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조선 제56 · 59대 영의정
정광필
鄭光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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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 '''世祖 8年 - 中宗 33年'''
'''제56대'''
1516. 04. 09 - 1519. 12. 17
'''제59대'''
1527. 10. 21 - 1533. 02. 28

'''이름'''
정광필 (鄭光弼)
'''출생'''
1462년 (세조 8)
한성부 회현동
(현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사망'''
1538년 (중종 33) (향년 77세)
'''사인'''
노환으로 인한 사망
'''묘소'''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직업'''
관료, 유학자
'''종교'''
유교 (성리학)
'''재임 기간'''
제56대 영의정
1516년 4월 9일 - 1519년 12월 17일
제59대 영의정
1527년 10월 21일 - 1533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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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244> '''시호'''
문익 (文翼)
'''본관'''
동래 정씨 (東萊)
''''''
사훈 (士勛)
''''''
수부 (守夫)
'''국적'''
[image] 조선
'''부모'''
부 : 익혜공 정난종
모 : 완산 이씨
'''배우자'''
은진 송씨
'''자식'''
슬하 4남
정노겸 (鄭勞謙), 정휘겸 (鄭撝謙)
정익겸 (鄭益謙), 정복겸 (鄭福謙)

1. 개요
2. 중종 이전
3. 중종시기
4. 여담


1. 개요


'''중종 재위 기의 최장기 정승'''[1]
본관 동래. 자 사훈. 호 수부. 시호 문익. 서울 회현동 출생.
정광필 집터 링크 #

2. 중종 이전


아버지 정난종(鄭蘭宗, 1433 ~ 1489)은 세조 시절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이시애의 난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조참판이 된 인물로 신공신 세력 중 하나였다. 1469년 세조실록의 편찬자 중 하나였고, 이후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고위 관료였다.
정광필 본인은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504년 갑자사화에게 간하다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3. 중종시기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2]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3]
조광조의 득세를 가장 많이 막았지만[4]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5]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6] '작서의 변'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훗날 경빈 박씨에 이어 복성군이 사사되자 "진성군을 죽일 때는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그래도 됩니다."라고 했다가 명예직인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537년 총호사로서 장경왕후희릉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었으나,[7]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8] 중추부영사로 이듬해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중종의 묘정과 회덕의 숭현서원, 용궁의 완담향사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군포시에 있으며 문집 《정문익공유고》가 남아있다.

참고로 조광조 등장 전 남곤은 차세대 정승감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때 정광필도 "미래의 정승감으로는 남곤이 1순위" 라고 했다.

4. 여담


중종 대 몇 없던 강직하고 융통성있는 신하.[9] 목이 달아날만한 충언을 몇 번이고 아끼지 않았고 이로 인해 좌천되기도 했다.[10] 때문에 박시백은 굉장히 고평가하는 인물.[11] 사상적으로도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조광조와 그 개혁파들과 달리 현실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현량과에 적극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한 것이 예시. 이후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많은 학자들이 경연에서 정광필을 높이 평가한다.[1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격서 혁파 등에 찬성한 걸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기본은 갖추되, 야인을 습격하자는 일이나 현량과 실시 반대, 향약 반대로 보아 현실적인 유연함도 갖추고 있고 강직하다고 하면서, 조광조에게 몰아준 힘의 일부를 정광필에게 주어 조광조를 개혁의 엔진으로 정광필로 하여금 그것을 적절히 제어했으면 성공했을것이라고 했다.[13] 박시백 작가는 정광필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는지 인터뷰에서 '평전 같은 걸 쓸 수 있다면 써 보고 싶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재상의 역할에 가장 충실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고. 그래서인지 정광필을 다룬 중종실록의 한 편 제목 자체가 ''''참 정승''' 정광필'이다. 중종의 배향공신으로 오른 4명 중 한 명인데, 나머지 3사람은 다름 아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다. 정광필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도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회현동의 은행나무길에 있는 500년 가까이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순조 시대 때 간행된 한경식략(漢京識略)에 실린 전설에 따르면 정광필의 집 앞에 심어졌던 나무로, 신인(神人)이 정광필의 꿈에 나타나 정승이나 쓸 수 있는 물소의 뿔로 만든 서대(犀帶)[14]가 12개 걸릴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는 정승 12명이 배출된다는 얘기인데 한경식략 시절에 이미 10명의 정승이 채워졌고, 이후 고종과 순종 시절에 한 명씩 더 배출되어 딱 12명[15]을 채웠다고 한다.[출처]
위의 집터 얘기 외에도, 진주목사까지 지낸 할아버지 정사(鄭賜)의 묘자리가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있는데, 면과 리의 이름이 '지보'를 거꾸로 하면 되는 그 단어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풍수학자들은 지보리의 지형이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국이며 그 중심이 되는 여근에 정사의 묘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에 우리나라 8대 명당 자리에 속한다고 하며, 옥녀단좌형(玉女端座形 - 옥녀가 남자와의 관계를 위해 단정히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의 명당이라고 한다.# 해당 자리에는 이미 다른 가문에서 묘자리를 쓰려고 했던 곳인데, 묘자리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오자 포기하자, 정사의 가문에서는 주변에 우물을 파 물길을 그쪽으로 돌리고는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광필의 집터와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워낙에 관직에서 두각을 드러내니 이런 저런 전설들이 그쪽과 연관되어 있다.
신숙주의 후손이자 당시 정승이었던 신용개와도 우정이 아주 돈독했다고 한다.

[1] 정승기간이 14년이며 영의정만 두번에 걸쳐 11년을 했다. 현실로 치면 국무총리를 두 번에 걸쳐 14년동안 해먹은 셈[2] 이 사이에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지만 사관은 그가 백성을 위한 대책을 많이 내세울 것 같다고 생각해 임명한 것이지만 정작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고 평가한다.[3] 참고로 정승에 오르기 전에 성희안이 "이 사람 만한 정승감이 없습니다." 라며 추천했다.[4] 현량과 실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가 남곤과 정광필이다.[5] 이때 정광필은 조광조의 죄를 적어놓은 문안에(이건 중종의 명령으로 남곤이 썼다. ) 딴지도 걸고(가장 크게 딴지를 건게 조광조의 죄안은 대신들이 죄를 알고 써놓은 양 했는데 이에 정광필은 "우린 부른 뒤에 알았는데요?" 라고 했다. 어쨌든 정광필 덕에 죄안의 일부가 고쳐지기도 했으며 기묘사화 가담자들도 처벌의 수위를 낮췄고 조광조의 목숨도 조금 연장되었으며 처벌 대상자들의 처벌도 조금 낮춰졌다. 그 중에 일부는 얼마 안가 죽게 되었지만.) "조광조의 죄는 파직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붕당은 큰 죄인데 함부로 할 수 없고 조광조를 앉힌 건 전하잖아요."하며 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봤지만 실패했다.[6] 이때는 심정, 이행, 이항 등이 영의정엔 명망가를 앉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앉게 되었다.[7] 이에 백성들은 다들 슬퍼했다고 한다.[8] 근데 실권이 없었기에 실정이랄것도 없다.[9] 이는 중종 시절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이다.[10] 기묘사화때는 중종에게 밉보여서 정승에서 물러나야 했고 김안로가 권신이던 시절에는 김안로에게 밉보여서 정승에서 물러나야 했다.[11] 다른 인물들은 모두 하나씩 까는게 있는데 정광필은 까는게 없다.[12] 그 당시는 워낙 사림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조광조 축출에 앞장선 남곤 등은 비판을 엄청 들었지만, 울면서 간한 정광필은(하도 상황이 뭣하다 보니 파직만으로 끝나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높이 평가하는 걸 볼 수 있다.[13] 실제로 정광필은 실권이 없었다. 중종은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들어줄 뿐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중대한 일일수록...[14] 관복 같은 옷에 두르던 띠[15] 정유길(鄭惟吉), 정지연(鄭芝衍), 정창연(鄭昌衍),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지화(鄭知和), 정재숭(鄭載嵩), 정석오(鄭錫五), 정홍순(鄭弘淳), 정존겸(鄭存謙), 정원용(鄭元容), 정범조(鄭範朝). 하지만 정광필 자신까지 넣으면 13명이 되어 예언이 틀리게 된다.[출처] 지명이 품은 한국사 4 서울·경기도 편, 이은식 저, 타오름 출판, ISBN13: 9788994125152, ISBN10 : 8994125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