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키 분메이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현재 소속 당적은 자유민주당으로, 교토부 제1구 중의원, 노동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겸 방재담당대신, 문부과학대신, 재무대신,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74대 중의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에서 출생. 교토시립 오무 소학교, 도시샤 중학교, 교토부립 사가노 고등학교,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테니스부였다. 이후 대장성에 들어가 대장성 관료로 근무하다가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 비서관, 재영국 일본 대사관 서기관 등을 역임한 후 퇴직한다.
퇴직 후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교토부 제1구에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가이후 도시키 내각에서 후생 정무차관에 내정되었으나, 리크루트 사건에 관여한 것 때문에 내정이 취소됐다.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으로 치뤄진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교토부 제1구에 출마해 일본 공산당의 고쿠타 게이지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노동대신을 역임했으며,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 성공 이후에는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겸 방재담당대신을 역임한다. 2006년 아베 신조 1차 내각에서는 문부과학대신을 역임했다. 문부과학대신 역임 당시 학생들의 이지메로 인한 자살이 많아지자 ‘문부과학대신으로부터의 부탁’이라는 제목으로 서신을 작성해 전국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배포했었다. 이후 후쿠다 야스오 내각에서는 자민당 간사장, 누카가 후쿠시로의 뒤를 이어서 재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인 교토부 제1구에서 민주당의 다이라 도모유키에게 밀려 2위를 기록해 패배하였지만, 석패율제 비례대표로 구제되어 간신히 당선되었다. 3년 뒤인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원래 지역구에서 다시 당선되면서 지역구를 탈환, 이후 제74대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다.
2년만에 아베 신조가 중의원을 해산하고 새 의회가 개원하면서 중의원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해산에 부정적이라 자민당 내에서 교체당했다는 설이 있었다. 후임 의장은 아베 신조가 속한 파벌의 영수인 마치무라 노부타카였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후 차기 총선거에 불출마한다는 관례가 없기에 이후 치뤄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지역구인 교토부 제1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가메이 시즈카 무소속 의원이 은퇴하면서 제48대 총선거 후 최고령 중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3][4]
3. 기타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위해 해산할 당시 중의원 의장이었는데, 해산 선언문을 읽을 때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보통 의장이 해산 선언문을 낭독할 때는 ‘중의원을 해산한다!’라고 말한 뒤에 의원들이 바로 만세 삼창을 외치나, 이부키 당시 의장은 ‘중의원을 해산한다!’라고 말한 뒤 의원들이 만세 삼창을 외치는 와중에 문장 뒤에 있는 해산 날짜와 내각총리대신 이름까지 다 읽고[5] 만세는 지금 외치라고 말하는 바람에 의원들은 만세 육창(...)을 했다.
- 2015년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사망했을 때 당선 동기인 이부키가 추도사를 읽었다.
- 2017년 제3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임명될 뻔 했으나, 이부키가 거절해 에사키 데쓰마가 임명되었다.
- 이름인 ‘文明’을 훈독으로 ‘후미아키(ふみあき)’라고 부르지 않고, 특이하게 음독으로 ‘분메이(ぶんめい)’라고 읽는다.
-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4. 둘러보기
[1] 후쿠야마 데쓰로가 이 고등학교출신이다.[2] 일본 제국 시절 태어난 사람인데도 꽤나 장신이다.[3] 참고로 중의원 의원들 중 최연소 의원은 홋카이도의 스즈키 다카코 비례대표 의원으로, 스즈키 무네오의 딸이다.[4] 반대로 일본 참의원에서 최고령 의원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현 일본 유신회 공동대표다.[5] 이때 만세를 외치던 의원들이 뭔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중간에 만세를 멈추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