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특수전사령부/흑역사
1. 개요
세계 각지에서의 독재정권에서 나타났듯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특전사는 군사 정권에서 손쉽게 동원가능한 병력으로 권력 찬탈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친위대로 동원되어 이용된 어두운 과거가 있다. 이용된 사건만 해도 군사 쿠데타 군사반란 참여, 사법부 침해, 민간인 유혈진압 및 대량학살 등 그야말로 다양했다. 안좋은 의미로 삼관왕을 저지른것이다. 이로 인해 실추된 이미지는 1990년대가 넘어서야 점차 회복되기 사작했는데, 광주에선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베레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1980년대에는 호남에 위치한 여단들 뿐 아니라 모든 특전여단들에서 휴가시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나가도록 권고되었던 때도 있었다고. 물론 지금은 그런거 없이 특전복 입고 나가고 광주 주민들도 특전사 군복에 대해 전혀 뭐라고 안한다.
2. 군사반란 참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12.12 군사반란 때 계엄군으로 특전부대들이 가담했으며, 박정희 정권 말기에 부마민주항쟁 때도 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출동·진압하였다. 특히 12.12때는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준장이 부하인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을 시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때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사후 중령 추서)이 사망한다.
전두환이 1공수특전여단장 출신, 노태우가 9공수특전여단장 출신이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결성한 조직인 하나회로 맺어져 있던 이들 중에는 1여단장(박희도), 3여단장(최세창), 5여단장(장기오)이 있었으며, 덕분에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진압에 특전사 병력을 거리낌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12.12 사태 때 1, 3, 5여단과는 달리 9여단은 반란군 세력이 아닌 육군본부 통제하에 있었던 부대였다. 당시의 9여단장은 윤흥기 준장으로, 육사 출신인 다른 공수특전여단장들과는 달리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인데다 성격 또한 우직했고, 참모장까지도 갑종출신이라 전두환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9여단 병력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다. 하지만 쌍방간에 병력 동원을 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 제안에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이 속고 만다. 그래서 육군본부의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은 윤흥기 9여단장에게 회군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9여단은 회군했다. 이후 윤흥기 여단장은 경질되어 이진삼으로 갈아치워졌다.
3.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제1공수특전단 시절이던 1964년에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영장을 발부할 것을 요구(!!!)''' 하며 판사 집에 쳐들어가는 짓을 했다. 당시 '''일개 군부대의 대령(최문영 대령)'''휘하의 병사들과 전역 민간인들이, 대통령의 명령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사법부에 대한 테러를 한 것이다.'''[1]
이 어처구니 없는 만행에 대해서는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을 참조.
4.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이 글을 읽기 전에 알아둬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바로 당시 특전사의 구조에 대한 것이다. 하나회의 진 최종보스인 전두환은 한 때 1공수여단장을 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1사단장을 한 후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전두환은 후임 1공수여단장을 후배인 박희도에게 물려줬다. 또한 하나회의 페이크 최종보스인 노태우 역시 9공수여단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특전사 수뇌부에는 하나회가 잔뜩 포진되어있었고 당시 특전사령관이 정병주였긴 하지만 휘하 여단장들 대부분이 이미 정병주가 아니라 전두환을 자신의 직속상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군대에서의 서열보다 하나회에서의 서열이 더 중요했기 때문인데 하나회가 다름아닌 전두환이 박정희에게 만들어다 바친 군내 사조직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회에서는 유학성이나 황영시 등이 별 3개인 중장 계급을 달고도 별 2개인 소장 계급을 달고 있는 전두환의 부하 노릇을 한 것이다. '''한 마디로 특전사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미 손아귀에 넣고있던 것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으로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졌는데, 당시 3여단, 7여단, 11여단 소속 군인들이 폭도들 진압을 명분으로 광주광역시의 민간인들을 70cm 길이의 '''쇠심이 박힌''' 장봉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M16을 난사해 쏴죽였으며,[2] 여성들의 경우 강간이나 성폭행까지 가했다.
이들 진압작전은 흔히 충정훈련으로 불리우는 '''공격적인 유혈진압법'''이 사용되었다. 방패없이 진압봉과 무기만으로 진압을 하는 방식으로, '''이 훈련으로 다른 특수전 훈련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정규적인 특수작전에 투입되어야 할 부대가 시위진압 부대로 변질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시위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젊은 청년들을 보이는데로 잡아들였는데, 남성들의 경우 반송장이 될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여자들의 경우 산으로 끌고가 집단으로 강간과 성폭행을 일삼았으며 이를 넘어서는 아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데로 총격을 난사하기까지 했다.[3]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계엄군들이 갖고 있던 '''"빨갱이나 불순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4] 나중에 진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물론 이는 그 전의 부대원들 사이에 돌던 광주, 전남에 대한 혐오적인 인식을 세뇌한 것도 한 몫한 바 있다. 지금도 광주의 나이 든 사람들은 "공수부대"라고 하면 매우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광주민주화 운동시기에 진압군의 만행을 알게 된다면 특전사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전 하나회 소속 장군들이나 계엄군 출신들은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하고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오히려 그 때 당시 '''북한에서 간첩을 보내어 이를 방조했다는 식으로 왜곡된 주장을 하기도 한다.'''[5] 관계자 전원이 법정 최고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에 저 따위 태도라니 참 답이 없다.
문제는 88년 이후로 국회 광주청문회등을 통해 양심선언한 일부 특전사 출신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에 부정적인 의견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범죄를 증언했다고 보복하는 조폭들과 같은 심리로 자신들의 동료에게 협박과 테러'''를 가한 바 있다. 이쯤되면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는 도대체 특수부대인지, 아니면 범죄 조직인지 헷갈릴 지경이다.''''''『89년 1월 청문회에서 양심선언한 뒤 같은 동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전화를 걸고 집에도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한 때는 협박때문에 자살도 시도했습니다. 뒤를 이어 양심선언하겠다는 동기생이 있었지만 제가 협박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습니다.』'''〈7여단 33대대 최영신(崔永信.41.중사)씨〉
(중략)
〈「광주로 간 군인들」이 연재되는 동안 독자뿐만 아니라 당시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원들부터 수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증언자 상당수는『네가 그런 소리했느냐』『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광주로간군인들>6.끝.아물지 않는 후유증
2000년 5월 19일 MBC 스페셜 (충정작전, 그후 20년) 방송 내용에 따르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7여단 출신 최영신이 주남마을 학살의 진실을 증언하자 '''특전동지회에서 협박은 물론 심지어 테러까지 가한 사례가 있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유혈진압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전범들과 똑같은 주장을 지금도 하는 셈이다.
게다가 위의 최영신이 2018년에 다시 한 번 인터뷰 한 내용에 따르면, 무려 '''계엄군 출신자들 중 절반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기들이 저질렀던 쓰레기 짓을 인정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고발자인 최영신을 배신자 취급하는, 나치 전범이나 일본군 전범처럼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도 진급 못한게 한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죽어도 뉘우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최씨는 양심선언 후 “홀가분했고,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양심선언 후 관련자들의 고백이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방부는 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박했고, 그는 같이 군생활을 한 일부 동료들에게도 배신자로 여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그 때 양심선언 한 것에 대해 잘했다는 동료들이 절반, 싫어하는 동료들이 절반이에요. 경조사 자리에서 만나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죠.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후배가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죠"
단죄 못한 5·18 계엄군 범죄 - ‘5ㆍ18 김 소령 악행’ 알린 최영신씨 “계엄군 양심고백 이어질 줄 알았는데…”
거기에 11공수특전여단의 경우엔 뻔뻔하게도 부대 입구에 전두환 계엄군 승전 기념비를 자랑스럽게 전시해 두고 있다가 2019년 5월 16일에 광주시와 5월단체의 협의로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의 5.18 기념 공원의 발판으로 묻히게 되었다.
이 때 실추된 이미지는 2000년대가 넘어서야 간신히 겨우 회복된 정도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베레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정도였다.[6] 때문에 전남 담양에 위치한 11여단에서는 출타시 사복착용을 허용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때 11여단은 5.18 당시 광주에서 잔인한 양민 학살이라는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광주시 주남마을 버스승객 학살, 주남저수지 어린이사살. 교육사와의 오인교전 및 이에 대한 분풀이로 주변 가정집들에 쳐들어 가서 가택수색을 핑계로 집안에 있던 민간인 사살 등 5.18당시 민간인 학살은 주로 11여단이 저질렀다고. 1999년에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3, 7, 11여단을 방문해서 부대원들의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 주는 행사가 있었다.## 물론 이런 1회성의 행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두고두고 국가와 국민에 봉사하면서 갚아가야 할 죄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당시 '''한일협정 자체가 큰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정부정책에 반대를 한다는 (그들이 인정할 수 없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정면도전을 한 셈이니, 친일부역자로 봐도 상관없을 행위를 한 셈이다![2] 심지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임산부'''마저 사격을 가했다.[3] 심지어는 단지 '''분수대를 돌아 나가려는''' 버스 운전사마저 아무 이유도 없이 사살했다.#[4] 애초에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쏴죽이는 건 물론 임산부와 어린 아이들까지 쏴죽이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까지 하는 행위를 위의 "빨갱이나 불순세력으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당시의 계엄군들이 얼마나 답이 없는 족속들인지를 증명한다. 이쯤되면 당시 광주시민들 입장에선 군사독재 정권 시절 특전사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인간들만 모아서 입대시킨 부대인가 싶을 정도.[5] 이에 보수적인 조선일보 기자 조갑제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한 정황을 '''무슨 개소리냐?'''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들의 리더인 전두환조차도'''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라고 금시초문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보안사 출신인 전두환이, 북한개입이 이뤄졌다면 몰랐을 리가 없다. 아니면 그 당시 보안사나 중정(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서리도 겸직하고 있었다.)의 정보력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따라서 이런 북한관련 이야기는 자신이 그렇게 잔인하게 민간인들을 학살한 학살자라는 입장을 회피하기위한 일종의 자기 최면에 가깝다.[6] 오죽하면 광주에서 베레모를 쓰고 택시에 탑승하려다가 택시기사가 베레모를 보고 승차거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