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 라테크
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0년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감독을 맡았다.'''"1970년대 바이에른의 수장(Bayern's 1970s kingpin)"'''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와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1970년대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황금기를 이끌었던 감독이자 1970년대 당대의 라이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황금기를 지속하게 했던 감독. 14개의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최다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와 함께 UEFA 클럽대항전 3가지 타이틀(유러피언컵, UEFA컵, 컵위너스컵)을 모두 우승한 유이한 감독으로 이를 3개의 다른 팀을 역임하며 달성했다.
2. 유년기
동프로이센 젠스부르크군(Kreis Sensburg) 보젬브(Bosemb)[2] 마을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동프로이센으로 소련군이 진격하면서 이를 피해 2년간 덴마크에서 피난 생활을 했고, 이후 서독 비퍼퓌르트(Wipperfürth)에 정착한다.
3. 선수 시절
원래 전문적인 프로선수가 아닌 학교 교사를 준비하며 SSV 마린하이데, 바이어 04 레버쿠젠, VfR 비퍼퓌르트, VfL 오스나브뤼크에서 활동을 했는데 우도 라테크가 활동하던 시기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인 각 지역 리그 시절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그 당시에는 몇몇 팀을 제외하곤 거의 아마추어 구단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1963년 분데스리가가 출범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프로생활은 했지만 거의 2부리그에서 프로생활을 보냈다.
4. 코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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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 감독시절 칼 하인츠 루메니게와 함께'''
1965년 독일 축구협회와 계약을 맺고 독일 청소년 팀을 맡았고 동시에 데트마어 크라머와 더불어 당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헬무트 쇤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독일 대표팀의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준우승을 이끌었다.
1970년까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를 맡은 우도 라테크는 1970년 프란츠 베켄바워의 추천을 받아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임명된다. 선수시절에도 무명이었고 5년 동안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은 것 외에는 지도자 경력이 전무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베켄바워같은 에이스의 추천이 있었고 게다가 당시 우도 라테크의 나이는 35살로 선수들과 그리 나이차이가 많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선수들의 단합에 큰 도움이 되었다.
프란츠 베켄바워, 제프 마이어, 한스-게오르그 슈바르첸벡, 파울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와 게르트 뮐러 같은 명 선수들을 지도하여 5시즌동안 분데스리가 3회연속 우승, DFB 포칼 1회 우승, 유로피언 컵 1회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이 시기에 우도 라테크는 선수빨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고 게다가 마지막 시즌인 1974/75 시즌 중간에 해고 당한다. 그 뒤 임명된 감독이 베켄바워의 추천을 받은 데트마어 크라머.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해고 당할 만도 한게 전 시즌인 1973/74 시즌에 리그 우승과 유로피언 컵을 우승했지만 정작 해당 시즌인 1974/75 시즌에는 성적 추락을 하였고 후임감독인 데트마어 크라머가 그나마 성적을 끌어올린 것이 리그 10위일 정도로 74/75 시즌의 우도 라테크는 최악이었다.
우도 라테크의 해고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1974/75 시즌 팀 성적이 추락하자 겨울 휴식기간에 우도 라테크 당시 바이에른 뮌헨 회장인 빌헬름 노이데커을 찾아가 그에게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하자 회장은 '맞아,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지. 그래서 너는 해고야' 라고 대답과 함께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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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트바흐의 황금기, 좌로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테크,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바이에른 뮌헨을 떠난 우도 라테크는 곧바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이었던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된다.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유프 하인케스, 알란 시몬센, 베르티 포크츠, 라이너 본호프, 울리 슈틸리케, 헤르베르트 비머를 지도하며 1975/76 시즌에는 친정팀인 바이에른 뮌헨을 승점 4점차로, 1976/77 시즌에는 준우승팀인 샬케 04를 승점 1점차로 따돌리며 극적으로 리그 2연패에 성공하며 빌헬름 노이데커 회장에게 빅엿을 먹인다. 그 외에도 1976/77 유러피언컵 준우승, 1978/79 시즌에는 세르비아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상대로 유에파컵 우승을 차지한다. 유에파컵 우승 직후 우도 라테크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감독직을 사임한다.
2년 뒤인 1981년 엘레니오 에라라 감독의 후임으로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그 시기는 바스크 구단인 레알 소시에다드와 아틀레틱 클럽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로 리그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1980/81 시즌 컵위너스컵 우승과 1982/83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그치며 바르셀로나를 떠난다.
곧바로 1983년 이번에는 울리 회네스의 추천으로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컴백한다. 4시즌동안 칼 하인츠 루메니게, 로타어 마테우스, 파울 브라이트너,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롤란트 볼파르트 같은 선수들을 앞세워 3차례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1차례의 DFB 포칼 우승을 차지한다. 유럽 대항전에서는 1986/87 유로피언 컵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FC 포르투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머무른다. 준우승 직후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그 이후 1991년 FC 쾰른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경기만 지휘한 뒤 사임하였고 1992/93 시즌에는 6개월간 FC 샬케의 임시감독으로 임명되어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14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 우도 라테크는 1993년, 지금 기준으로는 이른 나이인 58세에 은퇴를 선언하고 그 뒤 TV해설과 신문 칼럼 등을 작성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는 도중 2000년 당시 1999/2000 분데스리가에서 강등 위기에 처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러브콜을 받고 임시 감독으로 임명되어 시즌 막판 5경기를 지휘한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강등권과 불과 1점차였는데 5경기 동안 2승2무1패를 기록하며 도르트문트를 분데스리가에 잔류시키고 마티아스 잠머에게 감독직을 물려준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75,000명의 관중이 온 가운데 열린 헤르타 BSC 베를린과의 원정경기로 도르트문트의 3-0 승리였다.
2000년 도르트문트 임시 감독직을 지낸 이후 다시 TV해설, 신문 칼럼 등을 작성하다 2015년 2월 5일 새벽, 결국 숨을 거두었다. 죽기 직전까지 파킨슨병으로 인한 치매를 앓았다고 한다.
5. 기타
1978년 보루시아 MG를 이끌고 일본 재팬컵에 참가해서 차범근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상대한 적이 있다. 이 경기 후 당장 분데스리가에서도 통할 선수라고 차범근을 높이 평가하였다.
6. 우승 경력
- FC 바이에른 뮌헨 (1970/71 - 1974/75, 1983/84 - 1986/87)
- FC 바르셀로나 (1981/82 - 1982/83)
- 코파 델 레이: 1982/83
- UEFA 컵위너스컵: 198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