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조선 경종)
懿陵
1. 개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왕릉이다.
효종의 영릉(寧陵)과 같은 양식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인데,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일직선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반면에, 의릉은 완벽히 상하의 위치로 능이 배치되어 있다.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다.
의릉은 1970년 사적 제204호로 지정됐다.
2.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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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에 의해 훼손된 시기의 의릉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즉위하고 승하할 때까지 어떻게 생각하면 참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군주였고, 죽어서도 안습했다.
경종의 뒤를 이었던 영조가 긴 재위 끝에 죽고 16년이 지난 정조 16년에 윤구종이 혜릉(경종의 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무덤)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경종의 능호)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하였다. 경종에게는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 그러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수 있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이에 동조했다. 당대 사람들도 영조가 경종에 대해 보인 우애를 진심으로 믿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거니와, 엄연히 경종 역시 한 시대의 국왕이었고 그 ‘삼종혈맥(효종-현종-숙종)’을 이어받은 정통성이 보증된 군주였다. 반상 구분이나 예법 엄격하게 따지던 왕조국가 조선에서 국왕의 능침 앞에서 말 타고 지나가면서 내리지도 않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다. 당연히 윤구종은 역적 수준으로 국문을 받았고, 이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
이 윤구종 사건은 원래 정언 유성한이 정조에게 '''"너님 공부도 안 하는데다 여악이 난잡하게 논다는데 그래서야 되겠음??"'''이라는 불온한 상소[1] 를 올려서 신하들이 죄를 줄 것을 청하며 뒷배경을 조사하다가 밝혀진 것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유성한이 과거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발언을 한 것과 유성한과 윤구종이 같은 패거리임을 거론하며 '''"경종 전하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는 역적 놈들이 사도세자를 핍박했는데 이런 자들이 경종과 영조, 사도세자에게는 충성했겠음???"'''을 주장하며 사도세자 신원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해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와 사도세자의 추승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이것이 바로 영남 만인소였다. 경종의 죽음부터 사도세자의 죽음까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 된 것.
압권은 1960년대 이 의릉 가까운 자리에 중앙정보부 이문동 청사[2] 가 들어섰을 때 중정 직원들이 능 앞에다 자기들 놀이터를 만들었다(…). 농담 아니고 정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덤 앞에다 연못과 계곡을 만들고 거기다가 비단잉어를 풀었다. 실제로 연못을 밀어내기 전만 해도 의릉 매표소에서는 잉어 먹이를 팔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다 밀어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있으며 구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여기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3. 교통편
여담이지만 의릉은 택시 기사들도 그 위치를 잘 몰라서 의릉으로 가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기사들이 많고, '안기부 자리 가 주세요'라고 하거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요' 해야 가기 쉽다. 오늘날에도 서울에 오래 살았던 중장년층은 의릉 부지를 '안기부 자리'로 기억하며 그 당시에는 이 주변이 굉장히 삼엄했다고 회상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려면 지하철의 경우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이문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거나, 혹은 서울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거나 7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 버스 120, 서울 버스 147, 서울 버스 1222, 서울 버스 261번을 타고 의릉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