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억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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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億兼
1896년 10월 23일 ~ 1947년
대한민국의 교육자,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기계(杞溪)[1] .
유억겸은 1896년 10월 23일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서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내가 윤택영의 둘째 딸이자, 순정효황후의 동생이기에 순종황제와는 동서#s-2 지간이다. 경성부 사립 계산보흥학교(桂山普興學校)를 졸업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중등과를 다니다가 1912년 일본에 유학, 교토 도시샤(同志社)중학교 보통부, 교토 관립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률학을 연구했다.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같은 해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상과에서 법학을 강의하였다. 조교수, 학감을 거쳐 1934년에 부교장을 맡았다. 특히 체육에 관심이 깊어 그의 주선으로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중학교 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4년 소년운동협회 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있었고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도 활동하였으며, 1929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정기대회 신임장 조사위원, 1930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중앙기독교청년회 등 한때 기독교계열 민족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42년까지 기독교 관련 서적을 출판·판매하는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2] 에 이사로 취임하기도 했다##2. 친일로 전향한 직후인 1938년 10월 14일에는 윤치호와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 경성대표로서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에 가맹하여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위원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38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재직 중에 '연희전문학교 적화(赤化) 사건'에 연루되어 자택 수색을 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어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3] . 이에 경찰은 같은 해 5월 20일부터 유억겸을 비롯해 신흥우·최두선·정춘수 등 54명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유억겸은 이 때문에 3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직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1937년부터 변호사업을 시작하였다. 1937년부터 합자회사 천은광업사(天銀鑛業社)에 입사하여 중역에 위치했고#, 1939년부터는 주식회사 남포수산(南圃水産)에 감사로#, 이화토지경영(梨花土地經營)에 이사로 재직하였다#.
한편,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1939년 7월 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제3분회장에 취임하였고# 1941년 2월 윤치호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면서 서무부장으로 복직하였다[4] . 그 해 8월 윤치호가 위원장을 맡은 친일 단체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에 가입하여 경기도위원이 되었고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참여하여 위원으로 있었다. 같은 해 9월 7일에는 박영희#s-3 등과 함께 광화문 앞에서 전쟁 채권을 들고 "銃後奉公(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전쟁 협력을 독려하였다#. 같은 해 10월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이 설립되자 이사가 되어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1942년에는 친일 잡지 《조광(朝光)》에 戰必勝 功必取(전필승 공필취)라는 태평양전쟁을 옹호하는 논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 밖에 친일 단체 대화숙(大和塾)에서 활동하였고#, 1943년 학도병 종로익찬회 강연대원,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등을 역임하며 8.15 광복 직전까지도 친일 행적을 드러냈다. 이러한 행적들로 그는 사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1948년 11월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간행한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유억겸을 김성수와 함께 거론하면서,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한 자'면서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자'로 분류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연희전문학교의 제5대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어 기독교청년회 회장을 지냈다. 1946년에는 미군정의 문교부장(지금의 교육부장관)에 취임하였다. 당시 문교차장 오천석이 제안한 국대안을 실현시키는 등 대한민국 교육정책 수립의 기초작업을 하였다.
또한 1927∼1947년까지 제8대·12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제17회 광복절을 맞아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유억겸기념관이 있다. 묘는 하남시 덕풍동에 있다가 그 지역의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는 창우동에 이장되어 있다.
兪億兼
1896년 10월 23일 ~ 1947년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기계(杞溪)[1] .
2. 생애
유억겸은 1896년 10월 23일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서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내가 윤택영의 둘째 딸이자, 순정효황후의 동생이기에 순종황제와는 동서#s-2 지간이다. 경성부 사립 계산보흥학교(桂山普興學校)를 졸업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중등과를 다니다가 1912년 일본에 유학, 교토 도시샤(同志社)중학교 보통부, 교토 관립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률학을 연구했다.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같은 해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상과에서 법학을 강의하였다. 조교수, 학감을 거쳐 1934년에 부교장을 맡았다. 특히 체육에 관심이 깊어 그의 주선으로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중학교 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4년 소년운동협회 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있었고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도 활동하였으며, 1929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정기대회 신임장 조사위원, 1930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중앙기독교청년회 등 한때 기독교계열 민족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42년까지 기독교 관련 서적을 출판·판매하는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2] 에 이사로 취임하기도 했다##2. 친일로 전향한 직후인 1938년 10월 14일에는 윤치호와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 경성대표로서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에 가맹하여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위원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38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재직 중에 '연희전문학교 적화(赤化) 사건'에 연루되어 자택 수색을 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어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3] . 이에 경찰은 같은 해 5월 20일부터 유억겸을 비롯해 신흥우·최두선·정춘수 등 54명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유억겸은 이 때문에 3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직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1937년부터 변호사업을 시작하였다. 1937년부터 합자회사 천은광업사(天銀鑛業社)에 입사하여 중역에 위치했고#, 1939년부터는 주식회사 남포수산(南圃水産)에 감사로#, 이화토지경영(梨花土地經營)에 이사로 재직하였다#.
한편,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1939년 7월 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제3분회장에 취임하였고# 1941년 2월 윤치호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면서 서무부장으로 복직하였다[4] . 그 해 8월 윤치호가 위원장을 맡은 친일 단체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에 가입하여 경기도위원이 되었고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참여하여 위원으로 있었다. 같은 해 9월 7일에는 박영희#s-3 등과 함께 광화문 앞에서 전쟁 채권을 들고 "銃後奉公(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전쟁 협력을 독려하였다#. 같은 해 10월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이 설립되자 이사가 되어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1942년에는 친일 잡지 《조광(朝光)》에 戰必勝 功必取(전필승 공필취)라는 태평양전쟁을 옹호하는 논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 밖에 친일 단체 대화숙(大和塾)에서 활동하였고#, 1943년 학도병 종로익찬회 강연대원,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등을 역임하며 8.15 광복 직전까지도 친일 행적을 드러냈다. 이러한 행적들로 그는 사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1948년 11월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간행한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유억겸을 김성수와 함께 거론하면서,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한 자'면서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자'로 분류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연희전문학교의 제5대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어 기독교청년회 회장을 지냈다. 1946년에는 미군정의 문교부장(지금의 교육부장관)에 취임하였다. 당시 문교차장 오천석이 제안한 국대안을 실현시키는 등 대한민국 교육정책 수립의 기초작업을 하였다.
또한 1927∼1947년까지 제8대·12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제17회 광복절을 맞아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유억겸기념관이 있다. 묘는 하남시 덕풍동에 있다가 그 지역의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는 창우동에 이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