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
1. 弛緩
사전적인 의미로서의 이완.
- 긴장 같은 기분이 흐트러짐.
- 분위기나 상황이 갑자기 흐트러짐.
- 조여있던 근육이 풀림. 반댓말은 수축이다.
2. 인물
2.1. 실존 인물
2.1.1. 李莞
1579년 ~ 1627년
조선시대의 무관. 자는 열보(悅甫). 이순신 장군의 맏형인 이희신의 아들로 이순신의 조카다. 이순신의 형인 이희신과 이요신은 모두 일찍 죽었는데 그래서 형들의 가족도 '''모두 이순신이 부양했다'''고 한다. 당시 정읍 현감으로 내려가는 이순신에게 조카들을 모두 데려가면, 탄핵받아 또 쫓겨날테니 다 두고 가라고 주변에서 권유했으나, 정작 이순신은 '''두 형님이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조카들을 내가 버리면 세상 어디에 의존하겠는가?'''라며 정읍으로 모두 데리고 내려갔다. 다만 이는 주변 사람들이 인정머리가 없어서 조카를 두고 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지방으로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일가 친척들이 몰려가서 붙어먹는 짓들이 많아 지방민들의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를 남솔(濫率)이라 한다. 물론 정읍으로 내려간 뒤에는 주변의 우려가 완전히 불식될만큼 그 가족들이 처신을 잘했다. 임진왜란 당시 숙부 이순신을 따라 해전에 참전했고 특히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임종을 지키고 이후 싸움에서 독전한 인물로 유명하다. 아마 이순신의 가족 중 제일 유명한 인물일듯 하다.
전란이 끝난 후 무과에 급제[1] 해서 무관 직을 지냈는데 인조 때 일어난 이괄의 난 평정에도 공을 세웠다. 그리고 정묘호란 무렵에는 의주 부윤을 지냈는데 이때 가도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군 모문룡의 패악을 참지 못해 모문룡의 병사들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강등되기도 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한이었던 듯. 아마 이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적인 성품의 배경에는 평생을 청렴 강직하게 살았던 숙부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2]
마침내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후금군이 의주를 공격하자 분전하다가 결국 전사했다. 성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탄약고와 함께 자폭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설이 있으니, 이완이 후금군 침공 전날 술에 대취해 자고 있었는데 적이 공격해오자 술이 덜 깬 채로 전투에 나섰다가 불화살을 쏘려던 중 화살을 떨어뜨려 그게 쌓여 있던 화약을 유폭시켰다는 것.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거두인 김상헌의 형 김상용도 강화성 함락 당시 같은 사인[3] 으로 죽었다는 무함을 받았다. 두 사건 모두 진위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조선 조정에서는 두 사람의 사인이 자폭임을 공인했다. 두 사건 모두 그들을 시기하거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이들이 퍼뜨린 낭설이라는 게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특히 이러한 자폭설을 부인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당시 임금인 인조였다. 사후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2.1.2. 李浣
1602년 ~ 1674년
조선 시대의 무관.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바로 위의 이완과 혼동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자부터 전혀 다르니 주의할 것. 이 이완은 바로 위의 이완과는 다른 의미로 유명한데, 바로 효종이 북벌을 꾀할 때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완의 부친 이수일은(1554년(명종 9년) ~ 1632년(인조 10년))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에 활약한 잔뼈가 굵은 무인이다.명종 때 태어난 인물로 임진년 때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태어난 년도와 부친 이수일의 나이로 보건데 이완은 이항복처럼 늦둥이였다.[4] 부친의 뒤를 이어 이완도 무관직에 종사했다.병자호란 때 정방 산성 등 여러 곳에서 분전했고 최명길의 천거로 무관으로서는 드물게 승지를 지내기도 했다.이후 포도 대장을 역임했고, 효종이 즉위하고 효종의 군사력 증강 정책에서 어영 대장을 맡아 병제와 군비를 재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훈련 도감의 대장도 지냈는데 원래 훈련 도감 대장 자리는 공신이나 외척이 임명되곤 했지만 이완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 효종 사후 현종 때까지도 훈련 도감 대장 직책에 있었다.이후 현종 말년에는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현종이 죽던 1674년에 사망했다. 사후 정익(貞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여러가지 의미에서 효종과 현종 두 부자와 함께 한 인물이다.
뭔가 사람됨이 특이했는지 야사와 민담에 이완의 기행과 재치와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라면 산적 두목을 부하로 영입했다는 이야기. 포도 대장을 역임할 때에 한 부하가 큰 도적을 잡아들여 이완에게 보고하기를 "죄가 많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놈이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포도 대장을 뵙겠다고 합니다." 그가 만나보니 젊었을 적에 안면이 있었던 자라 특별히 사면하고 부하로 삼는다.[5][6]
밤중에 효종의 호출을 받은 이완이 궁에 들어서자 화살들이 날아왔는데 태연히 효종의 대전까지 들어갔다는 이야기. 대전으로 들어선 이완에게 효종이 안 놀랐냐고 묻자 철릭 속에 갑옷을 입고 있어서 효종이 이완의 대범함과 철저함에 탄복한 이야기는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도 '''대장이 직접 말 먹이를 줄 만큼'''의 '''솔선수범형의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허생전에 나오는 이완이 바로 이 사람이다.그런데 허생전에서는 허생이 내놓는 치국책에 아무 것도 못 하겠다고 발뺌하다가 허생이 화를 내며 칼을 뽑아들자 줄행랑을 치는 굴욕을 당한다. 하지만 이인이 있다는 변씨의 말을 듣고 허생의 집에 직접 찾아가거나, 허생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기 위해 집에 다시 찾아간다는 점에서 보통 인물이 아님을 은연중에 나타내기도 했다.[7]
2.2. 가상 인물
[1] 본래 이완을 비롯해 이회, 이분 등 이순신의 아들 및 조카들은 아버지이자 숙부인 이순신을 따라 수군에 종군했는데 일개 의병으로 참전했다. 당시 조선의 국법에는 '상피제'라고 해서 친인척들이 같은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이를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2] 말이 숙부지 사실상 양부나 다름없었다. 친부인 이희신은 이완이 아주 어릴때 요절하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줄곧 이순신이 이희신의 가족들을 부양했으며 좌천되거나 백의종군을 하는 등의 고난의 시기에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친자식들 못지 않게 정성을 다했다. 이희신과 이요신의 자제들 역시 숙부를 매우 잘 따랐다고 한다.[3] 김상용은 화약더미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불이 튀어 폭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자살할 것을 알고 김상용의 하인이 주저하자 담배를 피우겠다는 핑계로 불을 가져오게 한 다음 자폭했다고 한다.[4] 이완이 태어났을 당시 부친 이수일의 나이는 만 47~48세로 요즘에도 이 나이에 자식을 얻으면 늦둥이 소리를 듣는다. 하물며 혼인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이른 조선시대에 47~48세에 자식을 얻었다면 항렬만 자식이지 손자뻘에 가깝다.[5] 이완이 젊었을 적 사냥을 갔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저멀리 불빛이 보여 가보니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떡하니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니 왠 여인이 있어 여긴 산적 소굴이고 자신은 잡혀온 여자인데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며 이완을 내쫒았다. 하지만 이완은 배가 고프다며 밥을 얻어먹고 배부르니 졸리다고 그대로 누워 자는게 아닌가. 곧이어 산적 두목이 들이닥쳐 태평스레 자고 있는 이완을 보자 기가 차서 밧줄로 묶고 칼로 위협했으나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완의 배짱에 놀란 두목은 이완을 풀어주고 큰절을 올렸다. 두목이 말하길, 젊어서 점을 봤는데 포도 대장에게 잡혀 참수당한다는 예언이었다. 지금 행동으로 보건데 이완이 미래의 포도 대장감이니 훗날 자신이 죄를 짓고 잡히면 살려달라는 약조를 받아냈다.훗날 이완이 정말로 포도 대장이 되고 산적 두목이 잡히자 약속을 지키고 그의 용력을 높이 사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6] 이완이 젊은 시절 사기꾼에 속아 한겨울에 옷을 뺐기고 홀딱 젖은 체로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한집 사랑방에 들어가 안주인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밥을 얻어먹고 옷을 빌려 자신의 집마냥 잠을 청하니, 안주인이 참다못해 따끔히 꾸짖었다. 안주인의 말에 이완도 부끄러워 나가려던 찰나, 바깥 양반이 들어와 숨어버렸다. 바깥 양반은 방안이 어지럽혀있자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웃으며 오히려 이완을 가엽게 여겼다. 몰래 듣고 있던 이완은 그대로 엎드려 절하며 집주인 부부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고, 성명을 물었으나 언젠가 연이 되면 알게 될 것이라며 넘겼다. 수십 년 후 조정에 출사한 이완이 이때 일을 끄집어내자 그 자리에 동석했던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길, 그때 그 집주인은 자신이었고 불청객이 바로 이완이었느냐며 웃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이완이 어려울 때의 은혜를 어찌 잊겠냐며 정태화를 극진히 모셨다.[7] 시대상 다른 사람이었다면 허생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포졸을 보냈을 것이라 묘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