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타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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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現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코치.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애칭은 '''타케시.'''[1]
2. 현역 시절
교토 하나조노 고등학교를 졸업 후, 1985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주전 포수였던 나카오 타카요시가 부진하자[2]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주전 포수로 자리잡았다. 그 해 그는 121경기에 출전해서 수비율 0.994, 64번의 도루 시도 중에 33번을 저지하며 0.516의 도루저지율을 달성하는 등 최고의 포수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 후 1995년에도 54번의 도루 시도 중에 28번을 잡아내며 0.519의 도루저지율을 달성했다.
타격에서는 타율은 낮지만 상대적으로 출루율이 높은 편이고[3] 20홈런 1회(1991)를 포함해 두 자릿수 홈런도 4차례 기록하는 등 한방도 있었던 선수였다. 통산 기록은 1955경기 6419타석 1380안타 137홈런 604타점 통산 타율 .242 출루율 .309 장타율 .355 OPS .664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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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경기를 봤던 사람은 이 유명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와일드 피치 후에 공을 열심히 쫓아가서 홈 송구를 하는 포수가 바로 나카무라 타케시다.[4]
주니치의 부동의 주전 포수[5] 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2001년 시즌 후 FA를 선언하고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보상선수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양 팀 주전포수 맞트레이드가 된 셈인데, 첫 해에는 100경기 넘게 출장하며 주전 포수 역할을 했지만 보다 젊은 아이카와 료지의 대두로 점차 주전에서 밀려났다.
요코하마에서 3년을 보낸 뒤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창단 멤버로 합류했는데, 라쿠텐은 불공정한 선수 분배 드래프트 방식으로 인해 퍼시픽리그의 최하위 두 팀이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선수단 중에서 오릭스 버팔로즈가 먹고 남긴 쩌리들만 주워갈 수밖에 없어서 전력이 매우 약했다. 따라서 라쿠텐에 대한 구제조치로 나머지 10개 구단에 대해서 특별지명이 실시되었는데, 이 해 요코하마의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라쿠텐의 지명을 받고 이적한 것이다. 라쿠텐에서는 이미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은지라 결국 1년밖에 뛰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 지도자 경력
3.1.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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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배터리 코치 시절.
은퇴 후, KIA 타이거즈에 오기 전까지 2006년~2014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주니치 드래곤즈,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배터리 코치를 했다.
3.2. KIA 타이거즈 시절
3.2.1. 2015 시즌
2015년 KIA 타이거즈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고 2015년 시즌부터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 코치 보직을 맡게 되었다.
KIA 타이거즈에 있으면서 젊은 두 포수인 백용환과 이홍구의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김상훈의 은퇴로 인한 포수 공백은 거의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경험이 부족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 포수 구실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성과를 이뤄냈다. 다만 여전히 나카무라 코치 눈에는 성이 차지 않는지 시즌 마무리 캠프에서 두 영건들에게 지옥훈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언급했다(...)
3.2.2. 2016 시즌
2015 시즌이 끝난 후, 이마나카 신지를 투수 인스트럭터로 데려왔다.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 같이 뛴 경험도 있고 해서 오게 됐다고 전해진다.
등록명도 바꿨는데, '나카무라'에서 '타케시'로 변경했다.
스프링캠프에서는 이홍구, 백용환, 신범수를 지도했다.
3.2.3. 2017 시즌
SK 시절의 김민식의 도루저지, 블로킹 능력을 마음에 들어했고 시즌 중에 트레이드돼서 KIA로 온 김민식에게 경기 내외적으로 최대한의 자율을 보장했다고 한다.# 덤으로 기아가 2017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생애 첫 우승반지 수집과 함께 콩라인 탈출에 성공하는 기쁨을 누렸다.
3.2.4. 2018 시즌
2018년 시즌부터는 김상훈 코치와 자리를 맞바꾸어 2군 배터리코치로 갔다. 김기태 감독은 풍부한 코칭 경력으로 2군 포수 육성을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3.3.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
2018 시즌이 끝나고 며칠 되지 않아 이적설이 뜨더니, 결국 2019 시즌부터 친정팀인 주니치 드래곤스 배터리 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스프링캠프에서 주니치가 KIA와 경기를 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선수 및 코치진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마침 선동열 위원이 참관한 경기라서 양팀 모두 훈훈한 분위기였다.
4.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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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언론 보도에 의하면) 재일교포 3세 출신 한국계 일본인이며 귀화 전 한국명은 강무지(姜武志)[6] 라고 한다.[7]
- 장난스럽게 「원래 착하게 생겼는데, 얼굴이 변형될 정도로 맞았다」라고 말할 만큼 주니치 시절에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의 철권제재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경기 중에 덕아웃 뒤에서 호시노에게 맞아서 코뼈가 부러진 적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것은 호시노가 나카무라를 미워해서라기 보다는 팀의 중심인 주전포수를 갈굼으로써 선수단 전체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호시노가 나카무라를 감정적으로 미워해서 때렸다는 게 아닌 것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나카무라가 주니치에 입단한 이후 2년동안 1군에서 기회를 못잡자 1986년 당시 구단 프런트는 나카무라를 정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새로 감독으로 취임한 호시노 감독이 나카무라를 버리지 않고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팀에 잔류시켰고 호시노식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그 훈련이 너무 힘들어 나카무라는 야구선수로서 자신의 재능에 회의감을 가지고 선수생활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한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너 요즘 열심히 하는가 보다. 감독님이 넌 믿을 만한 아들이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더라」라는 말을 듣고 야구를 포기하려는 생각을 거뒀다고 한다.
이후 나카무라는 10년 이상 주니치 드래곤즈 주전포수로 자리 잡았다. 즉, 나카무라에게 호시노는 자신의 프로 커리어의 길을 열어준 은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수시절 호시노에게 그렇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시노와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후 나카무라는 10년 이상 주니치 드래곤즈 주전포수로 자리 잡았다. 즉, 나카무라에게 호시노는 자신의 프로 커리어의 길을 열어준 은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수시절 호시노에게 그렇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시노와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 성실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투수들을 잘 배려하여 히어로 인터뷰 시 그의 공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야마모토 마사와 호흡이 좋아 사인 교환 전에도 이미 구종을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동열도 주니치 시절 나카무라의 사인에 고개를 흔든적이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고 한다.
- 도루저지 능력이 좋아 일본프로야구 사상 한 시즌 절반 이상 경기에 출장한 뒤 도루 저지율 5할을 넘긴 11명의 포수들 중 하나이다. 이 중 2번 이상 5할을 기록한 포수는 나카무라(2회) 외에도 후루타 아츠야(5회), 타부치 코이치, 오야 아키히코(각 4회) 단 4명뿐이다.[8]
- 광주에서 코칭 생활을 하면서 광주 음식이 입맛에 맞는지 한국에 오기 전에 비해서 많이 후덕해졌다.
[1] 그래서 2015년 '나카무라'였던 등록명을 2016 시즌부터는 '타케시'로 바꿨다.[2] 때문에 호시노 센이치 감독으로부터 외야 전향 요구를 받았으나 나카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1988년 시즌이 끝난 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됐다. 그리고 팀을 옮기자마자 데뷔 첫 일본시리즈 우승반지를 득템했다. 이때 요미우리에서 건너온 선수들 중 니시모토 다카시가 있다. 여담으로 나카오, 니시모토 둘다 89년에 컴백상을 득템했다.[3] 단 그가 커리어의 대부분을 센트럴리그에서 8번 타순에 고정되어서 보낸 것을 고려해야 한다. 9번에 투수가 들어서기 때문에 고의사구를 많이 얻기 때문. 실제로 그의 통산 고의사구(112개)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10위의 기록이며 도이 마사히로, 야마우치 카즈히로, 카네모토 토모아키 같은 강타자들보다도 많다.[4] 나중에 판독 결과 오심으로 밝혀졌다.다른 각도에서 본 리플레이 영상 투수인 선동열도 2010년 KBS에서 방영한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사실은 세이프였다고 자백(?)했다.[5] 나카무라에게 밀려서 백업 포수 자리와 외야를 전전하다가 1998년에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선수가 야노 아키히로. 한신에서 2000년대 내내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2003, 2005년 우승 등 한신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그 야노가 맞다.[6] 강무지는 1982, 1984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재일동포 팀으로 출장했으며 1984년 대회 때는 타격왕을 차지하면서 재일동포 팀을 봉황대기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선수이다.[7] 1984년 11월 22일 동아일보 기사, "교포 고교야구선수 姜武志(강무지) 日(일) 中日(중일)팀에 1위지명", 강무지 영입 일화가 담긴, 재일동포 야구단 감독 한재우 옹과의 인터뷰. 박동희 기자와의 위 인터뷰에서는 1982년 봉황대기에도 출전하였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나카무라 타케시가 한국계 강무지라고 보도한 여러 한국 언론들 중 지금까지 나카무라 타케시 본인에게 직접 사실 여부를 확인한 언론은 없고(당사자에게 직접 사실 확인 여부를 확인하는건 매우 중요하다. 니시모토 다카시나 다비드 실바에게 있었던 혈통 관련 루머처럼 오랫동안 정설처럼 알려졌던 루머가 당사자와 당사자의 가족들에게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사진이나 방송 영상자료 등에서도 당시 나카무라 타케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동일인물 여부는 현재 불분명하다. 덧붙여서 나카무라 타케시 본인은 한, 일 언론에 스스로를 재일교포라고 밝힌 적이 없으며 한국말도 매우 서투른 편이다. "번트도 韓·日 달라" 나카무라 코치의 수업시간.[8] 나머지 포수들 중에도 조지마 겐지, 다니시게 모토노부, 나시다 마사타카 등 NPB에 이름을 남긴 명포수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