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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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Étranger
1. 개요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 소설은 안 읽었어도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인 것 만큼은 아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이방인 소설 도입부
영역본은 ''The Stranger'', ''The Outsider'', ''Foreigner'' 등의 판본이 있지만 주로 The Stranger로 알려져 있다.
2. 줄거리
프랑스 치하의 북아프리카 알제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프랑스인 뫼르소라는 남자는 양로원에 보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장을 가게 된다. 남자는 슬픔 같은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장례 때 어머니의 시신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장례를 치른다. 다음날 마리와 이야기하며 희극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엔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을 만난다. 그 영감은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고, 그의 옆에는 그가 늘 구박하는 개가 항상 함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웃집 사람 레몽이 저녁에 초대해서는 자기와 친구가 되자고 한다. 그리곤 레몽이 뫼르소에게 자길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도와달라는 일인즉슨 레몽이 자기에게서 돈만 뜯어가고 자기를 성의 없이 대하는 여친을 좀 두들겨 패려고 하니 자기 여친을 속일 만한 편지를 써 달라는 것. 뫼르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해 그를 돕게 된다.
며칠 후인 일요일에 레몽이 뫼르소와 마리를 해변가로 초대한다. 며칠 후 뫼르소는 레몽과 함께 해변으로 놀러 갔다가 그들을 미행하던 아랍인들과 마주친다. 그 아랍인들 중에는 레몽 옛 애인의 오빠가 있었다. 싸움이 벌어져 레몽이 다치고 소동이 마무리되지만 뫼르소는 답답함을 느끼며 시원한 샘 가로 간다. 레몽과 함께간 그곳에서 우연히 레몽을 찔렀던 아랍인을 만난다. 그리고 레몽은 뫼르소에게 총을 건네준다. 뫼르소는 그가 꺼내는 칼의 강렬한 빛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을 그에게 다섯 발 쏜다(한 발을 쏘고 뒤이어 네 발을 연달아 쏜다).
그는 처음에는 법정 등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로 끝날 것이라는 결과를 들었고, 국선변호사[1] 나 예심판사[2] 도 '당신의 사건은 별 볼 일 없는 정도로 취급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3]
하지만 어이없게도 법정의 주요 화제는 아랍인 살해건이 아니라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보였고 놀러 다니기까지 했다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는 마리가 법정에서 무심코 증언한 것이었는데, 증언하는 도중에 이 증언 때문에 뫼르소가 불리해지는 것을 깨닫고 운다.
또한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때, 그 스스로가 상황의 모든 맥락을 생략하고는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다'''라는 말만 하는 바람에 배심원들이 뫼르소를 별 것 아닌 일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로 오해한 것도 재판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난하게 풀려나거나 가벼운 형벌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그는 어머니의 장례 건과 불충분한 자기 변호로 인해 계획 살해범과 무자비한 인간으로 부풀려지며 사형 선고를 받았다.
종국에는 신부가 찾아와 그에게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하지만, 그는 신부의 허위적인 면을 꾸짖고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며 거부한다.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은 처형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증오를 퍼붓는 것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3. 해설과 이해
삶의 부조리란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현실에서 오는 것이며, 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기본조건이라고 카뮈는 역설하고 있다. 뫼르소는 여러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어머니의 죽음이나 애인과의 사랑에서도 별다른 의식을 못하고, 죽기 직전에서야 의식이 깨어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이 작품의 아이러니이자, 백미, 그리고 비극적인 면모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뫼르소는 인간의 기본적 깨달음을 성취한다.
민음사 판본 뒤 표지에는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 뫼르소'라고 명시했다. 진실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뫼르소의 성격에서 우러나는 것인데, 예컨대 뫼르소는 아랍인을 쏜 게 뜨거운 태양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뫼르소의 변호사는 뫼르소의 감형을 위해 최대한 말이 되게끔 맞출 것을 제안했으나 뫼르소는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라며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뫼르소는 작중의 어떤 사건이나 서술에서도 거짓을 거부하는 정의를 따르고, 작중 모든 일반인의 시점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 특유의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기에 결국 사형을 언도받게 된다.
뫼르소는 세상 일에 별 관심도 없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새로 생기는 파리 지점에 보내 준다고 하니깐 기뻐하기는커녕 그냥 거절한다... 딱히 갈 이유가 없어서.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대수롭잖게 여긴다. 이러한 뫼르소의 무감수성은 현대인의 모습을 잘 반영한 실존주의 문학의 면모라고 볼 수 있겠다.[4]
사실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에 유학생이고 문학수업을 이 작품으로 나간다면... '''건투를 빈다'''. 어느 작품이 안 그렇겠냐마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카뮈의 작품이나 철학을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고백한다.[5] 작품 내에 수많은 상징적 장치가 있고, 부조리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윤리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대로 읽으면 주인공은 그저 '부모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줄 모르는 소시오패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작품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작품의 철학적 사고관을 독자가 이해한다 한들 작중 인물이 누구나 공감하기는 어려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건 맞다. 그러나 삶의 살과 열기 속에서 뿌리 박힌 실존의식을 감각의 가능성 및 그것에 대한 소화, 반응에 대응하는 작중의 자아의 부유하는 정체성에 감정이입을 해보면 작품의 의미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하여간 이러한 카뮈의 철학을 더 쉽게 대해서 이해하려면 여러 전문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해석하는 것도 좋다. 이방인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은 저자의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이며 이 두 권을 같이 읽는 것이 「이방인」을 이해하기에도, 카뮈 철학을 알기에도 좋다.[6] 물론 이 에세이 역시 만만하지는 않다. 심도 있게 읽으려면 균형 잡힌 서평 혹은 해설서와 함께 며칠 붙잡고 읽거나 아예 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설명을 부탁하자. 원한다면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을 엮어서 설명해 줄 것이다.
4. 영향
이 장편 하나로 카뮈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20대라는 나이에서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에 거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1957년, 44살이라는 무지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7]
또한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서 판매량도 엄청나다. 현재까지 100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전 세계 판매량이 수천만 부에 달한다. 프랑스 내에서 700만 부, 일본에서 4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5. 비판
다만 철학적 주제나 인물이 내포하는 상징을 떠나서 결국 작중 주인공은 내포한 의미와 상징에 괴리감이 있는 인물인데 결국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인 것은 변함이 없다. 작가 본인도 이 인물에게 공감하라고 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에 빗대어 표현한 것도 독자에 따라서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다른 문제점으론 작가 생전엔 고향이자 작품 배경인 알제리가 프랑스 영토였으며, 작가 본인도 알제리인 차별에 반대하고 독립전쟁 때도 중립을 지킨 인물이지만 지배민족이 식민지인을 죽이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는 것이 과거 식민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에게는 반감이 드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인종차별주의자나 제국주의자가 아니지만 작품 속 상황과 배경을 식민지배를 당했던 자신들의 국가로 옮기면 심히 불쾌한 묘사이기 때문.
이와 관련하여 한 네이버 블로거가 이 소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5.1. 비판에 대한 반론
다만 카뮈가 살던 시절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국이나 괴뢰국 지역이 아니라 엄연히 프랑스의 한 지역으로 편입되어 있어서 현대의 탈식민주의 관점으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 알제리는 옆의 튀니지 왕국와 모로코 왕국, 리비아 왕국 같이 기존의 왕국이 있던 곳이 아니라 따로따로 세력이 나누어져 있는 지역에 가까웠는데 이를 오스만 제국이 먹었다가 나중에 프랑스가 차지한 지역이다.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하기 전에는 알제리라는 국가 개념과 알제리인의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위 글의 블로그에서 언급된 일본제국-식민지 조선에 대입해서 빗대기에는 무리가 있는 셈. 게다가 작품에서는 알제리 아랍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내용이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이 나오지도 않는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쏴 죽인 것도 단순한 분노나 증오 때문이 아니라 자기 친구가 걱정되어서 가 봤다가 우연히 샘에서 쉬고 있는 아랍인을 보고 그 아랍인이 칼을 꺼내자 햇빛이 반사되어 충동적으로 쏴 죽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위의 입장은 작품이 내포하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는데 국내와 해외 문학을 막론하고 현대 문학은 작품이 내포하는 의미와 철학을 배제하면 그 스토리가 이상하고 왜곡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카뮈가 뫼르소가 현대의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도 단순히 작품 속 인물의 행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의 내포된 의미인 무심하지만 진실함을 추구하고 부조리에 맞써 싸우는 면모를 말한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의 등장인물은 어딘가 행동이 왜곡되어 있고 2부에는 비정상적으로 작위적인 부분도 등장한다. 이러한 부분은 소위 말하는 상징적인 부분으로 이는 위의 블로그 화자도 만화 초반부에서 인정한 사실이다. 복잡한 의미와 철학을 배제하고 보아도 작품을 보자면 예절과 도덕성이 결함성이 있는 주인공이 사람을 죽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것보다 화자의 행적이 불순하다는 의도에 집중하며 사형을 시킨 셈인데 이것도 어찌보면 카위의 부조리극적 요소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작품을 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억압성과 알제리 전쟁이라는 현대의 끔찍한 참극에만 집중하고 그 외의 면은 보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되며 이는 지나치게 비약적인 비난이다.
6. 기타
주인공의 이름 '뫼르소'가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을 의미하는 단어의 앞부분을 따 조합되었다.
카뮈의 다른 소설인 페스트에서 '알제에서 한 상사의 직원이 바닷가에서 아랍인을 죽였다' 라며 이 소설에서 벌어진 사건이 지나가듯 언급된다.
또 번역본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은 문어체(단순 과거)가 아니라 구어체(복합 과거)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래서 그 당시 이와 같은 표현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어에서는 현재와 관련 없는 과거를 표현할 때에는 단순 과거를, 현재와 관련 있는 과거를 표현할 때에는 복합 과거를 사용한다.[8] 회화에서는 단순 과거를 사용하지 않고 복합 과거만 사용한다. 결국 거칠게 말하자면 단순 과거는 문어체, 복합 과거는 회화체에 사용된다고 보면 된다. 해서 일반적인 소설은 현재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단순 과거를 사용하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용법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소설에서 복합 과거를 사용했다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 현실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카뮈 역시 다른 소설인 페스트에서는 문어체를 사용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대차게 깐 소설이기도 하다. 이유는 인종차별적 내용. 진짜로 인종차별적인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주인공이 직접적인 인종차별 행위를 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의견이 갈린다. 만약 아랍인과 프랑스인이 같이 칼을 들고 서서 주인공을 눈부시게 했는데 주인공이 아랍인만 쏴죽였다면 그건 빼도 박도 못할 인종차별이었겠지만 말이다. 작중 인물들의 언행에서 인종차별 의식이 묻어나오긴 하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알제리에서는 무시당한다. 알제리인이 같잖게 나오는 점도 있지만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인에게 탄압을 하지 말고 자치권을 주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제리 독립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 물론 그가 사악한 제국주의자나 국수주의자여서 그랬던 건 아니고, 자세한 건 알베르 카뮈 문서에 적혀있다.
더 큐어의 데뷔 싱글 'Killing an Arab'은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제목 때문에 욕을 꽤 얻어먹었다. 결국 'Kissing a Arab'이라는 제목으로 개사되었고 첫 앨범에는 실리지 못했다.
7. 번역 논쟁
[1] 뫼르소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고 또 필요를 못 느끼겠다고 시크한 태도를 보였지만 예심판사 쪽에서 법은 법이라고 선임해 줬다.[2] 이 사람을 심문하던 예심판사는 이 사람을 종교적으로(물론 기독교) 감화시키려고 하지만 뫼르소가 무신론자인 것을 알게 된 데다가 뫼르소 역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자 포기하고 나중에는 그냥 가볍게 '적그리스도씨'라고 부른다.[3] 그 당시의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였던지라 프랑스인이 알제리인을 죽였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쌀 수 있었으니.[4] 그런데 정작 카뮈 본인은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겼다. 실존주의가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사르트르)을 강조했던 반면, 카뮈는 스스로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인간의 자세를 탐구했기 때문.[5] 하지만 문장 자체는 간결하고 구어체로 쓰인 덕분에 어렵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워낙 분석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까다롭진 않다.[6] 카뮈는 하나의 주제를 묶는 방식으로 소설과 철학책, 희곡을 썼다. 부조리라는 공통적 주제를 다루는 내용이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이고, 유사하게 집단적 반항을 다루기 위해 소설 페스트와 철학서 <반항하는 인간>을 썼다.[7] 역대 2번째의 연소 수상자며 최연소 수상자는 41세로 수상한 정글북의 러디어드 키플링.[8] 완전히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영어에서의 과거 시제와 현재 완료 시제를 생각해 보면 대충 어떤 차이인지 느낌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