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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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8월 미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을 비롯한 9개 구제전문학교[1] 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미 군정청의 계획에 반발하면서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을 흡수하여 약학대학을 신설하였다.
주의할 점이 해당 학부의 전신이라고 해서 현재와 같은 대학 기관인 것이 아니다. 일제시대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에서 통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제전문학교와 구제중학교[2] 가 서울대학교에 통합되면서 대학으로 승격한 것이다.
2. 전사(前史)
아래에는 각 전신학교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한다.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편입된 서울약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신은 설립년도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2.1. 법관양성소
1895년 법관양성소로 출발하였다. 사범학교와 함께 서울대학교의 가장 오래된 전신 중 하나다.[3] 1909년 한성법학교로, 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경성전수학교가 되었다. 이후 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22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출발이 구 한국의 법관양성소였기 때문에 합방 후에도 한동안 조선인 학생들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이러한 제한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전, 고상 등 타 전문학교에 비해 조선인 입학생의 비율이 많은 편이었다. 경성제대와 달리 법학전문 졸업생들은 법학 실무에 뛰어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법과계통 전문학교를 줄이고자 하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폐지되었고 경성경제전문학교로 흡수되었다. 해방 후, 동문들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준비하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안에 의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법관양성소의 설립년도인 1895년을 '''개학년도'''로 삼고 있다.[4] 유명 졸업생으로 이준 열사와 함태영 전 부통령이 있다.
2.1.1. 학과 편제(1946)
법관양성소(1895) → 한성법학교(1909) → 경성전수학교(1911)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 →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 경성법과대학으로 승격(1946)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
학부/예과/전문부 운영(1946)
2.2. 한성사범학교
1895년 한성사범학교로 출발하였다. 법관양성소와 함께 서울대학교의 가장 오래된 전신 중 하나다. 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독립된 학교의 지위를 잃고, 경성고등보통학교 소속 사범과가 되었다. 1921년 독립하여 조선총독부사범학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경성사범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35년에는 경성여자사범학교가 독립하였다. 원래 당시 학제상 사범학교는 오늘날의 사범대학과 달리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이었으며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보통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시기 중등교원의 양성은 일본 본토에만 있는 고등사범학교나 일반 대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문학교로 인정받은 것은 중등교원을 양성하던 고등사범학교#s-2이며, 초등교원 양성학교였던 '''사범학교'''는 종전 때까지 구제전문학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해방 이후 경성사범학교를 비롯, 경성여자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에서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초등교원양성기관이 아닌, 중등교원양성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5] 유명 출신인물로 소설가, 언론인 선우휘가 있다.
2.2.1. 학과 편제(1946)
한성사범학교(1895) →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 → 조선총독부사범학교(1921) → 경성사범학교(1922) → 경성사범학교(1935) → (가)경성사범대학(1946)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승격(1946)
예과/학부 운영(1946)
- 교육과 - 교육과(1946)
- 국문과 - 국문과(1946)
- 영문과 - 영문과(1946)
- 사학과 - 사학과(1946)
- 체육과 - 체육과(1946)
2.3. 의학교
1899년 의학교로 출발하였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총독부로 이관되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가 되었다. 1916년 총독부에 의해 구제전문학교로 승격,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에도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경성의전을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제국대학 설립 과정을 볼 때, 의학전문학교가 제국대학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았다.[6] 그러나 총독부는 기존의 경성의전을 그대로 두고, 새로 설립될 제국대학에 별도의 의학부를 설치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에도 꾸준한 대학 승격 운동이 있었으나 총독부는 일제 패망 때까지 식민지에 새로운 대학을 설치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본토에도 의과대학, 의학전문학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의전은 본토의 일본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경성제대 의학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설립 당시 상당수의 교직원을 경성의전에서 빼와서 충당한 데다 지원도 줄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의 존재가 경성의전의 대학 승격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도 가장 강력히 저항한 학교이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통합이 됐어도 의전 출신 재학생을 의학부 출신 재학생과 달리 전문부[7] 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경성의전 측이 강력히 반발하여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8]
2.3.1. 제중원에서 대한의원으로 이어지는 역사
제중원(설립당시 명칭은 광혜원)은 1885년 조선 정부가 미국인 의료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통상부) 산하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서양식 왕립병원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병원이 이관됐다. 선교부에 이관된 후 1900년엔 건물이 신축되는 과정에서 거액을 기부한 미국의 사업가 이름을 딴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현재의 연세대학교 의료원의 모태가 된다.
이와는 별도로 국립병원이라는 역사가 1899년에 세워진 의학교와 부속병원격인 광혜원, 이는 이후 대한의원으로 이어졌다.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내에 있는 구 본관이 바로 1909년에 건립한 대한의원 본관이다.
따라서 제중원은 국립병원과 선교병원이라는 이원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이유로 제중원의 적통을 두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대립하는 일이 있었다.[9]
이 문제는 아직 정확히 결론 나지는 않았으나 서울대학교가 개학연원을 법관양성소의 설립시기로 보는 것으로 한발 물러나서 지금은 잠잠한 상태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병원은 이와는 별도로 광혜원부터(즉, 1885년부터)를 자신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2.3.2. 학과 편제(1946)
의학교(1899) →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1910) → 경성의학전문학교(1916) → (가)서울의과대학(1946)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승격(1946)
예과/본과/전문부 운영(1946)
2.4. 상공학교
1899년 상공학교로 출발하였다. 1904년 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으며,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1906년 공업전습소로 발전하였다. 1916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1939년 광산부문이 경성광산전문학교로 분리 독립하였다.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서울대학교 통합 직전에는 토목과(1916), 염직과(1916), 응용화학과(1916), 응용화학과(1916), 건축과(1916), 전기과(1938), 기계과(1938), 전기통신과(1944), 전기화학과(1944) 등이 존재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설립 전까지 후에 분리되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함께 유이한 공과계 고등교육기관이었다.[10] 유명 출신인물로 시인 이상이 있다. 당시의 학교부지는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경기기계공업고등학교, 원자력병원이 위치하고 있다.
2.4.1. 학과 편제(1946)
상공학교(1899) → 농상공학교(1904) → 공업전습소(1906) → 경성고등공업학교(1916) → 경성고등공업학교(1939) → 경성공업전문학교(1944) → (가)서울공업대학(1946)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1946)
- 수학과 - 학부 수학과(1946)
- 물리학과 - 학부 물리학과(1946)
- 화학과 - 학부 화학과(1946)
- 공업경영학과 - 학부 공업경영학과(1946)
- 공업화학과 - 응용화학과(1916) → 응용화학과 응용화학부(1922) → 학부 공업화학과로 승격(1946)
- 전기화학과 - 전기화학과(1944) → 학부 전기화학과로 승격(1946)
- 섬유공학과 - 염직과(1916) → 방직과/응용화학과 염직부(1922) → 학부 섬유공학과로 승격(1946)
- 기계공학과 - 기계과(1938) → 학부 기계공학과로 승격(1946)
- 전기공학과 - 전기과(1938) → 학부 전기공학과로 승격(1946)
- 통신공학과 - 전기통신과(1944) → 학부 통신공학과로 승격(1946)
- 토목공학과 - 토목과(1916) → 토목공학과(1938) → 학부 토목공학과로 승격(1946)
- 건축학과 - 건축과(1916) → 건축공학과(1938) → 학부 건축학과로 승격(1946)
- 항공조선학과 - 학부 항공조선학과(1946)
2.5. 농상공학교
1904년 농상공학교로 출발하였다. 1906년 농상공학교의 농과가 농림학교로 발전하였다. 1918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수원농림전문학교가 되었다. 1922년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칭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이름을 되돌렸다. 농상공학교 시절의 농과를 시작으로 각 학과가 분화하여, 서울대학교 통합 직전에는 농학과(1922), 임학과(1922), 수의축산과(1937), 농토목과(1942), 농화학과(1946)가 존재하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된 후에도 계속 수원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서울로 캠퍼스를 이전하기 전까지 수원농대라는 약칭으로 통용되었다. 반면 서울'농대'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아닌, 서울농업대학[11] 의 약칭이었다. 유명 출신인물로 정치인 장면, 경제학자 백남운이 있다.
2.5.1.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일제 강점기 동안의 몇 차례의 항일반제운동사건의 초점에 놓인 바 있다. 이른바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으로 지목되는 사건이 세 차례가 있었는데, 1926년 수원고농 재학생과 동문들이 결성한 '개척사'라는 항일 비밀결사가 일경에 발각되어 관련자가 적발된 1차 수원고농 사건을 비롯하여, 1935년 7월 반제 독서회가 발단이 된 2차 수원고농 사건, 1941년의 교내 한글연구회 모임이 발단이 된 3차 수원고농 사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생회는 전신인 수원고농 시절의 항일운동 전통을 기려 학생회 슬로건으로 "반제항전 일 세기 자랑찬 전통"을 사용하고 있다.
2.5.2. 학과 편제(1946)
농상공학교(1904) → 농림학교(1906) → 수원농림전문학교(1918) → 수원고등농림학교(1922) → 수원농림전문학교(1944) → (가)수원농과대학(1946)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승격(1946)
학부/전문부 운영(1946)
- 농학과(학부/전문부) - 농학과(1922) → 학부/전문부 농학과로 승격(1946)
- 임학과(학부/전문부) - 임학과(1922) → 학부/전문부 임학과로 승격(1946)
- 수의학과(학부) - 수의축산과(1937) → 학부 수의학과로 승격(1946)
- 축산학과(학부) - 수의축산과(1937) → 학부 축산학과로 승격(1946)
- 농공학과(농업토목과)(학부/전문부) - 농토목과(1943) → 학부 농공학과로 승격(1946)
- 농화학과(학부/전문부) - 학부/전문부 농화학과(1946)
- 농경제학과(학부) - 학부 농경제학과(1946)
- 농생물학과(학부) - 학부 농생물학과(1946)
- 수의축산과(전문부) - 수의축산과(1937) → 전문부 수의축산과로 승격(1946)
2.6. 경성경제전문학교
1915년 설립된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12] 의 경성분교로 출발하였다. 1918년 일본 본토와 분리된 경성척식전문학교가 되었으며, 1920년에는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가 되었다. 이후 1922년 재정난으로 총독부에 이관되어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가 되었다. 1944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면서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 분리, 독자적으로 대학승격을 준비하였으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입시에서의 조선인 차별이 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유명 출신인물로 두산그룹 창립자 박두병, 고고학자 도유호가 있다. 당시의 학교부지에는 현재 서울사대부중, 서울사대부고가 위치하고 있다.
2.6.1. 학과 편제(1946)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1907) →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1915) →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 고등상업과/행정과(1918) →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1920)[13] → 경성고등상업학교(1922) →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 (가)경성경제대학(1946)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승격(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2.6.2. 교과과정
다음은 1941년도 경성고등상업학교 교과과정이다.
- 필수과목
- 선택과목
2.7.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로 출발하였다. 19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당시 대학에 아직 치학부(치과대학)가 개설되지 않았고, 전문학교도 일본 본토에서조차 네 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성치의전의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대학교 설립 당시, 유일한 사립학교였다는 점이 특징.
2.7.1. 학과 편제(1946)
경성치과의학교(1922)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1929) →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승격(1946)
2.8. 경성제국대학
2.9. 경성여자사범학교
1935년 경성사범학교의 여자학급을 독립하여 설치된 경성여자사범학교로 출발하였다. 해방 후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준비하였으나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2.9.1. 학과 편제(1946)
경성여자사범학교(1935) → (가)경성여자사범대학(1946)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승격(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 국문과 - 국문과(1946)
- 영문과 - 영문과(1946)
- 역사(지리)과 - 역사(지리)과(1946)
- 생물과 - 생물과(1946)
- 교육과 - 교육과(1946)
- 가사과 - 가예과(1946)
- 예공과 - 예공과(1946)
2.10. 경성광산전문학교
1936년 설립된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가 별개의 전문학교로 독립된 경성광산전문학교로 출발하였다. 채광학과(1939), 광산기계학과(1939), 야금학과(1939)가 존재하였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경성공업전문학교 등과 함께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2.10.1. 학과 편제(1946)
경성광산전문학교(1939) → (가)서울광공대학(1946)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1946)
- 광산학과 -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1917)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1922)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부 채광학과(1938) → 경성광산전문학교 채광학과(1939) → 학부 채광학과로 승격(1946)
- 금속공학과 -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1917)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1922)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부 야금학과(1938) → 경성광산전문학교 야금학과(1939) → 학부 금속공학과로 승격(1946)
- 기계공학과 - 광산기계학과(1939) → 학부 기계공학과로 승격(1946)
- 응용수학과 - 학부 응용수학과(1946)
- 지질학과 - 학부 지질학과(1946)
2.11. 경성음악학교
1945년 현제명이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성악, 기악, 작곡 등을 가르치는 음악실기학교인 콘서바토리(conservatory)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 해체되었다. 전 세계에서 연구중심 종합대학교에 콘서바토리가 끼어있는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2.11.1. 학과 편제(1946)
2.12. 서울약학대학
서울대학교의 전신 대학 중 유일하게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이후에 편입된 단과대학이다.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로 출발하였다. 1919년 조선약학교로 개편, 1930년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다. 한국전쟁 중 재정악화로 관으로 이관, 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다.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편입된 유일한 전신이다.
2.12.1. 학과 편제(1950)
3. 국대안 파동과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창설로 인해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관공립학교는 모두 발전적 해체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대안 파동'이라 불리는 분규가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 무렵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은 여러 단과대학, 학과로 분할되었고, 각 관공립학교 역시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승계되었다.
3.1. 국립서울대학교안과 국대안 파동
일제 패망 후, 전국 각지의 고등교육기관은 다시 학교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해방에 직면했을 때만 해도 일본인 교직원들은 일본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는 자신들이 강의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들의 순진한 바람과 달리, 해방 직후부터 조선인 학자, 학생들에 의한 대학 접수가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현판에 적힌 '제국'이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지워진 것은 이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제학자 백남운, 물리학자 도상록 등 저명한 조선인 출신 학자들이 새로 출범한 경성대학의 교수진을 맡았다.
거의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고 일부 교토제국대학 출신 소수가 있었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전원은 1945년 10~11월에 걸쳐 미군정청 명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퇴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거의 대부분의 교수진이 공석이 되었다. 이들의 자리는 대부분 여러 제국대학 출신 조선인들로 채워졌으며 제도적으로도 미국식 학제로 바뀌었다. 조선인 교수들은 9월부터 채워지기 시작했고 특히 의학부의 경우 윤일선(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냄.)의 경우와 같이 경성제국대학과 그 부속병원의 조선인 조수들이 교수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향이 짙었다. 법문학부의 경우는 조선인 조수가 소수였으며 대부분은 경성제대 연구원[14] 에 남아있지 않고 졸업 후 관료와 법관(법학부) 및 전문학교, 중학교 교원(문학부)으로 있었기 때문에 찾아서 모셔와야 했다.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경성대학의 총장과 학부장을 임명하여 학부 수업을 재개하기에 앞서 학무국을 통해 9월부터 접촉한 유진오, 조윤제, 백낙준, 백남운, 이병도 5인으로 하여금 교수 인선을 담당하게 하여[15] 12월에 한국학자 27명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조교수로 임명하였다.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명의로 1945년 12월 24일부 발령된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56호에 따르면 법문학부의 교수진은 다음과 같았다. 유진오(헌법), 서재원[16] (민법), 윤동직(형법), 이태진(행정법), 이종갑[17] (상법), 김갑수(국제사법), 윤행중[18] (경제학), 최호진[19] (경제사), 백남운(재정학), 박극채[20] (화폐학), 강정택[* 1907년 울산 출신으로 울산공립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제1고등학교를 나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부수로 연구했다. 해방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제2대 농림부 차관을 역임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당하고 말았다. 기사 참조.](농업정책), 황도연[21] (통계학), 이희승(조선어학/문학), 조윤제(조선문학), 이숭녕(조선문학), 이양하(영문학), 최정우(영문학), 이인영(조선사), 이병도(조선사), 손진태(조선사), 김상기(동양사), 백낙준(서양사), 박종홍(철학), 안호상(철학), 김두헌(윤리학), 이상백(사회학), 이본녕[22] (심리학) 등(법문학부장은 백낙준 겸임).[23] 이들 27명의 출신을 보면 경성제국대학 출신이 11명[24] 으로 최다였고 도쿄제대 4명[25] , 교토제대 3명[26] , 규슈제대 1명[27] 등 제국대학 출신이 19명으로 70%였다. 기타 8명도 도쿄상대 1명[28] 과 와세다대학 5명[29] 으로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은 안호상(독일 예나대학), 백낙준(미국 프린스턴대학) 등 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인 교수회에 의한 교수 초빙 및 교수 자치는 일제가 물러난 조선의 행정을 담당하게 된 미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그 엄혹했던 일제시대 말기에도 학원 자치를 누린 제국대학 출신 교원들은 미군정의 간섭을 아주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입장에서는 막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도 패전국의 군정청의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식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경성대학 교수진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학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구 교내 미군 부대 주둔으로 인한 소란 등으로 인해 1945년에는 제대로 된 학사 운영이 이뤄지지 못했다. 어쨌든 이 해 경성대학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경성대학' 졸업생을 배출하고 새 예과생을 모집하였다. 구제고등학교 학생, 구제 제국대학 학생, 구제 관립대학, 공립대학 및 와세다 게이오 등 사립대학 학생들 그리고 구제전문학교 학생들은 신,편입학으로 예과 및 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1946년) 2월 10일, 당시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법문학부를 개강했다.[30] 경성대학 외에도 다른 관공립, 사립 전문학교도 개강을 했다. 이들은 개강과 동시에 일정 시기 이루지 못했던 대학 승격 작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각종 관공립학교를 통폐합, 하나의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국립대학안을 기획하였다. 초기에는 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 세 학부(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경성대학에 농학부, 교육학부 등을 추가하고 법학부와 문학부를 분리하여 종합대학을 만들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이 안에 따르면, 경성대학 외의 법학전문, 경제전문, 의학전문 등의 각 전문학교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독립하여 발전하게 된다. 일본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 관공립 전문학교로 출발한 도쿄고등상업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도쿄고등공업학교 등은 도쿄대학과 별도로 각기 도쿄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학), 도쿄교육대학(쓰쿠바대학), 도쿄공업대학 등으로 발전하였다. 결과만 놓자면 이 안은 폐기되었다.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모든 관공립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립서울대학교안'이 채택되었다.[31]건국동량의 요람, 대학으로 승격되는 24 남자대학(동아일보, 1946.05.20)
우리 육영계의 반가운 소식은 9월 신학기부터 28개 관공 남녀 사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므로 더 한층 빛을 발하고 있다. 이리하여 문과계통은 4년제 대학으로, 자연과학 계통은 6년제 대학으로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내용 충실을 도모하고 있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나게 되는 대학은 서울대학을 제외하고 관공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된 것이 14교, 민립대학이 9교이고, 여자대학만도 이화대학을 비롯하여 여자사범, 여자의과, 숙명여자대학 등 5교나 된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제1기로 7월 1일부터 4일 간, 제2기로 7월 13일부터 4일 간 각기 모집하는데 금년 은 기왕에 이 학교 저 학교 시험 치던 폐단까지 없이 하고, 다만 두 번만 수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학도의 불타는 연학의 좁은 길을 열어주기로 하였다.
이미 결정된 대학 중에 가장 그 이름부터 특이한 학교는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이라 한 것이고, 그밖에는 대개 전 교명을 단과대학으로만 고쳤다. 연희전문은 종합대학으로, 중앙전문은 중앙여자대학으로 각각 승격준비를 하는 등 각 학교는 아연 활기를 띄우고 있는 터이다.
이제 각 대학의 시험기일 모집인원 등을 조사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 시험(7월 1일/4일)
경성대학 예과(전 성대) 문과 120명(국사/한문) 이과갑 160명(화학/물리), 을12명(화학/생물)
고려대학 예과(전 보전) 법과 경제과 문과 각 100명 문과 2년 보결 약 60명
경성의과대학(전 경성의전) 동 예과 100명(물리화학) 전문부 100명(동일)
승격준비중인 학교
대구농업대학(전 대구농전)
광주의과대학(전 광주의전)
경성광산대학(경성광전)
대구사범대학(대구사범)
경성법과대학(법전)
경성여자의과대학(경성여자의전)
숙명여자대학(숙전)
경성약학대학(약전)
제2기시험(7월7일/13일)
세브란스의과대학(전 세의전) 대학예과 100명(물리/화학/생물) 전문부 80명(동일)
연희종합대학 문과 예과 정치과예과 경제과예과 외교과예과 수리과예과
경성사범대학(전 경사) 동예과 문과 150명 이과 150명 동학부 교육과 국문과 사학과 영문과 체육과(이상 각 40명)
경성여자사범대학(전 여사) 국문과예과 영문과예과 역사과예과 교육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신설준비) 이상 각과 50명
경성경제대학(전 고상) 예과 100명 전문부 200명 동 각학년 보결생 약간
경성치과대학(전 치전) 예과 전문부
이화대학(전 이전) 문과예과 음악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예과 보육과예과 약학과예과 의학과예과(각 모집인원 미정)
승격준비중인 학교
수원농림대학(수원고농)
대구의과대학(대구의전)
경성공과대학(경성고공)
부산수산대학(부산수산전문)
혜화대학(혜화전문)
국대안에 대해서는 1946년 6월 말부터 일부 언론에 의해 그 윤곽이 보도된 바 있었으나, 각 대학은 그에 대하여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입시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국대안 발표는 여전히 각 대학에 있어 급작스러운 것이었다.최고학부를 통합개편, 9월 신학기부터 실시. (동아일보, 1946.07.14)
교육균등의 새로운 이념 아래 문교부에서는 앞서 제정한 신 교육제도에 마쳐, 기왕의 서울대학과 도내의 각종 관립전문(예외로 치과의전도 포함)학교를 통틀어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로 기구와 내용을 고쳐 9월 신학기부터 새로운 출발을 짓게 되었다.
즉, 새로운 대학 제도는 국립대학교의 총칭 아래 문리과/사범/법과/상과/공과/의과/치과/농과/예술과 등 9개의 단과대학과 한 개의 대학원을 두어 유기적인 연락 밑에 운영되는 것이다.
이는 9월 신학기부터 실시되는데 현존한 서울대학은 물론 각종 전문학교는 시설이 그대로 이관되는 동시에, 종전의 전문은 전문으로서, 신입생만은 신제도에 의하여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과대학은 대략 다음과 같이 개편되며, 지금 문제되어 있는 서울대학[32]
의학부, 경성의전 합병문제도 합병이 아니라 기구의 개편으로 해석된다고 할 것이다.-9개 단과대학명=
문리과대학(경대 예과와 경대 문학부, 이공학부의 일부가 주체)
사범대학(경사와 경여사)
법과대학(법전)
상과대학(경제전문)
공과대학(고공과 광전 일부)
의과대학(경대 의학부와 경의전)
치과대학(사립 경성치전)
농과대학(수원농전)
예술대학(신설로서 미술과 음악을 전공) 등 9종이다.
각 전문대학 입학지원(자유신문, 1946.07.03)
배우자하여도 배움의 터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있던 우리나라 청년학도들은 해방과 함께 그 향학열을 높을대로 높아져서 입학시험을 앞둔 시내 각 전문 대학에는 매일 같이 지원자가 쇄도하고 있는데 특히 고려대학 예과, 경대 예과 등은 13대 1이라는 비율을 보이고 있어 여전히 시험지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감이 난다.
다음 각 학교의 지원자수와 장마로 원서접수기일을 연기한 학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대학 법문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경제과 약간명 150
정치과 상동 88
법학과 약간명 110
문학과 상동 60
철학과 약간명 40
사학과 상동 20
경성대학 의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1학년 60 40
2학년 약간명 2
3학년 상동 2
4학년 상동 1
경성대학 이공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약간명 200(단 예과출신을 제외)
경성대학 예과(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문과 120 1612
이과갑 160 1328
이과을 120 528
고려대학 예과(보전)(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예과 200 2670
학부 100
(후략)
3.2. 대학 설립 과정에서의 진통
국대안의 대상이 되는 모든 기관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특히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병 문제가 가장 진통을 겪었다. 양 교 모두 교직원과 학생 가릴 것 없이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른 단과대학과 달리,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은 경성대학 설립 이전부터 합병이 거론될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경대 의학부와 의전 합동(동아일보, 1946.07.08)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합동문제에 대하여 그 귀치가 자못 주목되어 오는 바, 군정청 문교부 군정관 부리-핏탠가 중좌는 5일부 편지로서 경성대학의 학부 학생에게 회답을 보내어 합동의 부득이한 조치를 표명하였다. 이 회담 내용에 의하면 현재 경성의전은 그 설비에 비하여 많은 편인데 비하여, 대학의 설비는 학생 수에 비하여 병원과 학교 설비에 여유가 있으므로 합동하면 분리되어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며 또한 합동은 신학기부터 실시될 것이라 한다.이러한 회답을 받은 동 의학부 학생 일동은 7일에 제2호 성명서를 내어 합동안이 타당치 않음을 지적하여 합동안을 철회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합동은 소멸을 의미-경의전 교직원회서 성명(동아일보, 1946.07.12)
방금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합동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하는데, 경성의전에서는 이에 순응할 수 없다고 지난 10일 하오 6시부터 동 병원 신강당에서 교장 심호섭 씨, 원장 백인제 씨 이하 교직원회를 열고 대략 다음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우리 학교는 이미 광희 3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기 전부터 국립의학교로 창립되었고, 그동안 양으로나 질로나 우리 민족 보건에 공헌한 바가 크고 많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수진으로 보거나 교직원의 향햑열과 상호 화합의 공기를 보거나 울 학교는 가장 우수한 학원으로 자부하는 바이고 우리들은 경성의전의 발전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느끼는 바이다.(중략) 진구한 교사는 그나마 소실되고 병원은 협작해서 해방 조선의 화급한 요구의 하나인 의육의 중책의 완성을 기하기에는 절대적 골난을 느끼는 바이므로, 필요한 시설을 문교당국에 요구했을 따름이고, 역사 깊은 우리 학원의 소멸을 의미하는 합동설을 인정할 위사는 위로는 교수진으로부터 밑으로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추호도 없을 뿐 아니라, 타 학원의 발전을 해하고자 한 사실은 물론, 그러한 생각조차 없음을 성명하는 바이다. 7월 10일 경성의전 교수직원 일동
우여곡절 끝에 통합은 되었으나, 한동안 각 대학은 내홍을 겪었다. 이 시기 일련의 국대안 반대 운동을 흔히 '국대안 파동'이라 한다. 국대안 파동은 교수자치와 관권개입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33] 부터, 좌우익의 대립,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제도와 일본식 교육제도의 충돌이 원인이라는 관점[34] 까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대학안에 반대, 경대 학생회서 성명(동아일보, 1946.07.25)
경성의전과 서울대학 의학부 합동문제가 나자, 서울대학에서는 반대운동을 계속하여 오던 중 지난 13일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포된 후, 다시 2차나 학생대회를 열고 이에 반대 운동을 23일에 재차 다음과 같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나, 11교를 1개의 종합대학으로 통합하여 관선 이사회로서 통제지배하려 함은 학원의 자주권을 탈취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는 것
하나, 학교 수가 감소되고 불가피적으로 학생 수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
하나, 경제학부와 정치학부의 폐쇄와 이공학 계통의 축소는 조선과학발전에 장해를 가져오는 것.
사대생들 건의맹휴(경향신문, 1946.10.13)
서울 사범대학 학생 일동은 국립대학안에 대하여 11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구 조건을 들어 맹휴를 단행하는 동시에 학교당국의 긴급선후책을 요망하였다 한다.
하나, 교육자, 학자, 문화인, 기타 각계 명사로서 민주주의적인 가칭 "국대안 심의기관"을 설치하여 그 모순점(이사회, 학생처 등)을 해결시킬 것
둘, 학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완전보장하는 학생 자치권을 승인할 것
셋, 학내 경찰 간섭을 절대반대하며 이에 관하여 학장은 전 책임을 질 것
넷, 이상 요구조건을 완전 해결하지 못한 시에는 학장은 인책 사임할 것
특기할 만 한 점은 이 시기 많은 좌익계열 학자들이 경성대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백남운, 리승기, 도상록 등은 월북하여 이북의 새로운 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 국문학자 김태준처럼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처형당한 이도 있었다. 북행을 하거나, 이 시기 국립대학 안에 반대한 학자 중 다수가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 인맥으로 얽힌 사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초기 김일성대학의 창립에는 경성제대, 도쿄제대, 교토제대, 규슈제대 등 다양한 제국대학 출신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의 공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제국대학의 후신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초창기가 경성제대 출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일본 사학 출신의 리버럴한 학자들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과 대비된다."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학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
학생들도 적지 않은 수가 경성대학과 국립서울대학교를 떠났다. 좌익계열 학생들은 북행이나 군 입대를 선택했다.
김종필과 남덕우가 국대안에 반대하여 서울대 사범대를 중퇴했다는 설명이 있었으나, 본인들을 부정하고 있다. 김종필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덕우 역시 본인이 집필한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 보면 해방 당시 을지로에서 프린트사를 운영하다가 이듬해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 전신)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정경학과에 입학했다고 말하고 있다."(기자) 서울사대 중퇴후 서울대의 국립대학안을 반대하다 피신 차원에서 사병입대했다는 소문이 있다."
"(김종필) 완전히 연기도 안나는 소문이다. 나는 사실 '''국대안을 찬성했다. 경성사범학교가 승격되는데 왜 반대하겠는가'''. 3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당시 소형 자동차까지 타고 학교에 다닐 정도였는데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제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공원앞 모병소에 원서를 냈다 .그리고 신설부대인 13연대로 들어갔다 두들겨맞고 탈영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기사링크
그러나 국대안 파동 당시 국대안을 반대했다고 증언하는 것은 해방 직후에 자신이 좌익 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설령 학생 시절 국대안에 반대했더라도 솔직하게 증언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3.3. 국립서울대학교의 탄생
우여곡절 끝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단과대학과 학과는 다음과 같다.
- 문리과대학 -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중어중문학과, 언어학과, 사학과, 사회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정치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지질학과, 생물학과, 의예과
- 공과대학 - 전기공학과, 기계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화학공학과, 야금학과
- 농과대학 - 농학과, 임학과, 농공학과, 수의학과, 농화학과, 농생물학과, 농경제학과
- 법과대학 - 법학과
- 사범대학 - 교육과, 국문과, 영문과, 사회생활과, 수학과, 물리화학과, 생물과, 가정과, 체육과
- 상과대학 - 경제학과, 상학과
- 예술대학 - 미술부(제1회화과, 제2회화과, 조각과, 도안과), 음악부(성악과, 작곡과, 기악과)
- 의과대학 - 의학과[35]
- 치과대학 - 치의학과
- 예과
마지막으로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이 관으로 이관되어 서울대학교에 편입됨으로써 서울대학교로의 통합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후의 학과 변천과정은 서울대학교/학부 항목을 참고할 것.서울대학교 예과를 폐지 (경향신문, 1948.05.25)
국립대학교의 예과 제도는 금년 예과 졸업생 870명을 최후로 폐지하게 되었다는데, 동 예과는 일제시대에 창립된 후 20년 간 존속되어 왔었으며, 국립대학제 실시로 말미암아 없어지게 되었는데 금년 졸업생들의 취학 희망은 다음과 같다.
-문리대 지망 195-정치과 71-영문과 22-불문과 21-철학과 21-사회과 19-상대 16명-법대 18명-예대 1명-농대 4명-공대 291명-의대 131명 (이상 21일 현재)
4. 관악캠퍼스 이전
1971년 관악캠퍼스 조성이 시작되어 1975년 완료되었다. 서울대학교/캠퍼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