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나카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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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선수시절...이때만 해도 동안소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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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
'''이름'''
이마나카 신지(今中 慎二)
'''생년월일'''
1971년 3월 6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사카 부 가도마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89~2001)
'''지도자 경력'''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투수코치 (2012)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투수코치 (2013)
KIA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 (2016)
'''1993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이시이 다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드래곤즈)'''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2012년
3.2. 2013년
3.3. 2016년


1. 개요


'''유리의 에이스'''
주니치 드래곤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명 좌투수였다. 등번호는 14번.
1988년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1]를 졸업하고 주니치에 1순위로 드래프트 되어서 주니치 마운드의 핵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전성기 때에는 비쩍마른 체격에도 불구하고 최고구속 146km정도의 준수한 직구를 던졌고 사기적인 각도의 슬로커브를 섞어 던지며 타자들을 농락했다. 포크볼 역시도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시속 80km이하의 초 슬로커브까지 던지기도 했다. 컨트롤도 상당히 좋은 투수였다. 전체 커리어에서도 삼진 & 사사구 비율이 예술적이다. 이마나카 신지 삼진 모음집
이마나카 신지의 통산성적

2. 선수 시절


신인이던 1989년에는 체력 강화와 연습에 주로 전념했다. 40이닝을 던졌고 성적자체는 별로였지만 기대주로써 구단에서 밀어주었다. 프로 2년차인 1990년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며 10승과 6완투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진가는 프로 3년차인 1991년부터였는데 이때부터 크고 아름다운 탈삼진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파워피처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좌투수임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구속이었고 타고난 핀포인트 컨트롤에다 본격적으로 물이오른 전매특허인 슬로커브까지 더해지니 상대팀 타자 입장에선 수싸움에서 밀리게 되고 상대하는데 애로사항이 꽃필수밖에 없었다.
1993시즌 그는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게 되는데 '''249이닝'''을 던지면서 '''17승''' 7패를 기록했고 '''247삼진'''을 기록해서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동시에 차지했다. 거기에 '''완투 14회''' 역시 시즌 1위. 결국 사와무라 상의 7가지 조건[2]을 모두 채우면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팀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20승도 가능했을 포스였다. 이후 1996 시즌까지 시즌 180이닝 이상을 던지며[3] 94년 사와무라상 수상자인 팀 동료 야마모토 마사와 왼손 원투펀치로서 활약했고, 사람들은 이마나카가 역사에 길이남을 대투수로 오래오래 활약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무리한 혹사기용으로 1996년 이후 그는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호시노 감독이 주니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망가뜨린 두 명의 에이스가 노구치 시게키와 이마나카 신지였는데 당시에 성질이 워낙 불같았던 호시노였는지라 부상끼가 있었을 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도 있고, 호시노가 무리하게 돌려댄 부작용까지 더해져서 1996년 이후의 커리어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트라우마로 남게된다. 이때 붙은 별명이 '''유리의 에이스'''... 하지만 이건 이마나카가 원래 유리몸이라기 보다는 이상이 있을 때 제때 관리를 받지 못한 탓도 컸다. 다르빗슈 유다나카 마사히로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강철어깨가 흔한 것도 아니고 다만 이마나카는 이들처럼 이닝을 마구 먹어주기엔 괴물같은 내구성은 없었는데 호시노가 무식하게 굴린 결과가 결국 화를 불렀다.
1997년 이후로 그의 구속은 130km대 초반을 넘기지 못했고 재기하려고 몸부림치다 그것도 헛되어서 결국 2001년 겨우 30세 나이로 은퇴하고 만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도 이마나카의 선수생활을 1996년까지의 전성기와 1997년부터 은퇴시기인 2001년까지로 나눌 정도로 그의 급추락을 표현하기도 했다.

3. 지도자 시절



3.1. 2012년


2001년 은퇴하고 나서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왔는데, 그동안 NHK, 주니치TV에서 해설자 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현장을 12년을 떠나있었다. 그러나 2012시즌부터 주니치 드래곤스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하면서 팀을 떠난지 12년 만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현역시절 전매특허였던 핀포인트 제구와 명품 슬로커브를 전수시킬지에 대해 주니치 팬들의 기대가 크기도 하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었는지 선수시절엔 꽤 동안이었는데 2012년 주니치 홈피의 사진을 보면 폭삭 늙어버렸다.

3.2. 2013년


곤도 히로시 1군 투수코치가 사퇴하자, 2013 시즌부터 1군 투수코치의 직책을 맞게 되었다. 1군 불펜투수코치 담당이었지만, 성적 부진으로 인하여 사실상 벤치에 앉아는 있으나, 직책이 없어져 버렸고 결국 2013 시즌이 끝난 후 사퇴했다. 사퇴한 뒤로는 다시 NHK에서 야구해설자를 하게 되었다.

3.3. 2016년


2015 시즌이 끝난 후, KIA 타이거즈 마무리캠프 투수 인스트럭터로 합류하게 되었다. 나카무라 타케시 코치가 2015년 6월에 부탁을 하게 됐고, 결국 2015 시즌이 끝난 후 마무리캠프에 합류했다. 주로 좌완투수들을 코칭해주고 있다고 한다. 선수들을 편견없이 지도하기 위해 일부러 선수 기록을 보지않고, 던지는 폼만 보고 지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2015년 12월 11일 광주일보에 기사가 떴는데, 임기준에게는 크로스 되는 오른쪽 디딤발을 스퀘어로 바꾸라는 조언을 했다. 팔을 올릴 때도 1루 쪽이 아닌 정면으로 뻗도록 했다. 제구가 최우선인 임기준에게 내려진 맞춤형 과제라고. 박준표에게는 ‘크로스’를 이야기했다. 몸이 많이 열리는 투구폼을 보완하기 위한 숙제라고 한다. 한승혁은 ‘밀고 나가기’라는 숙제를 주었다. 중심 이동이 잘 안 된다고 해서 쏠리듯이 밀고 나가서 던지라고 주문을 했다고 전해진다.

[1] 이마나카는 오사카 토인고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일본프로야구에 드래프트된 선수이다. 이후 오사카 토인은 나카무라 타케야, 니시오카 츠요시, 이와타 미노루, 나카타 쇼, 아사무라 히데토, 후지나미 신타로, 모리 토모야 등 다수의 일본프로야구 스타 선수를 배출하고 고시엔 대회 우승도 여러 차례 차지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가 되었다.[2] 25경기 이상 등판, 15승 이상, 완투 10경기 이상, 승률 6할 이상, 200이닝 이상 투구, 평균자책점 2.50 이하, 탈삼진 150개 이상[3] 1996시즌은 179.2이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