미우리의 첫 번째 구단장은 1947년 시즌 도중 장티푸스로 급사한 쿠로사와 토시오(그의 등번호 4번은 요미우리의 영구결번이다.)의 장례식이었다. 미즈하라 이후 2006년 별세한 후지타 모토시의 장례식이 세 번째 구단장으로 치루어졌다.[15] 1937년생. 장훈의 나니와 상고 선배이기도 하며 1956년 도에이에 입단하여 포수와 내야수로 플레이 했다. 이후 1963년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했고 1967년 시즌 산케이 아톰즈로 트레이드 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현역 시절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팀에 활력을 불어 넣었지만 과격한 성격으로 그라운드 안팎에서 자주 주먹다짐을 벌여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깡패 하치로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은퇴한 뒤 해설가로 활동했지만 폭행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얼마 안 가 사퇴하면서 야구계를 떠났고, 그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다...[16] 당시 도에이의 주축 멤버들은 나이가 20대 초중반에 불과한, 말 그대로 젊은 팀이었다.[17] 그것도 한신의 에이스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때려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