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히로시
1. 소개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야구해설가, 야구평론가.
프로 첫 해부터 대활약했던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선수였으나, 그에 맞춰 뒤따라온 엄청난 혹사로 인해 몸이 망가져 선수생활을 일찍 접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
또한 지도자로써는 다니는 팀마다 투수진을 개선하는 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으며, 무엇보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38년 만에 구단 사상 2번째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감독'''[1] 이다.
2. 프로 입단 전
원래는 내야수로 뛰었지만,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투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투수로 전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엔 한번도 한신 고시엔 구장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활약을 본 니시테츠 라이온즈 측에서 입단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곤도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인야구팀 브리지스톤 구루메공장 야구부에 입단하여 선수로 뛰었다. 그 후 1960년 도시대향야구대회에서 보강선수로 출전해 맹활약. 활약에 감명받은 여러 구단의 추파를 받았고, 1961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한다.
곤도는 야구 이외에도 신체능력 자체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스포츠에서도 높은 평판을 받아 그를 영입하려 했다. 심지어는 1964 도쿄 올림픽에 허들 선수로 출전해달라는 요청까지 있었을 정도.
3. 혹사로 일찍 끝난 비운의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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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에이스.'''
1961년 주니치에 입단한 곤도는 첫 해부터 맹활약을 펼치는데, '''세부성적을 보면 도저히 미쳤다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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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곤도 히로시 게임 로그
무려 '''69경기 등판[2] , 32완투, 12완봉[3] , 35승[4] 19패, 429.1이닝, 310 탈삼진, 방어율 1.70이라는 정신나간 성적을 기록하고 사와무라상과 다승왕,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한 것!''' 심지어 저 성적 중에서 구원등판수와 패전 수를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그 해 리그 최다 기록이었다![5]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혹사였다. 오죽했으면 이 혹사 때문에 '''"곤도, 곤도, 비, 비, 곤도, 비, 곤도"'''란 유행어[6] 까지 생길 정도. 이 미친 이닝 기록은 1950년 양대리그 분리 이후 한시즌 최다이닝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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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곤도 히로시 게임 로그
이듬해에도 전년보단 덜하지만 '''61경기 등판[7] , 23완투, 6완봉, 30승[8] 17패, 362.1이닝, 212탈삼진, 방어율 2.33'''을 기록하면서 다승왕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미친 혹사의 끔찍한 말로가 그를 기다렸다.'''
이 미친 혹사도 한 몫했지만, 잘못된 어깨관리[9] 로 인해 결국 곤도의 어깨는 망가져 버렸고, 결국 이듬해인 1963년엔 10승, 그 다음 해인 1964년엔 꼴랑 6승밖에 거두지 못하며 곤도는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곤도는 1964년을 끝으로 투수를 포기하고 내야수로 전향, 타자로 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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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 전향한 곤도.
그러나 타자로 뛰면서도 이미 개박살난 몸 때문에 1967년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한 것 빼곤 저조한 성적밖에 거두지 못했고, 결국 1968년 다시 투수로 뛰게 되지만 '''9시합 등판(단 1시합 선발등판), 1승 1패, 18.1이닝, 10탈삼진, 방어율 10.80'''의 처참한 성적만 거두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통산 성적은,
'''투수 성적은 210시합 등판, 82승 60패, 667탈삼진, 방어율 2.69'''
'''타자 성적은 463시합 출장, 214안타, 18홈런, 85타점, 56희생타, 타율 .245'''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혹사가 결국 몸을 망가뜨려 일찍 은퇴한 비운의 선수라고밖엔 표현할 수 없다.
4.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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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에게 2번째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시절.
은퇴 후엔 주니치 드래곤즈, 킨테츠 버팔로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에서 코치로 뛰면서 투수진을 개선시키는 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장의 성적을 위해 투수진의 혹사에 반대하는 의견을 고수하면서 감독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긴테쓰에서 오기 아키라 감독이 요시이 마사토 등의 주축 투수들을 지나치게 혹사시키는 것을 두고 불화를 겪기도 했다.[10][11]
그리고 199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으로 취임해선 첫 해부터 자율야구를 시행하면서 사이토 타카시, 노무라 히로키, 미우라 다이스케, 카와무라 타케오 등이 포진한 안정적인 선발진과 마무리 사사키 카즈히로를 중심으로 시마다 나오야, 이가라시 히데키, 세키구치 이오리, 아와노 히데유키 등의 중간계투진을 로테이션화한 독특한 투수운용을 보여주었고, 비록 홈런을 뻥뻥 쳐대는 대형 거포가 있진 않지만 컨택이 좋은 타자들이 연달아 안타를 뻥뻥 때려대면서 상대팀을 조지는 머신건 타선을 구축하면서 그 해 '''구단 사상 38년만의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일본시리즈에서도 히가시오 오사무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12] 를 4승 2패로 조지고 '''구단 사상 38년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면서 팀을 최고의 황금기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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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이 결정된 후 헹가래를 받는 곤도.
이듬해인 1999년[13] , 그 다음해인 2000년에도 팀을 3위로 이끌면서 4년 연속 A클래스로 이끌기도 했으나,[14] 자율야구 방침에 불만을 품은 주전 선수들[15][16] , 그리고 TBS 테레비의 요코하마 프런트진과 대립하면서[17] 결국 2000년을 끝으로 곤도는 사임한다. 후임 감독으로는 세이부 라이온즈 황금기를 이끌었던 모리 마사아키가 선임되지만 도리어 모리 식의 빡빡한 관리야구가 요코하마의 팀컬러와 맞지 않았고 황금기의 주축 전력들도 퇴단하거나 부진하게 되며 요코하마에는 또 다시 암흑기가 찾아온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주니치 드래곤즈 등 여러 구단에서 투수코치를 맡았으며, 프로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투수코치로도 활동했다. 2019년엔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인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5. 기타
원래 콘도 등의 성씨는 외래어 표기법/일본어의 표기 법칙에 따라 '''곤도'''로 적어야 하지만, 이 사람 같은 경우엔 특이하게도 성씨의 발음 자체가 그대로 '''곤도'''라서(히라가나 표기가 '''ごんどう=곤도''') 굳이 '콘도'라 적을 필요가 없다.
6. 관련 문서
[1] 재미있게도 1960년 다이요의 우승의 주축 투수 중에는 히로시와 한자까지 같은 성인 곤도 마사토시가 있었다.[2] 44경기 선발등판, 25경기 구원등판.[3] 한국-일본-미국-대만 프로리그 순수 신인왕 최다완봉 기록으로 남아 있다[4] 28선발승으로 역대 최다 선발승[5] 다만 최다탈삼진은 센트럴리그에선 1991년부터 수상했기에 곤도는 이 상을 당연히.. 못 탔다.[6] 의미는 간단하다. 경기가 우천취소가 되어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닥치고 다음 경기는 곤도 등판. 이 패턴이 계속되는 것. [7] 39경기 선발등판, 22경기 구원등판.[8] 21선발승으로 고야마 마사아키(27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3위는 무라야마 미노루 20선발승)[9] 가네다 마사이치 항목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투수들에게는 어깨를 식힌다는 개념이 없어서 등판 후 아이싱은 커녕 어깨에 뜨거운 것을 대고 있었다. 김성근과 김인식도 이런 잘못된 어깨관리 때문에 일찍 투수를 포기했던 것. [10] 오기 아키라 감독은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폼을 수용하는 듯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투수 운용에 있어서는 승리를 위해 투수들을 연투 등으로 혹사시키는 근시안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10.19 당시 더블헤더 3일 전 완투를 한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를 2경기 모두(즉 '''하루에 2번''')에 구원등판시킨 것. 결국 아와노는 1번째 땐 어찌저찌 롯데 타선을 막아내어 팀 선배 나시다 마사타카가 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나 마찬가지인 적시타로 갖다준 팀의 승리를 지켜냈으나, 2차전에서 이 해 수위타자를 차지한 타카자와 히데아키에게 동점 투런 홈런을 맞는 블론세이브를 저지르면서 팀의 리그 우승 실패에 일조하고 말았다.[1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이던 1998년 올스타전 때 센트럴 리그 투수 코치를 맡았는데 당시 요미우리 소속이던 조성민이 직접 일본어로 팔꿈치가 아파서 던지지 못하겠다고 곤도에게 호소했지만, 곤도는 '''"너만 아픈 줄 아느냐?"''' 라며 단칼에 잘라버린 채 조성민을 억지로 등판시켰다가 치명적인 팔꿈치 부상을 당하게 만들었다는 설이 돌았었다. 상술한 대로 혹사로 인하여 곤도 자신의 현역 생활을 망친 경험도 있고, 투수 코치로서 투수들의 혹사에 관해 감독과의 대립을 불사하던 양반이 아무리 다른 팀 소속의 한국인 선수라 해도 굳이 아프다는 선수를, 더군다나 승부에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는 올스타전 경기에 강제로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데다가 생전 조성민의 행실 탓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만, 실제로 올스타전 후 요미우리 측에서 조성민의 부상에 대해 곤도에게 항의했고 곤도 또한 유감을 표시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곤도 때문에 조성민이 다친 것은 사실임이 드러났다.[12] 참고로 세이부는 1985년 한신 타이거스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선물한 구단이기도 하다(...) [13] 이 해 요코하마는 센트럴리그 역대 기록인 '''팀타율 .294'''을 기록했고 4번타자인 로버트 로즈는 '''.369 37홈런 153타점'''의 괴물 성적을 찍었다.[14] 왜 4년이냐면 곤도의 전임 감독 오오야 아키히코 시절인 1997년의 2위도 포함하기 때문.[15] 곤도는 투수코치로는 잔뼈가 굵었지만 야수 운용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감독직에 있으면서도 투수코치 역할의 연장선이란 마음으로 감독직을 수행했다고 한다. 번트를 거의 대지 않는 공격적인 타선 운용도 아웃카운트의 가치를 중시했던 곤도 스스로의 지론도 있지만, 감독이 거의 작전 지시를 내리지 않고 사실상 타자들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었던 점도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곤도는 투수진과의 인간관계, 투수진의 컨디셔닝이나 등판 조절에 있어서는 세심했지만 야수진과는 관계가 소원했고, 때문에 그것이 팀 케미의 악화를 초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6] 곤도 감독의 마지막 해였던 2000년 통산 2천 안타를 앞두고 있었지만 부진하던 베테랑 1루수 코마다 노리히로와 기용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고 코마다는 팀을 무단이탈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결국 그 해가 요코하마 감독으로서 곤도의, 선수로서 코마다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17] 다만 구단 사장과는 형제 같은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