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효황후

 


'''대한제국 순정효황후 윤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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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창덕궁 이왕비'''
경술국치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윤씨
(이왕 '''이척''')'''

이씨
(이왕 이은)

'''일본제국 창덕궁 이왕대비'''
경술국치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윤씨'''

일본제국 패망


'''대한제국 황후'''
'''순정효황후 | 純貞孝皇后
'''

'''초대 창덕궁 이왕비 · 창덕궁 이왕대비'''
[image]}}}{{{-2 입궁 초인 1907년경의 모습[1]
<colbgcolor=#e3ba62><colcolor=#b22222> '''사시'''
헌의자인순정효황후
(獻懿慈仁純貞孝皇后)[2]
'''출생'''
1894년 9월 19일 (음력 8월 20일)
조선 경기도 양근군 서종면 문호리 (외가)
'''사망'''
1966년 2월 3일 (71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능묘'''
유릉(裕陵)
'''재위'''
'''대한제국 황태자비'''
1907년 1월 24일 ~ 1907년 7월 20일
(177일)
'''대한제국 황후'''
1907년 7월 19일 ~ 1910년 8월 29일
(3년 1개월 9일, 1,137일)
'''창덕궁 이왕비'''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15년 7개월 27일, 5,719일)
'''창덕궁 이왕대비'''
1926년 4월 25일 ~ 1945년 8월 15일
(19년 1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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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가계'''
해평 윤씨 치천공파 25세손
'''아명'''
증순
'''부모'''
부친 해풍부원군 윤택영
모친 경흥부부인 유씨
'''부군'''
순종효황제
'''종교'''
무종교불교(법명: 대지월)

1. 소개
2. 호칭 관련
3. 순종과의 가례
4. 순종 사후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1.1. 6.25 전쟁 이전
5.1.3. 6.25 전쟁 이후
6. 말년
7. 기타
8. 대중 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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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제국 순종의 계후(繼后)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현재까지 한국사상 생전즉위한 유일한 황후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사의 마지막 왕비이다.
생일인 9월 19일은 대한제국 때 곤원절(坤元節)이라는 이름의 절일로 국가 경축일이었다. 1908년(융희 2) 7월 15일 궁내부대신 민병석이 황후탄신경절을 곤원절(坤元節)[3]로 개칭하자고 상소해 이를 윤허하였으며, 음력 8월 20일양력으로 환산해 9월 19일로 정했다.

2. 호칭 관련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때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 정식 시호는 받지 못했다. 사후 종묘에 부묘될 때 사용된 명칭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인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이다. 조선조 500년간 왕과 왕비가 종묘에 부묘될 때는 시호가 새겨진 옥책(玉冊)이 함께 제작되어 봉안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밟은 마지막 인물이 순정효황후였다. 순정효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생존했던 영친왕이 사왕(嗣王)으로서 시호를 올린 것으로 옥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당시 제작된 옥책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시호를 올릴 주체인 군주가 사라진 이상 사시가 사실상 정식 시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녀는 사시의 뒷부분의 다섯 글자인 '순정효황후'로 불리게 되었다.
윤 황후, 윤 대비로도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윤비(尹妃)가 더 통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983년에 정부가 조선의 왕비를 호칭할 때 '성+비'로 된 명칭을 공식 석상이나 역사교과서와 같은 공식 문서에 적지 않도록 규정한 이후로 그녀를 윤비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로 순정효황후, '순정효황후 윤씨'라고 불린다.[4] 참고로 '성+비'가 일본이 만든 통칭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명성황후 민씨 문서를 참고할 것.

3. 순종과의 가례


순정효황후와 순종
해평 윤씨 사람이다.[5] 순종의 첫 번째 아내였던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에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경흥부부인(慶興府夫人) 기계 유씨(杞溪 兪氏)[6]의 장녀가 동궁계비로 간택되었고, 1907년 1월 24일 황태자였던 순종과 가례를 올린다[7][8]. 윤택영은 사위보다 2살 아래였고, 세간에서는 아버지 욕심에 어린 생과부를 만든다며 태자비를 동정했다고 한다. 이때 순종은 세는 나이로 34세, 순정효황후는 남편보다 20살이나 어린 '''14세'''. 그나마 시동생 부부시누이가 시아버지 고종황제의 늦둥이다 보니 그들보단 나이가 많았다. 영친왕은 순종보다 23살, 덕혜옹주는 무려 38살이나 아래였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순정효황후를 손윗사람으로 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다만 또 다른 시동생인 의친왕보다는 나이가 한참 어렸다. 이쪽은 남편보다 겨우 '''3살''' 아래일 뿐이었다. 그러니 순정효황후보다 17살 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한 편이었다.[9]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으로 인해 일제의 강압으로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자[10] 윤씨도 태자비에서 황후로 진봉되었다. 시어머니인 명성황후순헌황귀비가 무속을 깊이 신봉해 궁궐에서 굿판이 자주 벌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정효황후는 불경을 독송하며 무속을 멀리했다. 이 때문에 어린 황후의 현숙함과 덕이 높게 평가되었다.
하지만 황후가 되고 4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1910년에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어전회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대신들이 한일합방조약에 옥새를 찍으라고 순종황제에게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회의를 엿듣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가져다가 치맛자락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 친일파 대신들도 차마 황후의 치마를 들출 수는 없는지라 주저했는데 그러자 윤택영의 형이자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11][12]에게 결국 옥새를 뺏기고 말았다고 한다.

4. 순종 사후


이후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자 순정효황후도 이왕비(李王妃)로 격하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순종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에서 지내다가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도 잃고 남편도 잃었으니 단청 입힌 집에 머무를 수 없다'는 고집과 함께 임금이 거주하는 대조전에 순종의 뒤를 이은 영친왕 부부가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낙선재로 옮긴 후 거주의 편의를 위해 이왕직에서 1930년대 낙선재의 서행랑을 철거하고 신관을 새로 지어 순정효황후가 알현실로 사용했다. 희정당처럼 현관이 돌출된 형태였던 신관은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더 이상 궁에 거주하는 황족이 없게 되자 1990년대 정비 사업을 거치면서 철거하고 서행랑을 복원했다.
순종 사후 이복 동생인 영친왕이 명목상 이왕 자리를 잇게 되어 순정효황후는 이왕대비(李王大妃) 또는 창덕궁 대비 전하로 불리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이왕이라는 작위가 허울뿐인 자리였으니까...
이방자 여사는 14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부부다운 생활[13]을 가지지도 못하고 평생 답답한 궁궐에 갇혀 외롭게 지내다가 33살 나이에 과부가 된 윤씨를 같은 여자로서 동정하고 진심으로 윤씨의 삶이 너무 슬프다고 자전적 수기 <세월이여 왕조여>에 기록했다.
낙선재로 옮겨간 순정효황후와 상궁 나인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글 소설들을 쌓아두고 읽곤 했다. 순정효황후 사후에 이 책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되어 '낙선재본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된다. 하나둘씩 모아서 보기 시작했다는데 6.25 전쟁 때 낙선재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이 석복헌 다락에 있던 한글 소설을 많이 태웠음에도 현존하는 분량이 '''89종 2,000여책'''에 달한다.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1. 제1공화국 시기



5.1.1. 6.25 전쟁 이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후 순정효황후는 정부 수립 기념으로 수립 기념식에 참석하고자 도쿄에서 날아온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청으로 된 화병 하나를 선물해 주었다.[14]

5.1.2. 6.25 전쟁 시기


한편 새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낙선재에서 살고 있던 순정효황후를 비롯한 구황실[15]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순정효황후는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광진교 폭파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과 함께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겨지게 된다. 이승만이 왜 구황실을 박대했느냐면 이승만 본인이 만민공동회 사건 때 고종에게 감정의 앙금이 있었으며 고종의 외교적 안목도 한심하다 평했을 정도로 몹시 싫어했던 데다가 한반도의 유일한 지도자는 자기라는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자신을 프린스라고 소개하고 다녔던 적이 있는 이승만으로서는[16] 자기처럼 프린스를 자칭한 게 아니라 진짜 황족인 구황실 사람이 고깝게 보였던 것. 전 왕조를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현 왕조가 전 왕조의 왕족과 자손들을 껄끄러운 존재로 여겨 제거하거나 숙청하고 설사 살려주더라도 냉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반대로 이승만을 싫어하고 전주 이씨도 아니어서 구황실의 정통성 문제와는 인연이 없었던 박정희는 구황실을 잘 보살펴주었다 .
인터넷에 순정효황후의 이야기 중 하나로 떠도는 것 중 창덕궁 낙선재에 군홧발로 난입한 인민군들이 "윤비가 누구야!"라고 행패를 부리자 상궁들은 와들와들 떨었지만 순정효황후는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썩 물러가거라!"라고 호통을 쳐 그 기세에 주눅든 인민군들이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1966년 2월 4일, 12일에 발간된 경향신문의 기사에 나온 순정효황후와 함께 하였던 김명길 상궁의 증언과 1966년 2월 3일자 한국일보 <윤비의 생애> 기사 등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최후의 서울 방어 전투인 미아리 전투에서 국군이 패배하면서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하기 시작했던 1950년 6월 28일 오전 8시 무렵, 미아리를 거쳐 내려온 인민군이 다발총을 앞세우고 창덕궁 낙선재 뜰 앞까지 와서 내전으로 들이닥쳐 방을 뒤지다가 '누가 임금 부인이냐,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상궁들은 '마마는 여기 안 계신다, 우리는 잡일하는 일꾼이다'라고 둘러댔지만 정좌한 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황후라는 사실을 인민군이 눈치채자 김명길, 박창복, 성옥염 세 상궁이 황후를 감싸고 '병환이 나서 꼼짝도 못하신다'며 애걸복걸해 일단 화는 면했다. 총부리를 들이댄 상황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침착했던 것이 호통친 것으로 와전되어 인터넷상에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닷새 동안 인민군이 낙선재에서 계속 숙식을 취하자 상궁들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황후의 병환 치료를 명분으로 인민군에게 바깥 출입을 허락받아 황후를 모시고 창덕궁 뒷문으로 탈출했다. 탈출 직후엔 황후의 백모인 흥친왕비 여주 이씨가 기거하던 운현궁비자가 황후 일행을 운현궁으로 안내해 피신(이어)시켰다. 이후 9.28 서울 수복 때까지 황후 일행은 그곳에서 지냈는데, 그 당시 운현궁 관리인이었던 김택수 씨가 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인민군에 가담하는 척까지 한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17]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어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왔으나 결국 1951년 1.4 후퇴 때 비행기편으로[18] 부산에 있는[19] 양성봉 당시[20] 경상남도지사의 관사로 피난갔으나 그곳에 오래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동래포교당[21]이란 사찰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곳의 승려와 불교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 19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한 시민의 추천으로 구포의 한 집에서 서민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순정효황후는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승만은 '창덕궁은 국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정릉의 인수재(仁修齋)[22]에서 지내게 되었다.[23]

5.1.3. 6.25 전쟁 이후


정릉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이 직접 정릉의 사찰(경국사)도 볼 겸 인수재로 찾아와서 20분 동안 순정효황후와 회견(안부를 묻는 정도[24])한 일도 있었고[25] 1955년에는 좀도둑이 들어 현금 4천환과 금반지 3개와 전화기를 절도해간 사건이 있었다.[26]
1956년 12월 22일자 경향신문 1면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구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27]에서 국회 예결위에 심의를 받으려고 가지고 나온 자료를 보면 부족한 돈이 있어도 국고를 지원받지 않고[28] 창경원, 덕수궁 등에서 걷은 관람료(약 3억환)를 황족의 후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데 이때 순정효황후에게는 생활비로 매월 34만환을 지급하였다고 한다.[29]
참고로 나중에 1958년 7월 31일자 경향신문 1면에 나온 30일 오전에 열린 국회 예결위에서 나온 구황실재산특별회계에 대해 정낙훈(자유당), 서범석(민주당), 민관식(민주당), 문종두(무소속) 의원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윤우경 사무국장에게 '순정효황후가 낙선재로 되돌아가겠다고 요구하였는데 어떻게 하였는가' 하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을 따르자면 생활비로 매월 46만환을 지급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1959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 1면에 나온 기사에 따르자면 지금까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윤우경 사무국장이 순정효황후의 말들을 날조하는 등의 온갖 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적발되어 23일에 열렸던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선 구황실재산관리국의 예산안 심의가 보류되고 국회의원들은 사무국장을 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큰 소동이 있었다. 이후 1959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 1면의 기사에 따르면 보류된 심의가 12월 6일에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계속되었고 여기에선 윤우경 사무국장이 법대로 재산관리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대통령의 분부에 따라 독단적으로 처리했고 순정효황후를 정릉에 모신 것이 순정효황후의 뜻도 아닌데 순정효황후가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위증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또 여기에서 나온 이야기로는 닉슨 부통령 방문 당시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순정효황후가 계시던 인수재에 고급 물건들을 잠시 들여놨다가 방문이 끝나고 다시 가져갔다는 말도 나왔다.

5.2. 4.19 혁명 이후


낙선재로 들어오는
황후와 상궁들[30]
낙선재로 환궁하는 황후.
왼쪽부터 오재경 국장, 순정효황후, 유경운 상궁, 박창복 상궁
이후 순정효황후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서야 오재경 신임 구황실재산사무총국 사무국장[31]에 의해 낙선재를 전면 수리한 끝에 1960년 5월 15일에 내외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함께 겨우 낙선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사진을 절대로 찍지 못하게 한 순정효황후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때만큼은 할 수 없이 포즈를 취하였다고 한다. 이때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고. 이후 인수재에서의 생활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불경을 읽으며 때때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보며 생활할 것이라고 하였다.[32]

5.3. 제3공화국 시기


후에 박정희 정권의 도움으로 1962년에 일본에서 수십 년 만에 귀국한 동서 이방자 여사, 시누이 덕혜옹주와 함께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한 탓에 항상 영친왕을 아끼며 하루 빨리 환국하기만을 바랐지만 정작 영친왕은 뇌출혈 후유증 때문에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서 귀국하고 곧 다시 병원에 입원해 만날 수 없었고, 결국 황후는 영친왕이 입원한 병원[33]과 지척인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면하지 못했다.
이석의 말에 따르면 가수가 되었던 이석을 보고 '''"나라가 망하니 네가 광대로 전락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전통적인 신분제와 예법에 젖은, 그것도 황실의 큰어른이었으니. 당장 상기된 말년의 사진만 봐도 격식과 예법으로 노년에도 꼿꼿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이석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땐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른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TV쇼 프로그램에서 트위스트 김씨가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나오자 상궁들이 어찌 저리 망측할 수 있냐며 눈을 가렸는데 그 모습을 본 순정효황후가 "시대가 변하면 사람이 시대에 맞춰가야 하는 것"이라며 시대 변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62~3년경에 잠시 덕성여중에서 수예를 가르쳤다는 증언이 있다. 수업시간에 들어와서 인사도 받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창밖만 보고 있다가 가셨다고 한다.

6. 말년


조선 시대에 태어나자마자 동학농민운동을 겪고 황후가 되기 직전에 을사조약이 맺어져 외교권이 박탈당한 대한제국의 순종의 황후로 지내다가 경술국치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채로 시아버지인 고종의 장례식으로 인한 3.1 운동과 남편 순종의 장례식으로 인한 6.10 만세운동을 겪으며 일제강점기를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고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한반도 최초의 보통선거인 5.10 제헌국회 총선 후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어 6.25 전쟁을 거쳐 4.19 혁명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제3공화국 수립에 이르러 한일기본조약 체결, 베트남 전쟁에 따른 월남 파병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겪었어도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로서의 기품을 조금도 잃지 않았으며 공부에도 적극적이어서 일본어와 영어, 불경 공부에도 매진했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大智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또한 피아노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고 전해진다. 김명길 상궁의 회고록 <낙선재 주변>에 의하면 피아노 강습은 1주일에 한번씩 받았는데, 양손을 엇갈려가며 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지만 순종이 승하한 후에는 피아노 강습을 그만두고 오직 불경만을 읽으며 지냈다고 술회했다. 고종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아침에는 커피와 케이크를 자주 즐겼다고 전해진다. 후일 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말년에 쓰기 시작한 토스터커피포트를 부장품 중 하나로 관에 넣었다는 김명길 상궁의 회고에 따르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966년 2월 13일, 창덕궁을 떠나는 황후의 장례 행렬
유릉 전경
1966년 2월 3일, 창덕궁 낙선재석복헌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황후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위해 소집된 윤황후장의준비위원회는 2월 6일 종묘와 유릉에 윤황후 승하 고유제를 지냈고, 2월 7일 시호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로 정했다. 2월 8일에는 성복제와 입관이, 2월 9일에는 조제와 고묘가 있었다. 2월 13일 오전 10시에 창덕궁에서 발인한 뒤 금곡에 도착한 황후의 재궁은 오후 1시에 하관되어 남편이 잠든 유릉(裕陵)에 합장되었다.[34] 신위는 1968년 10월 23일 부태묘제를 거행한 후 종묘 정전 제19실에 배향되었다. 기사

7. 기타


1907년경의 사진.[35] 장례 때 영정으로 사용되었다.
1964년경의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노년의 순정효황후가 어여머리에 황원삼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사진 속 황원삼은 현재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전(傳) 황후 황원삼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민속자료 제49호에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세종대학교 박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54호인 황후 적의가 소장되어 있다.
TV 쇼 진품명품 324회(2001년 7월 15일 방송)에 순정효황후가 조선 왕조 마지막 주방 상궁이자 조선 궁중 요리 부문 1대 인간문화재를 지낸 한희순[36]에게 물려준 삼단 화초장이 나왔다. 2001년 당시 감정가는 3,500만원이었으나 800회 특집(2011년 3월 20일 방송)을 맞아 다시 감정한 결과 예술성과 희소성을 더 높게 인정받아 1억 5,000만원으로 평가받았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은 일본에게서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고,[37] 순정효황후의 오빠 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이다. 순정효황후로부터 자금을 받아 신익희에게 전달해 임시정부 설립에 자금을 보태거나 3.1 운동 준비 중 윤용구[38]를 설득하려다 일본에 발각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이후 참의원 의원직으로 일본이 윤홍섭을 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리처드 닉슨과 만난 적이 있다. 1953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던 닉슨이 방한했을 때 20분간 회동했었다.

8. 대중 문화에서


  • 승하한 2개월 후인 1966년 8월 18일, 마지막 황후 윤비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배우 김지미가 순정효황후 역을 맡아 10대 소녀부터 70대 노인까지를 모두 커버했다. 영화 후반부에 순정효황후의 실제 장례 행렬 영상이 있다.
  • 1990년작 KBS1 3.1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이한나가 연기했다.
  • 2016년작 영화 덕혜옹주에도 잠시 등장한다. 담당배우는 '송서하'이다.

[1] 사진에서 순정효황후가 패용한 훈장과 기념장이 시간 순서대로 황태자 가례 기념장(1907년 1월), 서봉장(1907년 1월 24일 수여)만 있고 황후가 된 이후에 받은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1907년 8월)은 없기 때문에 황태자비일 때 촬영했음을 알 수 있다[2] 국가에서 올린 시호가 아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시호다.[3] 왕비를 지칭할 때 중궁전과 함께 곤전(坤殿)이란 용어도 사용했는데, 그에서 유래한 듯 하다.[4] 순정황후(純貞皇后)라는 명칭도 쓰긴 하는데, 순정효황후보다는 수가 적다. 순종의 황후들만이 아니라, 2000년 이후로는 대한제국 때 황후로 추존된 다른 조선의 왕비들의 황후로서의 명칭은 네 글자보다는 다섯 글자로 된 경우가 주로 쓰인다. 다섯 글자로 된 명칭이 잘 쓰이지 않는 명성황후가 예외인 셈.[5] 25세손 'O섭(燮)' 항렬로 나잇대에 비해 항렬이 굉장히 낮은 편이다. 윤치호의 '''현손녀''' 뻘,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의 '''증손녀''' 뻘, 그리고 KBS 아나운서 윤인구의 '''손녀''' 뻘로, 동요 작곡가 윤극영태영건설, SBS 창립자 윤세영의 '''조카''' 뻘(...)되며 전 교육부 장관 윤형섭의 누나 뻘 된다.[6] 16세에 윤택영과 혼인해 2남(윤홍섭, 윤의섭) 2녀(순정효황후, 윤희섭)를 두었다. 1936년 9월 18일 61세를 일기로 사망.[7] 윤택영이 황실과 사돈이 되려고 빚까지 내서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부원군이 되고나서도 딸을 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진 빚은 안 갚고, 오히려 부원군이란 지위를 이용해 더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이로 인해 '채무왕'이라 불리며 채권자들에게 들볶였다. 황실의 체면도 있고 해서 1907년 기준 윤택영이 진 채무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사돈 고종이 특별 지급했으나 이걸로도 부족해 여러 차례 사위 순종을 찾아가 자기 빚 좀 대신 갚아달라고 했고 심지어 일본 정부에게까지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그러다가 빚을 못 갚아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도저히 감당 못 할 수준이 되자 중국 상하이로 야반 도주했다. 그러나 빚을 잔뜩 지면서까지 호화롭게 살았던 몸이라 외국에서의 낯설고 초라한 생활에 적응 못 하고, 툭하면 딸과 사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귀국할 수 있도록 빚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그래도 장인 겸 신하로서 문상은 해야 한다고 몰래 귀국했다. 그러나 윤택영이 문상을 위해 귀국할 걸 예상하고 궁궐 주위를 감시하던 빚쟁이들이 몰려들었고,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한 윤택영은 상이 끝나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베이징에서 1935년 10월 23일에 객사했다.[8] 참고로 윤택영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1910년에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앞에 서술된 채무 관계로 인한 파산으로 인해 1928년 불명예 실작한다.[9] 그러나 부부 사이에 아이는 없었는데, 순종은 그 누구와도 아이를 보지 못했다.[10] 양위식에는 일제에 대한 무언의 항의 표시로 양위하는 사람도 양위받는 사람도 모두 불참했다. 결국 일제는 내관 둘을 데려다 놓고 양위식을 진행하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른다.[11] 친일파이기도 했고 재물욕도 대단했다. 채무왕이라 불릴 정도로 빚을 많이 진 동생 윤택영이 자기 빚 대신 갚아달라고 했다가 형제가 몸싸움을 벌인 게 당시 신문과 잡지에 나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고종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명의의 분참봉 첩지를 대량 위조해서 팔아먹어 한몫 단단히 챙긴 일로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12] 여담으로 당시의 잡지 "개벽"에 난 기사를 보면 윤덕영의 별명이 ''대갈장군''이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큰 편이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13] 윤씨와 순종 황제는 원만한 관계였으나 순종 황제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니 부부 관계는 없었을듯.[14] 출처 : 1948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2면.[15] 당시엔 구왕궁으로 불렀다.[16] 왕족이라기엔 너무 까마득하지만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이긴 하다.[17] http://www.food.co.kr/food/board.php?board=clue&command=body&no=19[18] 김명길 상궁의 회고록 <낙선재 주변>에 따르면 미군들이 윤황후를 위해 비행기를 내주었으나 김명길 본인은 머리가 자주 아파서 기차를 타고 피난지에서 윤황후와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9] 당시 경남도청이 부산시에 있었다. 당시의 도청은 현재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며 구 경남지사 관사는 현재 임시수도기념관이다. 여기서 도청과 관사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부산이 전쟁으로 임시 천도되었을 때 경남도청과 경남지사 관사가 각각 임시 정부청사와 임시 경무대(현 청와대)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20] 경남지사 취임 전에는 초대 부산시장을 지냈다.[21] 동래 범어사 소속의 불교 선원. 지금은 법륜사가 그 자리에 있다.[22] 1966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백낙승 씨 댁으로 기재되어 있다.[23] https://news.joins.com/article/1321310[24] 출처 : 1953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25] 출처 : 1953년 11월 15일자 경향신문 2면.[26] 출처 : 1955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 3면.[27] 이 기관은 1961년 문화재관리국으로 개편된 뒤 1999년에 문화재청으로 승격된다. 즉, 문화재청의 전신 기관이다. #, ##[28] 물론 남은 돈을 국고에 채워넣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29] 이는 당시 국회의원의 세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30] 맨 앞줄 여인의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31] 이 사람은 전임자들과 달리 비리 투성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개혁하려 애썼고 (비록 조직적인 증거 인멸 등에 부딪쳐 실패했지만), 인수재에서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를 하던 순정효황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순정효황후도 무척 고마워하며 신임했다고 한다.[32] 출처 : 1960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3면, 1960년 5월 15일 경향신문 3면.[33] 현재 명동 가톨릭회관 건물에 있던 명동성모병원. 여의도성모병원의 전신이라고 하며, 창덕궁(돈화문 기준)과는 직선 거리로 2km도 떨어져 있지 않다.[34] 출처 : 1966년 2월 7일자 경향신문 7면.[35] 사진에서 순정효황후가 패용한 훈장과 기념장이 시간 순서대로 황태자 가례 기념장(1907년 1월), 서봉장(1907년 1월 24일 수여),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1907년 8월)이기 때문에 황후가 된 이후에 촬영했음을 알 수 있다.[36] 한희순의 인간문화재 자격은 황혜성 여사가 2대로 승계하고, 지금은 황혜성 여사의 장녀 한복려 여사가 3대째 이어가고 있다. 심영순 여사가 바로 황혜성 여사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37] 이것만으로도 욕먹을 일인데 사적인 부분에서도 개판이었다. 조선귀족이라는 특권층이 되어서 독립운동가도 아닌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며 자기 딸이나 사위인 순종더러는 내 빚 좀 갚아달라고 징징거리고, 말년에는 조선귀족 망신을 혼자 다 시킨다는 이유로 기껏 받은 작위도 박탈당한 채 도피처였던 중국에서 객사해버렸다.[38] 조선 후기 문신. 판서까지 오른 고위 관료로,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내려 놓고 은거. 스스로를 장위산인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