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왕
1. 소개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에서 등장하는 가야 왕. 악기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가보왕(嘉寶王)이라고도 한다.[1] 애초에 가야의 어느 나라 왕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반파국 왕인지, 안라국 왕인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금관국의 취희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존재하지만 가실왕의 활동 시기는 금관국이 멸망한 후이다.
최근에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4호, 45호 고분의 주인일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아래에 기록할 우륵에게 만들라고 명한 12곡의 이름들을 중국, 일본 기록에 나오는 가야지역의 지명에 대입한 결과 대가야식 토기가 다수 출토된 지역임이 밝혀지기도 했다.[2]
그러나 사비회의에서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6세기 중반 가야연맹을 이끈 것은 대가야(반파국)와 같이 아라가야였는데다가 대가야는 529년까지 이뇌왕, 562년까지 그 아들인 도설지왕이 다스리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간에 가실왕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보인다는게 문제. 일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반파국의 왕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서 가실왕은 우륵에게 12개 노래를 짓게 했는데 노래의 제목들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야 각 지역의 지명이나 소국 명칭과 유사했다. 가실왕은 후기 가야권의 영향력을 굳히려 했고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도 그 의지라는 것.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등 12곡을 작곡하게 만들었다. 이는 음악을 통해 여러 나라로 나뉘어진 가야를 하나의 체제로 묶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때까지 연맹으로 남았던 반파국과 안라국의 가야가 중앙 집권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당시 가야는 이미 고대영역국가로 성장해 근본적인 체급차가 나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어서 미래가 없는 상황이었고, 저런 정치적 의미가 담긴 곡을 작곡한 우륵조차도 결국 제자와 함께 신라에 망명하게 된다.
우륵이 진흥왕과 직접 만나서 노래를 만들었다는 기사 등으로 보아 신라의 진흥왕과 같은 시기, 즉 가야 멸망에서 멀지 않은 6세기 초중반의 인물로 추측된다.
신찬성씨록에서는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는 가야계 성씨가 7개 확인되는데, 그 중 하라 하실왕(賀羅賀室王)의 후예 씨족으로 미치타노무라지(道田連)가 있다고 적혀있다. 그가 가실왕의 후예가 맞다면 훗날 일부 고구려, 백제 왕족이 그랬듯 대가야 왕족의 일부도 멸망 후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조선상고사에서는 법흥왕 시기 혼인동맹을 맺은 왕이 가실왕이라고 하여 이뇌왕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삼국사기 설씨전에서 설씨녀의 남편이 가실(嘉實)로 나오는데 그와 동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가실은 신라 6부 중 하나인 사량부 출신이라고 되어있어 확실하지 못하나, 단양 신라 적성비 및 창녕 척경비에서 도설지왕이 사량부 출신이며 소문국의 당주 역할을 했다고 나오므로 동일인이라면 이뇌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 이찬 비조부가 설씨일 듯. 똑같이 진평왕 대를 배경으로 하는 서동요처럼 서민적 속성이 덧붙여졌을 수 있다.
1.1. 가야금 12곡조
[3]
- 1박 하가라도(下加羅都, 경남 김해시 금관국)
- 2박 상가라도(上加羅都, 경북 고령군 반파국)
- 3박 보기(寶伎)
- 4박 달이(達已, 전남 여수시 돌산읍)
- 5박 물혜(勿慧, 전남 광양시 광양읍)
- 6박 사물(思勿, 경남 사천시 사천읍)
- 7박 상기물(上奇物, 전북 남원시)
- 8박 사자기(師子伎)
- 9박 거열(居烈, 경남 거창군)
- 10박 사팔혜(沙八兮, 경남 합천군 초계읍 초팔국)
- 11박 이사(爾赦, 경남 의령군 부림)
- 12박 하기물(下奇物, 전북 장수군 혹은 임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