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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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우륵 (于勒)
'''출생'''
?~?
'''국적'''
가야신라
'''직업'''
음악가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창작물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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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야, 신라음악가.

2. 생애


원래 가야 성열현(省熱縣) 출신으로 대가야 가실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중국 남제와의 교역에서 얻은 을 개량해서 가야의 이름을 본따 12현금(絃琴)을 만들게 된다. 이 12현금으로 연주곡 12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우륵이 지은 곡으로는 상가라도(上加羅都),[2] 하가라도(下加羅都),[3] 보기(寶伎),[4] 달이(達已),[5] 사물(思勿)[6] 물혜(勿慧),[7] 상(上)/하기물(下奇物),[8] 사자기(師子伎),[9] 거열(居烈),[10], 사팔혜(沙八兮)[11] 이사(爾赦)[12] 등이 있으며 기악곡인 보기와 사자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5~6세기 가야 시절 군현(郡縣)에서 본딴 이름들로 가야 각 소속국의 지방 특색이 있는 고유 음악을 정리해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530년대 이후 후기 가야 소국들은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로 발전한 백제와 신라 사이에 껴서 국력에 밀리고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고 우륵도 551년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가야에서 신라로 넘어오게 되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 앞에서 신곡을 연주하게 되고 진흥왕의 찬사를 받아[13]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인 국원경에서 살게 됐고 552년 신라에서 대나마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우륵의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 가야금, 법지에게 노래, 만덕에게 을 가르쳤다.
야사에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곡 일부를 편곡하여 밝고 웅장하게 바꾼 것을 칭찬함과 동시에 멸망한 고국 가야를 그리워하며 가야금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충주의 탄금대도 우륵과 관계된 지명으로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 것이 유래가 되어 지금과 같은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3. 평가


국악계에서는 추앙받는 인물이다. 생몰년 자체가 미상이고 생애 전반에 걸친 행적이 묘연한데도 여러 접근 방식으로 관련 사업이 빈번한 편. 왕산악, 박연과 더불어 한국사 3대 악성으로 불린다.

4. 창작물


  • 우륵을 다룬 소설로는 김훈의 현의 노래, 김윤의 은야,[14] 미래에서 온 소녀와 우륵의 우정을 다룬 웹소설 상가라도(#1, #2)가 존재한다.

5. 기타


  • 우륵의 고향을 두고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성산면,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대초리 등에서 서로 자기네 동네가 우륵의 고향이라면서 분쟁을 벌이다가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이 우륵의 고향이라고 비석을 세우고 이를 문화재청에서 승인하는 바람에 논란이 되었다.(관련 기사) 고령군은 이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주장이 어떻든 우륵이 태어난 곳이 기록된 사서가 전무하므로 어디라고 단정할 수 없다.
[1]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표준영정 8호 1975년 이종상 작가가 문화공보부의 의뢰로 제작하였다.[2] 대가야의 본령인 지금의 고령군.[3] 김해시, 함안군, 합천군 설이 있다.[4] 여러 개의 공을 돌리는 공놀이 기예를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인데 이를 묘사한 악곡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사천시 또는 하동군에 비정하기도 한다.[5] 지금의 여수시.[6] 지금의 사천시. 가야 시대에는 사물국(史勿國)으로 불렸다.[7] 지금의 광양시. 당시에는 모루(牟婁) 혹은 백제식으로 마로(馬老)라고 불리었다.[8] 남원시. 상기물은 장수군 남부로 비정되기도 한다.[9]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추는 민속놀이를 묘사하는 악곡.[10] 거창군.[11] 합천군 초계면. 초팔혜국이 있었다.[12] 의령군 부림면. 일본서기에 사이기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전한다.[13] 진흥왕 옆의 신하가 '가야(加耶)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말했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자멸한 것이지 음악은 죄가 없다'하고 대악(大樂)으로 삼았다.[14] 우륵의 여제자가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