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초대 왕으로 카페 왕조의 창건자.
2. 상세
서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왕 루이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프랑크 공작[1] 이자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사실 루이 5세의 숙부이자 하 로타링기아 공작이었던 샤를과 루이 5세의 이복아우인 아르눌프 드 랭스가 있었으나, 아달베롱과 제르베르 등 성직자와 귀족들은 강력한 귀족이자 군사력을 가진 카페 가문의 위그 카페를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 때부터를 카페 왕조라고 하며, 프랑크 왕국의 분리가 완성되어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2]
사실 위그 카페 본인은 모계 쪽으로 카롤루스 왕조 혈족이었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로베르 1세였는데 그는 네우스트리아(느스트리)와 앙주의 백작 강철공(포르) 로베르 4세의 아들로서 원래 왕족이 아니었으나 그의 아내이자 위그 카페의 할머니가 샤를마뉴의 현손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헤르베르트) 1세의 딸 베아트리체(스)였다. 로베르 1세는 원래 파리 백작이었는데 샤를 3세를 폐위하고[3] 국왕으로 즉위한 후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는 파리 백작을 세습했으며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인 헤드비게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위그 카페였다. 그러나 위그 카페 시절에 프랑스 왕은 권위가 아주 약했다. 일단 영토가 사실상 파리를 비롯한 일드프랑스와 오를레앙 부근에 국한되었다. 위그 카페 자신도 노르망디, 부르고뉴, 아키텐, 플랑드르의 제후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심지어 왕조의 세습성도 불확실한 것이었는데 위그 카페가 즉위할 당시 대주교 아달베론(Adalbéron)은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기품과 지혜가 있는 자가 올라야 한다."고 주교와 제후들이 모인 회의에서 발언하면서 위그 카페의 왕위 선출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즉, 당초 아달베론과 프랑크의 귀족들은 프랑스 왕의 지위를 비슷한 시기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세습제가 아니라 선거왕에 가까운 위치로 만들려고 했던 듯하다.
실제로 왕권이 약하다 보니, 오베르뉴 백작과 말다툼을 벌이다 제대로 뒷목 잡을 뻔 한 일화도 있었다. 참다 못한 위그 카페가 ''''누가 네놈을 백작으로 만들어 줬더냐?!'''' 라고 호통을 쳤더니, 백작 왈, ''''그럼 널 왕위에 앉힌 건 누군데?!''''. 이 일화는 영화 300: 제국의 부활 에서 아르테미시아가 크세르크세스와의 말다툼 중에 사용하는 대사로 등장하지만, 당시 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게 문제(이쪽은 왕권이 바닥을 치는데, 저쪽은 왕이 아니라 왕중왕.).
하지만 물론 위그 카페는 자자손손 왕위를 이어갈 욕심이 있어서 꼼수를 준비했다. 자신의 아들 로베르(로베르 2세)를 바르셀로나를 침입한 무어인(이슬람 교도) 토벌을 명분으로 '공동왕'으로 올려서 자신이 죽어도 선출이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아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왕으로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위그 카페는 996년 10월 파리에서 죽었고 이미 공동 왕이었던 아들 현명왕[4] 로베르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3. 후일
이 공동왕 제도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로베르 2세 이후에는 동아시아식으로 치면 사망 직전의 왕이 양위를 하여 상왕이 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동안 혈통 단절이 일어났다면 다시 선출제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왕조가 짧게 교차한 동프랑크왕국-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왕조가 단절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어지면서 자손인 사자왕 루이 8세 시대(1223~1226)에는 카페 왕조의 세습은 당연시되고 공동왕 제도도 없어진다. 단명한데다가 후임자가 성왕 루이 9세라서 명목상의 보험인 공동왕 제도도 필요 없었던 것이다.
자손이 매우 번성하였기 때문에 많은 유럽 왕가들이 그의 후손이다. 당장 프랑스만 봐도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모두 그의 자손이자 카페 왕조의 부계측 방계 왕조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가 재판을 받을 때 그의 공식 이름은 '루이 카페(Louis Capet)'였다. 부르봉 가문은 본래 소영주 가문이었는데 루이 9세의 막내 아들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가 부르봉 가문의 상속녀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면서 태어난 루이를 친할아버지인 루이 9세가 외할아버지 샤롤레 백작 장에게 상속 받은 부르봉 영주령을 기반으로 부르봉 공작 루이 1세로 임명하면서 된 것으로 엄밀히 따지자면 카페-부르봉 가문이 되어야 했고, 동양식으로 따지면 부르봉 가문이 카페 왕조보다 급이 낮은데다 부계 혈통이 카페 왕가였기 때문에 카페 성씨를 쓰는 것이 원래는 옳다.
거기다가 방계 후손까지 합치면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주랑 왕족을 배출했는데, 왕작만 해도 36명의 프랑스 국왕, 16명의 나바라 국왕, 11명의 나폴리 국왕[5] , 11명의 스페인 국왕, 29명의 포르투갈 국왕[6] , 4명의 시칠리아 국왕[7] , 4명의 폴란드 국왕, 4명의 헝가리 국왕, 4명의 양시칠리아 국왕[8] , 3명의 라틴 황제, 2명의 알바니아 국왕, 2명의 에트루리아 국왕, 2명의 브라질 황제[9] 를 배출했다.
[1] 위그 카페의 아버지인 대 위그 (Hugues le Grand)가 사실상 왕을 협박하여 오른 자리이다. 이는 위그 카페가 왕이 되기 전부터 엄청난 권신으로써 국가를 좌지우지 했다는 증거이다.[2] 그러나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이라는 나라가 출범한 것은 아니었다. 위그는 여전히 프랑크 왕국이라는 국호와 프랑크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썼다. 완전히 프랑스 왕국과 그 왕을 칭한 것은 필리프 2세.[3] 샤를 3세 단순왕을 폐위한 것은 로베르가 아니다. 귀족들이 했고 로베르는 방관만 했다. [4] 또는 경건왕[5] 카페-앙주 왕조와 발루아 왕조(샤를 8세, 루이 12세)[6] 카페 왕조, 브라간사 왕조[7] 카페-앙주 왕조[8] 보르보네 왕조. 부르봉 왕가의 방계인 보르본 왕조(스페인계)의 방계로 부르봉-파르마 공가와 같이 이탈리아계 부르봉 왕조이다.[9] 브라간사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