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 세이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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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2. 생애
1941년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토 간이치는 순사였다. 1945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일본에 이주하여 오이타현 쿠스군 쿠스마치에서 성장했다. 1948년, 쿠스정립 히데오 소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쿠스정립 모리 소학교로 전학갔다. 이후 쿠스정립 모리 중학교, 오이타현립 모리 고등학교에 진학하다가 1957년 9월부터 휴학, 1959년에 고등학교에 복학하여 196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도쿄도로 상경하여 와세다대학 제1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1966년에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대학원 정치학연구과 국제정치 전공 석사 과정에 진학해 석사를 취득했다.
1970년, 쿠스마치로 돌아가 분고모리역 앞 빌딩에 "에토 세이시로 정치경제연구소"를 개설했다. 1971년, 쿠스정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77년까지 재선했다. 1977년,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정치 단체 "국정에 새로운 바람을 보내는 모임" 공천을 받아 오이타현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해 구 오이타현 제1구에서 4위로 당선되었다. 소선거구 개편 이후로는 오이타현 제2구를 지역구로 연속 12회로 당선되었다.
1986년 제3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농림수산 정무차관에 임명되었고, 중의원 경제위원장, 자유민주당 인사국장, 홍보위원장을 역임하다가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개조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에 임명되어 첫 입각했다. 1998년 고노 요헤이 그룹에 참가했다. 2000년 제2차 모리 요시로 개조 내각에서 외무 총괄 정무차관에 임명되었다가 중앙 부처 재편 후 초대 외무부대신이 되었다. 외무부대신 재임 중 당시 중화민국 총통 리덩후이의 방일을 주선했으며,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고노 요헤이가 리덩후이의 비자 발급에 난색을 표하는 등 방해공작을 벌이자 고노에게 항의해 고노 그룹을 탈퇴하고 세이와 정책 연구회에 가입했다.
이후 총무회장 대리, 자유민주당 행정개혁추진본부 위원장, 중의원 국가기본정책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등 당직을 역임했으며, 200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선 고이케 유리코의 추천인이 되었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의 시게노 야스마사에게 5000표 미만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지만, 중복 입후보로 비례 규슈 블록에서 부활하여 민주당이 여당이던 시절 중의원 부의장에 취임했다.
2012년 중의원 해산에 의해 부의장을 퇴임하여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선 요시카와 하지메를 꺾고 당선되었다.[1] 이후 자유민주당 외교·경제협력본부장, 외교조사회장, 헌법개정추진본부 본부장 등 여러 당직을 맡고 있다.
3. 기타
- 취미는 술, 가라오케, 스포츠다.
- 좌우명은 "안경이 트레이드 마크!"다.
- 대만에 우호적인 인사들 중 한 명으로, 2011년 대만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이재민 지원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했다. 2012년엔 마잉주 총통을 면회했다.
- 다루토코 신지가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 후 에토의 비서 일을 했다.
- 일본 태권도 연맹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 블로그 게시글 중에 "보육원 떨어진 일본 죽어라"라고 보육원에 떨어졌다고 불평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2월 29일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민주당의 야마오 시오리 의원이 이 블로그를 다룬 질의를 했을 때 에토를 비롯한 히라사와 가쓰에이, 이시다 마사토시, 스가와라 잇슈, 이시하라 히로타카, 시라스카 다카키, 세키 요시히로 7명의 자민당 의원이 "누가 쓴 거야" "익명이야 익명" "제대로 본인을 보여줘" "짜증나네" "그만둬, 그만둬"라고 야유한 적 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