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타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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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폼(...)
일본프로야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뛰는 야구선수. 주 포지션은 좌익수, 1루수.[3]
나카무라 다케야와 T-오카다 이후 퍼시픽리그에 나타난 토종 거포로 많은 기대를 받는 선수이다.
중학교때 통산 51홈런을 쳤고, 고교 통산 87홈런을 때려 아마 시절부터 '헤이세이의 괴물' 이란 소리를 듣던 거물이었다. 중학교까지는 히로시마에서 다녔으나, 고등학교는 오사카의 야구 명문인 토인 고교[4] 로 진학했다. 투수로서도 151km/h의 강속구를 뿌렸지만, 고 2때 어깨 부상이 발견되어 타자에 전념했다.[5] 추정 비거리 170m 짜리 홈런을 날렸다고 하는 등 고교무대를 호령했지만, 3학년 여름 때 지역대회 결승에서 투수로서는 1이닝 3실점, 타자로서는 5타수 무안타의 삽질로 팀의 패배에 일조하며 코시엔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파워툴은 높게 평가를 받아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비롯한 몇몇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구단들의 스카우터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을 정도였다. 2007년 드래프트에서 사토 요시노리, 카라카와 유키와 함께 고교 빅3로 평가받으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한신 타이거스, 오릭스 버팔로스, 소프트뱅크 호크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추첨으로 닛폰햄이 교섭권을 획득한다.[6] 그리고 고졸 신인으로서는 사상 5번째인 1억엔의 계약금을 받으며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하게 된다.
고교 시절의 활약상이 우리나라 언론에도 보도된 적이 있다. 기사
기대를 받으며 입단했지만 나무 배트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비위치도 3루수를 지원했다가 전력불가 판정을 받으며 2008년에는 결국 한번도 1군에 올라오지 못한다. 이 시기에 이승엽에게 한국 기자들이 나카타가 어때보이냐고 묻자, 이승엽이 웃으면서 "아직 애기네요"라고 했었다. 2009년에는 1루수에 전념하며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7] , 1군 데뷔에 성공하고 일본시리즈에도 대타로 출장한다. 2009년 시즌 후 외야수로 전향한다.
2010년에는 터멜 슬레지의 퇴단과 모리모토 히초리의 부상이탈 등으로 외야가 휑해져, 1군에서 개막전을 맞이하게 된다. 개막전에서도 스타팅으로 출전하지만, 바로 2군행을 통보받고 게다가 2군 시합에서 반월판 부상을 당하며 공백기를 갖게 된다. 7월에 복귀해서, 프로 첫 홈런을 포함해 한달동안 9개의 홈런을 날리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2010년 성적은 0.233 9홈런 22타점.
2011년에는 개막전부터 쭉 레굴러로 출장해서, 18홈런 91타점을 기록하며 슬슬 프로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리그 최다에 1개 모자란 133삼진에 타율은 파리그 꼴지에서 2등인 0.237, 출루율은 리그 꼴지인 0.283을 기록하는 등 공갈포 기질이 다분했다. 어찌됐건 슬러거가 부족한 팀의 주포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다.
2012년에는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시즌 초반 삽질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기에 4번으로 출장한다. 후반기에만 14홈런을 몰아치며 투고타저 속에서도 20홈런을 넘겼다. 최종적으로 24홈런 71타점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0.239로 여전히 저조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일본시리즈에서도 모든 시합에 4번으로 출장했지만, 일본시리즈 6차전에서의 3점 홈런 외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팀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승 4패로 패배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중심타자로 기대를 받으며 선발되었지만, 대만전의 결승 희생플라이 외에는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도쿄돔에서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폭죽쇼를 할 때도 홈런을 치지 못했다. 하지만 2013년 정규시즌에서는 드디어 아마시절의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타율도 3할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홈런도 한경기 3홈런을 때리는 등 커리어 하이 페이스를 보였다. 그러나 8월 21일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미마 마나부의 공에 손등을 맞아 골절상을 당하며 남은 시즌 출장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결국 사실상 시즌아웃. 이때까지의 성적은 타율 3할 3리 28홈런 73타점, 출루율 3할7푼7리 장타율 5할5푼1리.
2014년에는 전경기에 출장하며 0.269의 타율에, 27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100타점은 퍼시픽리그 1위의 기록. 특히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일본 기록인 포스트시즌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니폰햄의 선전을 견인했다. 하지만 팀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패배하며 일본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5시즌에는 .263 30홈런 102타점의 성적을 기록,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프리미어 12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조별예선에서 무려 13타점을 치며 미쳐 날뛰었다.[8]
2016시즌은 0.250, 25홈런, 110타점을 기록, 개인 통산 두 번째 타점 타이틀을 차지하고, 니혼햄의 4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 일등공신이 된다. 포스트시즌에서도 클러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 쐐기 투런, 5차전 추격의 솔로홈런을 포함, 18타수 6안타(2홈런) 5타점을 기록하며 시리즈 MVP가 된다.
2017년에는 WBC 대표로 발탁, 타율은 낮았지만 6시합에서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츠츠고 요시토모와 함께 일본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츠츠고와 동일하게 WBC 후유증을 겪는 건지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장타율'''이 3할대로 폭락했다. 팀도 오오타니 쇼헤이의 부상등 악재를 겪으며 전년도 챔피언에서 5위로 추락, 이래저래 최악의 시즌으로 남게 됐다. 결국 FA를 신청하기엔 처참한 성적인지는 몰라도 FA를 선언하지 않고 잔류하였으며, 연봉은 2017년의 2억8000만엔에서 8000만엔 삭감된 2억엔에 계약체결을 하였으며, 2018년부터는 닛폰햄의 새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 8월 24일,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홈런을 기록했다. 장타가 조금 살아나며 시즌통산 0.265의 타율에 25홈런 106타점을 기록했다. 24병살로 리그 1위를 기록한건 덤..
시즌 후 3년 10억엔에 재계약했다.
2019년에는 타율 .242에 24홈런 80타점 OPS .778을 기록했다. 병살은 16개로 팀메이트 오타 타이시가 더 처참한 공갈포가 된 데다가[9] 팀 자체가 장타력이 박살나버려서[10] 그렇게 까이지는 않았다.
2020년에는 6월 개막 이래 9경기 5홈런으로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2020년 8월 20일 53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시즌 19호포를 기록하면서 옆동네 홈런왕인 오카모토 카즈마보다 1개의 홈런을 더 쳐내며 홈런부문 리그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11]
'''It is going! see! you! later! goodbye!!!'''(영상의 실제 중계 멘트이다.)
2020년 8월 22일 55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시즌 20호포를 기록하였다.
[12]
2020년 9월 10일 롯데전, 1회 초 첫 타석에서 시즌 24호 홈런, 프로 통산 250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후 성적은 0.239 31홈런 108타점 1도루로 아사무라에게 홈런왕을 1개 차이로 뺐겼으나 3번째 타점왕을 차지했다.
2021년 2월 20일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라쿠텐과의 연습경기에서 2666일만에 일본에서의 등판을 가진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첫 타석부터 3점홈런을 때려냈다.
고타율은 어렵지만 한 시즌에 20개 이상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타자. 다만 프로 입단 이후 3할 타율과 5할 이상의 장타율을 기록한 건 2013년을 빼고 한 차례도 없다. 게다가 2013년엔 시즌 도중 부상으로 아웃되어 겨우 108시합에 출장해 규정타석에 겨우 도달하는 데 그쳤기에 저 기록을 달성한 풀타임 시즌은 없다.
프로 입단 초창기에는 대형 유망주라는 말이 무색하게 변화구에 대한 대처가 극악한 수준이었다. 2011년만 해도 타석 당 볼넷률은 8.4%로 그럭저럭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투구에 대한 헛스윙률이 30%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었다. 그러나 2012년 겨울부터 타격폼을 왼다리를 살짝 들어올리는 타법으로 바꾸면서 각성했다. 여전히 삼진은 많이 당하는 편이지만 볼넷도 적절하게 얻어내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시즌이 끝나고 보면 거의 LA 에인절스의 영원한 리빙 레전드를 연상케하는 비율스탯과 홈런, 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거포유형의 타자이긴 하지만 OPS형도 아니고 존을 벗어나는 볼을 타격하여 안타를 만들 수 있을만큼 컨택이 뛰어난 배드볼히터도 아닌 애매모호한 유형의 타자인 셈. 아마시절의 기대치나 국대에서의 활약 때문에 과대평가를 받는 타자라고 혹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홈구장이 일본 최고의 투수친화 구장인 삿포로 돔이란 걸 생각하면 닛폰햄 전력에서 대체하기 힘든 장거리포다. 본인도 스스로의 역할을 '타점을 때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득점권 상황에서 최소한 1점이라도 내는 팀배팅을 중시한다고 한다. 덕분에 타점왕을 자주 차지하게되었다.
데뷔 이후 수비 면에선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못 들었으나, 고등학생 시절 투수로 150km/h를 넘기고 2011 ~ 2012년 리그 최다 보살을 기록할 정도로 정확하고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다. 다만 수비범위가 넓은 편은 아니라 니시카와 하루키 등 보다 발빠른 외야수들이 가세한 2014년 이후부터는 주로 1루수로 출장하고 있다. 1루 수비는 괜찮은 평가를 받는다. 2015년 이후 1루수로 완전히 전향한후 골든글러브를 꾸준히 받게되었다.
MLB 스카우터들이 보러 오고 4구단 동시 1차지명을 받았으며, 일본 씹어먹고 조만간 미국 갈 거라고 생각했던 스무살 시절에 비하면 일본에서도 홈런왕을 못 먹는 현재의 모습은 기대만큼은 못 컸긴 한데 그래도 2할 중후반대에 20+홈런을 보장할 수 있는, 한 팀의 클린업으로서는 충분히 좋은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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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폼(...)
1. 개요
일본프로야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뛰는 야구선수. 주 포지션은 좌익수, 1루수.[3]
나카무라 다케야와 T-오카다 이후 퍼시픽리그에 나타난 토종 거포로 많은 기대를 받는 선수이다.
2. 경력
2.1. 프로 입단 전
중학교때 통산 51홈런을 쳤고, 고교 통산 87홈런을 때려 아마 시절부터 '헤이세이의 괴물' 이란 소리를 듣던 거물이었다. 중학교까지는 히로시마에서 다녔으나, 고등학교는 오사카의 야구 명문인 토인 고교[4] 로 진학했다. 투수로서도 151km/h의 강속구를 뿌렸지만, 고 2때 어깨 부상이 발견되어 타자에 전념했다.[5] 추정 비거리 170m 짜리 홈런을 날렸다고 하는 등 고교무대를 호령했지만, 3학년 여름 때 지역대회 결승에서 투수로서는 1이닝 3실점, 타자로서는 5타수 무안타의 삽질로 팀의 패배에 일조하며 코시엔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파워툴은 높게 평가를 받아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비롯한 몇몇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구단들의 스카우터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을 정도였다. 2007년 드래프트에서 사토 요시노리, 카라카와 유키와 함께 고교 빅3로 평가받으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한신 타이거스, 오릭스 버팔로스, 소프트뱅크 호크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추첨으로 닛폰햄이 교섭권을 획득한다.[6] 그리고 고졸 신인으로서는 사상 5번째인 1억엔의 계약금을 받으며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하게 된다.
고교 시절의 활약상이 우리나라 언론에도 보도된 적이 있다. 기사
2.2. 프로 시절
기대를 받으며 입단했지만 나무 배트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비위치도 3루수를 지원했다가 전력불가 판정을 받으며 2008년에는 결국 한번도 1군에 올라오지 못한다. 이 시기에 이승엽에게 한국 기자들이 나카타가 어때보이냐고 묻자, 이승엽이 웃으면서 "아직 애기네요"라고 했었다. 2009년에는 1루수에 전념하며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7] , 1군 데뷔에 성공하고 일본시리즈에도 대타로 출장한다. 2009년 시즌 후 외야수로 전향한다.
2010년에는 터멜 슬레지의 퇴단과 모리모토 히초리의 부상이탈 등으로 외야가 휑해져, 1군에서 개막전을 맞이하게 된다. 개막전에서도 스타팅으로 출전하지만, 바로 2군행을 통보받고 게다가 2군 시합에서 반월판 부상을 당하며 공백기를 갖게 된다. 7월에 복귀해서, 프로 첫 홈런을 포함해 한달동안 9개의 홈런을 날리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2010년 성적은 0.233 9홈런 22타점.
2011년에는 개막전부터 쭉 레굴러로 출장해서, 18홈런 91타점을 기록하며 슬슬 프로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리그 최다에 1개 모자란 133삼진에 타율은 파리그 꼴지에서 2등인 0.237, 출루율은 리그 꼴지인 0.283을 기록하는 등 공갈포 기질이 다분했다. 어찌됐건 슬러거가 부족한 팀의 주포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다.
2012년에는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시즌 초반 삽질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기에 4번으로 출장한다. 후반기에만 14홈런을 몰아치며 투고타저 속에서도 20홈런을 넘겼다. 최종적으로 24홈런 71타점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0.239로 여전히 저조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일본시리즈에서도 모든 시합에 4번으로 출장했지만, 일본시리즈 6차전에서의 3점 홈런 외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팀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승 4패로 패배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중심타자로 기대를 받으며 선발되었지만, 대만전의 결승 희생플라이 외에는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도쿄돔에서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폭죽쇼를 할 때도 홈런을 치지 못했다. 하지만 2013년 정규시즌에서는 드디어 아마시절의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타율도 3할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홈런도 한경기 3홈런을 때리는 등 커리어 하이 페이스를 보였다. 그러나 8월 21일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미마 마나부의 공에 손등을 맞아 골절상을 당하며 남은 시즌 출장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결국 사실상 시즌아웃. 이때까지의 성적은 타율 3할 3리 28홈런 73타점, 출루율 3할7푼7리 장타율 5할5푼1리.
2014년에는 전경기에 출장하며 0.269의 타율에, 27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100타점은 퍼시픽리그 1위의 기록. 특히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일본 기록인 포스트시즌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니폰햄의 선전을 견인했다. 하지만 팀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패배하며 일본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5시즌에는 .263 30홈런 102타점의 성적을 기록,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프리미어 12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조별예선에서 무려 13타점을 치며 미쳐 날뛰었다.[8]
2016시즌은 0.250, 25홈런, 110타점을 기록, 개인 통산 두 번째 타점 타이틀을 차지하고, 니혼햄의 4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 일등공신이 된다. 포스트시즌에서도 클러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 쐐기 투런, 5차전 추격의 솔로홈런을 포함, 18타수 6안타(2홈런) 5타점을 기록하며 시리즈 MVP가 된다.
2017년에는 WBC 대표로 발탁, 타율은 낮았지만 6시합에서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츠츠고 요시토모와 함께 일본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츠츠고와 동일하게 WBC 후유증을 겪는 건지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장타율'''이 3할대로 폭락했다. 팀도 오오타니 쇼헤이의 부상등 악재를 겪으며 전년도 챔피언에서 5위로 추락, 이래저래 최악의 시즌으로 남게 됐다. 결국 FA를 신청하기엔 처참한 성적인지는 몰라도 FA를 선언하지 않고 잔류하였으며, 연봉은 2017년의 2억8000만엔에서 8000만엔 삭감된 2억엔에 계약체결을 하였으며, 2018년부터는 닛폰햄의 새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 8월 24일,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홈런을 기록했다. 장타가 조금 살아나며 시즌통산 0.265의 타율에 25홈런 106타점을 기록했다. 24병살로 리그 1위를 기록한건 덤..
시즌 후 3년 10억엔에 재계약했다.
2019년에는 타율 .242에 24홈런 80타점 OPS .778을 기록했다. 병살은 16개로 팀메이트 오타 타이시가 더 처참한 공갈포가 된 데다가[9] 팀 자체가 장타력이 박살나버려서[10] 그렇게 까이지는 않았다.
2020년에는 6월 개막 이래 9경기 5홈런으로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2020년 8월 20일 53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시즌 19호포를 기록하면서 옆동네 홈런왕인 오카모토 카즈마보다 1개의 홈런을 더 쳐내며 홈런부문 리그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11]
'''It is going! see! you! later! goodbye!!!'''(영상의 실제 중계 멘트이다.)
2020년 8월 22일 55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시즌 20호포를 기록하였다.
[12]
2020년 9월 10일 롯데전, 1회 초 첫 타석에서 시즌 24호 홈런, 프로 통산 250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후 성적은 0.239 31홈런 108타점 1도루로 아사무라에게 홈런왕을 1개 차이로 뺐겼으나 3번째 타점왕을 차지했다.
2021년 2월 20일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라쿠텐과의 연습경기에서 2666일만에 일본에서의 등판을 가진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첫 타석부터 3점홈런을 때려냈다.
3. 플레이 스타일
고타율은 어렵지만 한 시즌에 20개 이상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타자. 다만 프로 입단 이후 3할 타율과 5할 이상의 장타율을 기록한 건 2013년을 빼고 한 차례도 없다. 게다가 2013년엔 시즌 도중 부상으로 아웃되어 겨우 108시합에 출장해 규정타석에 겨우 도달하는 데 그쳤기에 저 기록을 달성한 풀타임 시즌은 없다.
프로 입단 초창기에는 대형 유망주라는 말이 무색하게 변화구에 대한 대처가 극악한 수준이었다. 2011년만 해도 타석 당 볼넷률은 8.4%로 그럭저럭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투구에 대한 헛스윙률이 30%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었다. 그러나 2012년 겨울부터 타격폼을 왼다리를 살짝 들어올리는 타법으로 바꾸면서 각성했다. 여전히 삼진은 많이 당하는 편이지만 볼넷도 적절하게 얻어내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시즌이 끝나고 보면 거의 LA 에인절스의 영원한 리빙 레전드를 연상케하는 비율스탯과 홈런, 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거포유형의 타자이긴 하지만 OPS형도 아니고 존을 벗어나는 볼을 타격하여 안타를 만들 수 있을만큼 컨택이 뛰어난 배드볼히터도 아닌 애매모호한 유형의 타자인 셈. 아마시절의 기대치나 국대에서의 활약 때문에 과대평가를 받는 타자라고 혹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홈구장이 일본 최고의 투수친화 구장인 삿포로 돔이란 걸 생각하면 닛폰햄 전력에서 대체하기 힘든 장거리포다. 본인도 스스로의 역할을 '타점을 때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득점권 상황에서 최소한 1점이라도 내는 팀배팅을 중시한다고 한다. 덕분에 타점왕을 자주 차지하게되었다.
데뷔 이후 수비 면에선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못 들었으나, 고등학생 시절 투수로 150km/h를 넘기고 2011 ~ 2012년 리그 최다 보살을 기록할 정도로 정확하고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다. 다만 수비범위가 넓은 편은 아니라 니시카와 하루키 등 보다 발빠른 외야수들이 가세한 2014년 이후부터는 주로 1루수로 출장하고 있다. 1루 수비는 괜찮은 평가를 받는다. 2015년 이후 1루수로 완전히 전향한후 골든글러브를 꾸준히 받게되었다.
MLB 스카우터들이 보러 오고 4구단 동시 1차지명을 받았으며, 일본 씹어먹고 조만간 미국 갈 거라고 생각했던 스무살 시절에 비하면 일본에서도 홈런왕을 못 먹는 현재의 모습은 기대만큼은 못 컸긴 한데 그래도 2할 중후반대에 20+홈런을 보장할 수 있는, 한 팀의 클린업으로서는 충분히 좋은 타자.
4. 연도별 기록
5. 이모저모
- 2012년 1월에 고등학교 동급생과 일찌감치 결혼, 2013년 1월에 여아가 태어났다. 현재는 딸 둘과 막내 아들의 세 자녀의 아버지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해서 애들 자랑에 좀 반응하기 슬슬 힘들다고 반쯤 웃으면서 팀원들이 불평을 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아이들을 위해 코로나라 멀리 갈 수 없으니 옥상에 텐트를 치고 바비큐 파티를 하자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 자주 하고싶네!! 라던지 함께 골프를 치거나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 아들을 들쳐 매고 육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 89년생의 젊은 선수지만 약점은 노안이다. AKB48의 오오시마 유코가 시구를 했을 때 호쾌하게 헛스윙을 해줬는데, 커다란 체구와 바싹 깎은 머리 등으로 인해 겉모습만 보면 오오시마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나.. 사실은 나카타가 1살 어리다.
- 닛폰햄 파이터즈 최고 인기 선수 중 하나. 호쾌한 거포 면서도 뚱뚱하지 않은 근육질의 몸매에 나쁘지 않은 얼굴, 젊은 나이, 고교시절부터 고시엔 스타 중 하나로 유명 선수였다가 프로 입단후에는 4번타자를 꿰찬 화려한 커리어, 국대까지 달아볼 정도의 활약상으로 투타를 막론하고 닛폰햄 최고 인기 선수 중 하나다. 꽃미남 에이스인 다르빗슈와 오오타니가 있던 시절에는 이 둘에 밀리는 인상이었지만 이제 다르빗슈도 없고 오타니도 없는 닛폰햄에서 최고 인기 선수라 하면 단연 나카타.
- 닛폰햄 선수인 나카타, 스기야, 니시카와, 미야니시는 넷이서 일본 중고차 중개사인 '티 바이 티 가레지(TxT)'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회사 광고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예능 못지 않는 웃음을 자아낸다... 공식 채널
-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존경한다고 하며, 기요하라도 나카타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2011년까지 동료였던 다르빗슈 유도 많이 따라다닌 듯 하며, 다르빗슈로부터 "(일본 홈런 기록인) 56홈런을 칠 때까지는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대받았다.
- 2015년 마지막 날 방송된 예능프로그램[13] 에서, 프리미어12에 출전한 선수들과 예능인들이 각각 팀을 이뤄 야구 비슷한 게임을 하는 기획[14] 이 있었는데, 상대팀 게닌으로 출전한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타카아키가 자신의 타법은 이대호 선수로부터 배운 것이라는 드립을 날리자, 나카타는 "아 싫은 이름이 등장했다"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사적으로 싫어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라이벌 팀의 주포라서, 그리고 프리미어 12에서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카타의 드립을 들은 야쿠르트의 야마다 테츠토 역시 쓴웃음. 이 방송에서 뒤지고 있던 선수 팀이[15] 게닌팀에게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우리는 프리미어에서 대역전극을 해보았기 때문에.."라고 하자 이시바시가 눈을 부라리면서 "대역전극을 해봤다고? 대역전극을 당한거지 임마!"라고 하는 장면이 해당 방송의 백미. 이 기획은 원래 매년 하는 기획인데, 야구 역시 매년 해왔다. 이시바시는 이날 이 방송 역사상 100안타를 기록(…)하여 이치로가 미일통산 3000안타 기록했을 때와 비슷하게 100안타 기념식까지 열었다. 드립에 기록까지 빵빵 터진 날.
-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볼수 있지만 반대 의미의 인성질로 유명하다. 후배선수에게 대놓고 장난한답시고 음료수를 뱉어대고 선배선수들 다 있는 앞에서 배트를 뽀개는등 깽판질을 벌이는갈로 유명한데 고교때외 데뷔 당시부터 성깔에 싹수가 보이긴 했다(…). 어떤 의미로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계보를 안 좋은 쪽으로(…) 잇는 선수. 인성 문제에 대해선 말이 많지만 스기야 켄시(유투브 등지에 떠돌아 다니는 나카타 쇼 인성 영상에서 맞고있는 선수는 죄다 이 선수이다.)를 괴롭히는 영상의 경우 원조 돌아이구단 컨셉에 맞게 보여주기 식으로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에 가깝다. 실제로 풀 영상을 보면 나카타한테 뺨을 맞다가 혀로 핧고 도망간다던가 하는식. 만약 진짜로 갈구는 거라면 스기야가 저럴 수 있겠는가? 애초에 나카타는 89년생, 스기야는 빠른 91년생으로 한 살 차이며 둘 다 팀내 중견 선수이다. 절대 나카타가 대선배라던가 스기야가 신인인 게 아니다! 또한 사적으로도 친한지 예능에 둘이 자주 나오며 스기야가 나카타한테 시비걸고 나카타가 응징하는 장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론 편집본에선 앞뒤 자르고 나카타의 폭행만 보여주는 건 덤.[16][17][18]
- 스기야 켄시 선수와는 검색해보면 이것저것 자료가 많이 나온다. 함께 스트레칭을 하다가 나카타가 스기야의 스트레칭 폴을 부러뜨리거나, 스기야가 스트레칭을 하며 나카타에게 에어 어퍼컷을 엄청 시전하다가 헤드락에 걸리거나(...) 벤치에서는 코치인 야노와 나카타가 스기야의 미스를 웃긴 얼굴로 따라하면서 놀리자 스기야가 삐져서 벤치 뒤로 빠지기도 한다...[19] 최근에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사이좋은 콤비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야구 팬들에게 놀림섞인 칭찬(?)을 듣는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2020 시범경기에서 스기야가 끝내기를 치자 가장 먼저 달려나와 물을 뿌리는둥 역시 사이가 너무 좋아 짜고 치는 고스톱이 맞다.
- 그리고 이 스기야의 증언에 의하면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자기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착각하고 있다고 한다.
- 팀에서 별명은 '대장大将'이다. 얼굴이 무섭고 미디어에서 보이는 스기야 갈굼 등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그게 매력 포인트로 비춰지는 듯. 팀원들과의 사이도 무척 좋은 편이다. 매년 '나카타회' 라고 해서 본가나 좋은 식당에 선수들을 초대해 식사회를 가지기도 하고, 자유 훈련이나 전지 훈련에서 팀원과 장난치는 모습이 은근 인스타에 올라온다.
[1] 2019년부터 등장곡으로 쓰는 나카타 쇼 헌정곡. 뮤비에도 나카타가 나온다. 우에바야시 세이지나 와쿠이 히데아키처럼 가수가 선수 본인에게 헌정곡으로 만든 노래를 등장곡으로 쓴다.[2] '''勝負決める一振り 血と汗の勲章 その手で夢掴め さぁ翔ばたけ中田(승부를 결정짓는 한번의 스윙 피와 땀의 훈장 그 손으로 꿈을 잡아라 자 날아라 나카타)'''[3] 입단 초기엔 좌익수 였으나 2014년때 좌익수로 계속 뛰다 시즌 도중에 1루수로 전향했다. 나카타로 인한 외야수 공백은 본래 1루수였던 니시카와 하루키가 대체하게 된다.[4] 이 학교 출신 선수로 니시오카 츠요시, 나카무라 다케야, 이와타 미노루, 아사무라 히데토, 후지나미 신타로, 모리 토모야 등이 있다. 나카타는 선배인 니시오카와 매년 자율 훈련도 같이 할 정도로 친분이 깊다고 한다. 또 만년백업이라서 인지도는 낮지만 에무라 나오야는 나카타 쇼 한 명만을 바라보고 히로시마에서 이 학교로 진학했을 정도.[5] '06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같은해 봄 고시엔 제패팀이자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출신고로 유명한 요코하마 고등학교를 1회전에서 꺾었으나, 2회전에서 와세다 실업고의 사이토 유키에게 4타수 무안타 3삼진을 당하며 탈락했다. [6] 여담으로 저 3명에 타카하마 타쿠야를 추가해서 빅4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한신을 포함해서 두 팀은 1순위 지명 추첨에서 떨어지자 타카하마 타쿠야를 중복지명해서 또 추첨을 해야 했다. 그 결과 한신이 타카하마를 획득했다. [7] 85경기에서 100안타 30홈런 95타점을 달성했다. 5타점만 더 했으면 3할 30홈런 100타점도 가능했을 정도로 괴물같은 페이스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홈런왕+타점왕. 타율도 3할 2푼 6리로 좋았지만 롯데의 용병타자 후안 카를로스 무니즈가 3할 4푼을 치면서 타격왕을 가져갔다.[8] 일본이 이기고 있다가 후반에 따라잡혀 동점상황을 만든 경기들에서, 동점상황 이후 다시 승리를 확정짓는 결승타를 가장 많이 친 선수가 바로 이 선수였다.[9] 타율 .289에 20홈런을 쳤는데 OPS .776으로 나카타보다 OPS가 낮다(...) 거기다가 병살 22개.[10] 두 자릿수 홈런을 친 타자가 24홈런의 나카타 외에 20홈런을 친 오타와 11홈런을 친 와타나베 료까지 총 3명밖에 없었다. 2018년만 해도 브랜든 레어드가 26홈런, 나카타가 25홈런, 오스왈도 아르시아와 오타 타이시가 14홈런, 니시카와 하루키가 10홈런을 치면서 나름 홈런타자가 많은 타선이었는데 아르시아는 방출, 레어드는 치바 롯데로 이적, 니시카와는 원래 똑딱이라 홈런이 급감하면서 이렇게 망했다. 그리고 오타는 홈런과 타율이 모두 올라갔는데 OPS는 2018년 .812에서 2019년에 .776으로 추락한거라 생산력은 오히려 추락...[11] GAORA의 닛폰햄 홈경기 해설울 전담하는 콘도 유지 해설가의 홈런콜이다. 원정팀이 홈런을 쳐도 영어로 말한다. 다만 닛폰햄이 칠 때에 비해선 조금 맥빠진 말투로 한다. 일본 내에선 이 분 홈런콜이 참 유명해서 It is gone 모음집(...)등도 있다.[12] Gone!! 부분이 "거ー언느ー!!!" 라고 길게 늘어지는데 이 멘트는 나카타 팬들도 사용하는 멘트가 됐다.[13] 테레비 아사히에서 방송한 「夢対決2016とんねるずのスポーツ王は俺だ!!5時間スペシャル」의 한 기획이다. 방송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5시간짜리 방송의 일부.[14] 야구장 필드를 여러 구역으로 나눠놓고 구역별로 공이 떨어지면 1루타, 2루타, 홈런, 병살 등등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잘맞아도 아웃이고 빗맞아도 2루타고 여러가지 상황이 펼쳐진다.[15] 야구실력과는 무관한 게임인데다 선수들에게 각종 패널티를 잔뜩 준다. 그래놓고 지면 재대결을 위해 도게자까지 시킨다. 스기야는 나카타의 도게자를 보고 "선배 도게자는 처음 봐요!! 기분 째지는구만!!!" 이라고 외친다...[16] 참고로 저 위에 언급된 예능에서 스기야가 나카타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스기야의 타석이 돌아오자 스위치 히터인 스기야에게 나카타가 "좌타석에서 쳐라. 내 말을 듣는 게 좋을거야."라고 했다. 깨갱하면서 좌타석에 서는 스기야는 덤(…). 그 후에 나카타의 타석이 되자 스기야가 나카타에게 사무라이 재팬의 패배의 원흉이라고 하질 않나… 나카타가 도게자를 하자 스기야가 나카타에게 선배의 도게자를 처음 봤다면서 속이 시원하다고 한다든가… 일반적으로 보면 스기야가 깐죽대다가 나카타에게 관광당하는 테크인듯.[17] 이런 식으로 나카타랑 맨날 놀다 보니 스기야의 주전을 꿰차지 못하고 항상 백업 요원에 그치는 안습한 야구실력까지 더해져서 스기야 켄시는 부업이 야구인 개그맨(...) 취급 받기도 한다. 심지어 위에 언급된 예능에서의 야구게임은 2015년뿐만 아니라 몇 번 더 했는데 스기야 혼자 아예 연예인팀으로 출전한 적도 있다(...)[18] 다만 키요미야 코타로가 스트레스성 장염에 걸린 적도 있고, 나카타가 같은 포지션인 키요미야를 대놓고 견제하는 것 같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봐서 스기야가 아닌 신진급 선수(특히 직접적으로 자기 포지션을 위협할 키요미야)에게는 어느정도 군기를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19] 나카타와 야노는 사라지는 스기야를 바로 쫓아간다...[20] 주 무대가 닛폰 햄의 연고지인 홋카이도다.[21] 2009년 가을 애니화.[22] (아르바이트에 관하여)미나츠: 그리고 대타! 삿포로돔에서 오후 9시전쯤에! 크림: 돔이라니, 아빠랑 그전에 갔었다고. 미나츠: 대타로 내가 나가는 거야. '쇼'라는 녀석 대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