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자 군인, 그것도 '''하나회'''에 몸담았던 대한민국 육군의 '''정치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
2. 생애
1937년 2월 10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화산중석[2] 과 구봉광업소[3] 중 1개 광구의 소장을 역임해서 나름 유복했다고 한다.[4] 대전고등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부여고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졸업했다고 한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 15기로 입학해 1959년에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고명승, 나중배, 민병돈, 권영해 장군이 있다.[5] 임관자 성적 기준으로 176명 중 120등으로 졸업했으며 첫 보직은 제25보병사단 GP장이었다고 한다.
본인 발언에 따르면 생도 시절 '''장준하의 사상계'''를 읽으며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1. 군인 시절
다른 하나회 장성도 그랬듯, 이진삼도 윤필용 라인에 속했다. 애초에 윤필용과 만난 계기가 전두환 때문이었다.# 한편 윤필용의 권유로 방첩부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변영권, 조동화 테러사건으로 조사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월남으로 떠나게 된다.
1968년 11월, 서산 무장간첩 섬멸작전에 투입되어 무장간첩 2명을 포복으로 20m까지 가서 수류탄 투척으로 폭살한 바 있다.
중령 시절 제8보병사단 21연대 3대대장을 맡았다.[6] 윤필용 사건의 여파로 제15보병사단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7] 이 당시 전역을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차규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소장),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 노태우 9공수여단장(준장) 등의 도움으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이동했다.
대령 때는 국방대학원에서 수학한 뒤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61보병연대장, 육군 사격지도단장직을 역임했다.[8] 1980년 1월 육사 15기 동기생 중 최초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1980년 7월 한일수 장군(육사 11기)에게 사격지도단장직을 이임하고 제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부임했다.
준장 시절 특전사 참모장을 지내며 특공무술을 고안한 창시자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정작 특공무술 항목에는 이진삼의 이름이 없다. 특공무술을 고안한 창시자 명단에 장수옥, 박노원, 이원익 밖에 없어 논란이 있다.
1980년에는 특전사 참모장에서 자리를 옮겨 육군특수전사령부 제9공수특전여단장에 취임했는데, 이는 단순히 운 좋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이 강하다. 바로 하나회의 자기 세력 챙기기이자 비 하나회 견제 차원에서 이뤄진 인사였다.
이진삼의 바로 전임 여단장인 윤흥기 준장은 바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진압군 측'''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갑종장교 출신으로 하나회가 아니었다. 윤흥기 장군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특전사 9여단 병력을 데리고 인천직할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출동했는데, 서울로 가던 도중에 진압군 측 최고 지휘관이었던 육군중장 윤성민 육군참모차장[9] 이 출동을 취소하고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군끼리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상호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자는 전두환 장군 측의 신사협정 제안을 진압군을 지휘하는 육군본부 측이 받아들이는 바람에 진압군측 총책임자였던 윤성민 장군이 윤흥기 장군에게 회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윤흥기 장군은 반란군 측에 가담하지 않고 진압군의 명령에 따라서 전두환에게 밉보인데다가, 하나회가 유달리 경계한 갑종장교 출신이라서 전두환의 말을 잘 듣는 하나회 인사로 갈아치울 필요가 있었고, 그 하나회 인물이 바로 이진삼이란 얘기이다.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소장 때 제21보병사단장, 육군정보사령관[10] , 제3군단장을 거쳤다. 하나회 소속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겉돌았는데, 이는 당시 하나회 내에서 전두환 계파가 노태우 쪽 인사들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당장 21사단이나 3군단은 육군 내에서 가장 근무환경이 열악한 편에 속한다.
이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노태우 라인에 속했던 이진삼이기에 노태우의 후광으로 육군참모차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11]
그리고 이진삼은 당시 3군 사령관인 전두환 라인 고명승보다 중장은 1년, 대장은 1년 반이 늦었지만 1990년에는 고명승을 꺾어버리고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12] 여기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계산도 포함되었는데, 전두환 계파인 이종구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영전시키면서 자신의 라인인 이진삼을 육참총장으로 올려서 일종의 대결구도로 만든 것.[13] 그러나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인 이종구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었는데[14] 당시 국방개혁 문제가 요인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중심의 권한을 줄이고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의 권한을 키우려고 했는데 여기에 이진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반발했고 전두환 - 노태우간의 하나회 계파갈등이 얽히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결국 임기 6개월을 남기고 전두환 라인인 김진영[15] 에게 자리를 넘기며 퇴임한다. 이종구 장관도 15일 뒤에 동반 경질되었다. 김진영은 전두환 라인이었고, 노태우 입장에서는 자신의 대통령 임기도 끝을 바라보고 있고 인망이 넓은데다가 전두환 라인의 수장격인 김진영을 버리기 부담스러운 것도 있어 임기 말에 일종의 유화책을 쓴 것.[16]
2.2. 정치 경력
1991년 예편 후에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체육청소년부장관에 임명, 노태우 정권 만료 때까지 재직했다.
1993년 정보사령관 시절의 정치테러로 인해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징역 2년을 구형받았는데 당시 수사검사가 천성관이었다. 그래서인지 훗날 이진삼이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천성관이 비리 의혹으로 검찰총장에서 낙마하자 매우 역력하게 좋아했다는 후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종필을 저지하기 위해 신한국당 후보로 부여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김종필이 워낙 거물이었던지차 2배가 훨씬 넘는 차이로 참패하게 된다. 이후 1998년 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나라의 2인자가 된 고향 선배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탈당함으로써 정계에서 잠정적으로 은퇴했다.
이후에도 부여 출신으로 이 곳을 기반으로 하는 김종필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권에서 그를 띄워주었고, 결국 JP가 은퇴하고 자유선진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결국 2008년에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부여군-청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18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국회의원 임기를 거치며 여러가지 논란을 일으켰고 2012년에는 같은 1군 사령관(대장) 출신인 김근태 장군에게 패하여 재선엔 실패했다.
당선된 김근태가 의원직을 잃으면서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 의사를 표명한 바 있으나, 정식으로 출마하지는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2.3. 근황
2016년에 '''별처럼 또 별처럼'''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중부대학교 등 충청권 대학교에 (측근들을 대동하고) 출판기념회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에는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해당 기사(뉴스타운) 그리고 누군가가 불법으로 신형 전투복을 입수, 착용한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17]
이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 사건사고, 논란
3.1. 정치 테러 및 약속 불이행
육군정보사령관 시절 자신과 이상범 정보사 감찰과장 등이 정치 테러에 가담한 이씨 일행 4명에게 각각 2억원씩 지급하기로 약속하고서는 일을 성사시킨 후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이진삼의 주도로 이뤄진 주요 정치 테러는 다음과 같다. 이쯤되면 이진삼은 거의 김태촌 수준의 정치깡패다.
- 1985년 11월 15일: 상도동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가택 잠입, 서류 탈취
- 1985년 12월 24일: 우이동 문익환 목사 가택 잠입, 서류 탈취
- 1986년 5월: 신대방동 양순직 신한민주당 부총재 가택 잠입, 서류 절취
- 1986년 6월: 양순직 신한민주당 부총재 린치 사건(신대방동 자택 앞)
- 1986년 7월: 민주당 김동주 의원 린치 사건(여의도 삼부아파트 앞)
3.2. 군번줄 지적 논란
제18대 국회의원 재직 중 천안함 피격사건 관련 청문회에서 군기 문제를 들먹이며 각군 참모총장들에게 군번줄 안 차느냐와 경례 태도가 불량하다는 등의 다소 주제에서 벗어난 지적을 하였다. 김태영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은 '''군번줄은 전시에 필요한 물건이지 평시인 국회 청문회에 차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다. 물론 군인이라면 항상 차고 있어야하는 군번줄을 평시에 차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는 점에서 김태영 장관의 태도도 비판을 받을 점이 많았고 이진삼도 김태영 장관을 질책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진삼이 과연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점과 ''''그 시점에서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는가''''라는 점.
'''이 지적은 당시 천안함 피격사건이라는 한시가 급한 중요 주제를 다루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시간낭비성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후 YTN이 돌발영상 코너를 통해 이진삼이 육참총장 시절에 경례를 불량하게 하는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올려서 그가 기초군기 상습위반자로 후배들 욕할 자격이 없음을 까버리기도 했다.링크 군내 불법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핵심 인 건 덤.
이진삼의 기초군기 위반 행위는 이것만이 아닌데, 당시엔 규정상 포제 모장을 달아야 했던 전투모에 근무모용 철제 모장을 달고 다니고, 전투복이 아닌 육군 근무복 착용시엔 헌병이나 특전사 소속원, 단화 미지급으로 인해 근무복에도 전투화 신어야 하는 수도방위사령부 병 등을 제외하곤 단화를 신어야 함에도, 지 계급을 내세워 근무복에 상시 전투화를 신고 다니는 위규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모 네티즌의 말에 의하면 이진삼은 "장성 시절에도 하사 위치에서나 생각하고 처리할 만한 자잘한 일에 신경 쓴다"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이진삼 하사''''였다고 한다. 저 발언 영상을 보고 예비역 뿐 아니라 이진삼의 실체를 아는 현역 간부들도 모두 비웃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해군참모총장 김성찬 제독에게 "해군은 뭔데 장군이라고 안 하고 왜 제독이라고 하고, 정복에 수장을 쓰느냐? 육군처럼 장군이라고 하고 별 계급장만 달고 다녀라"는 개념없는 망언을 재탕하면서 돌대가리 인증을 제대로 했다.#
3.3. 그 외 논란
- 국회 국방위에서 해공군 축소론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육군의 기계화와 병력 감축을 절대 반대하는 등 스스로 구닥다리 쪽수 위주 보방부 마인드에 쩔은 퇴물 똥별임을 또 다시 인증했다.# 이진삼이 육군참모총장을 하던 시절에 이종구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과 갈등을 빚던 맥락을 생각해보면 그 때와 똑같은 수준의 행동을 하는 셈이다.
- 이런 이유에서 이진삼은 "예전엔 방산비리가 대형 비리였지만, 요즘은 생계형이다"라는 너무나도 황당한 발언을 한 한민구 국방부장관, 갑질했다가 쫓겨난 박찬주 예비역 대장, 훈련을 빙자한 갑질로 결국 좌천된 윤의철 육군 중장과 더불어 아예 대놓고 전 국민에게 개무시를 당하며 병졸 취급당하는 단 넷 뿐인 장성이다. 그러나,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적어도 한민구는 이진삼, 박찬주처럼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사실 한민구의 경우 발언 자체는 비리를 옹호할 목적이 아니었지만 단어 선정이 잘못돼서 필요 이상으로 욕을 먹은 감이 없지는 않다.
- 그 이후에도 2011년에는 초대를 받지도 않은 지역 축제에 간답시고 육군 헬리콥터를 사적으로 동원해서 타고 행사장에 착륙해 시민들과 군에 민폐를 끼치는 등[18] 주제 모르는 똥별 마인드에 입각한 행보를 일삼다가, 결국 다음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공천에서 혼자 탈락했다.[19] 그 뒤 무소속으로 나와서 한 자릿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이런 행보를 보이니 군대 동료들이 이 인간에게 하사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리는 게 당연하다.
4. 여담
- 2004년에는 부인상을 당했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7. 둘러보기
8. 관련 문서
[1] 이일과 동성동본으로, 용인 이씨 종친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축사 자격으로 자주 참석한다.[2] 1993년 폐쇄된 청양중석[3] 1971년 폐쇄. 대한민국 자유지구 중 최대의 금광[4] 1950년대에 '''RADO 손목시계'''를 찰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5] 셋은 하나회 소속이고, 권영해는 소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지만 후에 국방부 장관이 되어 하나회를 청산한다.[6] 당시 1군사령관은 최세인 대장, 5군단장은 류병현 중장, 사단장은 박노영 준장, 연대장은 노태우 대령이었다.[7] 당시 사단장은 김학순 장군으로 박노영 장군과 동기생이다. 김학순 장군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발령받으면서 박완식 장군이 신임 사단장으로 부임했다.[8] 이 당시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 총재직을 맡고 있었고 서울 태릉에서 국제사격선수권대회를 개최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몹시 진노했다고 한다. 청와대에 불려간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은 후임 사격지도단장을 찾다가 주위의 추천으로 이진삼을 발탁했다.[9] 참모총장 정승화는 합수부측에 납치되는 바람에 육본 2인자인 참모차장이 진압군 총지휘관이 됐다.[10] 본인의 전공인 정보계통 보직으로 발령받아서 일했지만 정치테러를 사주하는 등 독재정권에 빌붙어 문제를 일으켰다.[11] 이진삼이 5공시절 한직에 있다보니 야전군사령관 등 군 수뇌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관례였던 육군참모차장을 거치게 한 것이다. 당시 육참총장은 이종구였다.[12] 또한 동기였던 민병돈 육사 교장도 1989년 3월에 육사 45기 졸업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항명하면서 자의반 타의반 군문을 나왔고, 마침내 이진삼은 육사 15기의 실세가 되었다.[13] 다만 이종구는 노태우와 경북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여서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14] 둘이 싸운게 나름 유명해서 훗날 이진삼이 기자들한테 '내가 이종구씨랑 사이 안 좋은거 다들 알잖아요?'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5] 김진영은 육사 17기의 선두주자였고 33경비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전두환이 여러모로 총애하던 인물이었지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서 한직을 맴돌았다. 노태우는 김진영도 날리고 싶어했으나 자신의 퇴임 이후 하나회가 분열될 것을 우려했고, 김진영이 노태우에게 충성맹세를 하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대장을 달아준 다음, 참모총장을 달아주게 된다.[16] 당시 라이벌은 노태우계인 이문석이었는데, 노태우 본인이 이문석을 앉힐 경우 생길것으로 예상된 전두환계의 반발과 결정적으로 이문석이 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아 건강문제가 생긴 것도 원인이었다.[17] 거기에 입은 점퍼는 비행 점퍼로 조종사, 공수기 승무원, 기상무장사 등 공중근무자가 아니면 입으면 안 되는 거다. 물론 일선 행정직에 있더라도 입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원래 조종특기인 사람들이다. 게다가 전쟁 나면 전투기를 몰아야 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18] 헬기 제공은 국방부 가 제안하였으며 대책이 없던 이진삼 측은 이 제안을 승낙했을 뿐이긴 하나, 이건 자신이 안 타겠다고 했으면 그만이었다. 얼씨구나 하고 탄 시점에서 이미 똥별이라고 셀프인증을 한 셈이다.[19] 이회창도 안 나왔는데, 이 쪽은 당권을 잡은 심대평과의 갈등을 빚고서 자진해서 공천을 반납했다. [20] 형과는 2살 터울인 듯 하다. 갑종장교 153기 출신으로, 최종 직책은 육군정보사령관이었으며, 그가 사령관으로 재임할 당시 오홍근 테러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대한중석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21] 황교안, 박한철 등과 연수원 동기이다.[22]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3] 신당 합류[24]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25]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26] 2012년 3월 14일 자유선진당 탈당[27] 이진삼의 육사 후배인 김근태 장군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