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미치 다카히로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홋카이도 제1구 중의원, 민선 10-12대 홋카이도지사, 제63대 중의원 부의장, 제73대 중의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당적은 입헌민주당.
홋카이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홋카이도에서만 중의원 12선, 도지사 3선을 기록했다. 가히 홋카이도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신이다. 중학생 때 교통사고를 당해 요양을 하는 바람에 중학교를 16세가 돼서야 졸업했다. 이후 삿포로니시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도쿄로 전학을 가 도쿄도립 구단 고등학교,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5년, 24세 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 연수원 수료 후 변호사가 되었다. 사법 시험 동기로 에다 사쓰키, 고무라 마사히코, 간자키 다케노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69년,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구 홋카이도 제1구에 일본 사회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5연속 당선되었다. 사회당 중의원 시절 ‘사회당의 프린스’라고 불렸다.
중의원 역임 도중 1983년, 의원직 사퇴 후 홋카이도 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도지사를 역임한다. 이후 1987, 1991년 선거에서도 도지사로 당선되어 3선을 기록한 뒤 1995년 퇴임한다. 도지사 임기 중에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 힘썼으며, 1986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 유치에도 성공한다. 허나 지방 박람회 열풍을 타고 1988년에 개최한 ‘세계 음식의 제전’이 90억엔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고 망하는 바람에 축제 관계자가 자살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도의회에서 요코미치 지사에 대한 문책 결의안이 발의되고 도민들에게도 ‘쇼크의 제전’라는 비난을 들었다.
도지사 퇴임 후 이듬해인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홋카이도 제1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원내에 복귀한다. 이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까지 지역구인 홋카이도 제1구에서 당선된다. 44회 총선거 이후 중의원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45회 총선거에서는 소속 정당인 민주당이 다수 정당이 됨에따라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 부의장 출신 의장이 당시 기준 20년 만에 나온 것이며, 최초의 도쿄대학 출신 의장, 최초의 광역자치단체장 출신 의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다가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지역구인 홋카이도 제1구에서 자민당 후보에게 밀려 지역구 당선에 실패하고 석패율제 구제로 간신히 당선되어, 전직 중의원 의장들 중 최초의 지역구 낙선자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이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인 홋카이도 제1구에 다시 당선되면서 2년 만에 지역구를 탈환했다.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불출마 했으며,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 지역구 후임자는 자신의 비서였던 미치시타 다이키 홋카이도의회 의원을 지명했으며, 이후 총선거에서 미치시타가 당선되는데 성공했다.
3. 소속 정당
4. 기타
- 탈원전 사회, 평화헌법 수호 등이 본인이 중시하는 정책들이라고 한다.
- 취미는 바둑, 독서, 영화감상이라고 한다.
- 중의원 부의장 시절 남성 의원들에게는 君, 여성 의원들에게는 さん이라는 호칭을 붙여 불렀다.
- 홋카이도 도지사 시절 자위대의 삼군 사령관들과 회식을 가진 적이 있다. 이는 역대 보수 성향의 도지사들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
- 요코미치가 홋카이도 도지사를 역임하던 시절에 훗날 같은 당 동료 의원이 되는 아라이 사토시가 그의 밑에서 지사실장으로 근무했다.
- 요코미치가 국정 복귀를 선언했을 때 히라노 사다오가 오자와 이치로와 요코미치를 이어주는 사자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