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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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鎭江
1943년생
대한민국의 법조인. 현직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전직 검사. 한때는 '''재야 법조계의 뚝심 리더'''라 불리기도 했다.기사 참조
1943년 서울에서 포천 양조장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1]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정몽준, 박근혜가 그의 후배였다. 중학교 때는 포천군 일동면에서 2학년까지 다니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1962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때 62학번 동기생 나길자[2] 에게 반하여 프러포즈를 했다.[3] 2학년 초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해 4학년 때인 1965년에 제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5회 합격자는 모두 16명. 동기생으로는 이원성(전 국회의원), 유지담(전 대법관), 김영일(전 헌법재판관) 등이 있었다.
1971년 광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광주지검 목포지청, 1975년 서울지검, 1978년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을 거쳐, 1980년 법무부에서 검사로 일을 하였으며, 1981년 서울고검 검사를 겸임하다가, 1983년 대검찰청 형사제1과장검사로 승진하였다.
1985년에는 서울지검 동부지청 부장검사가 되었고, 1986년에는 대검찰청 중수부 제1과장검사가 되었다. 대검 중수부에 일하던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최초보고를 받았고, 당시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쇼크사했는지 물어본 중앙일보의 기자의 질문에 확인하는 답을 해주어 중앙일보에 특종기사가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감을 전격 구속했다.[4] 이로써 한국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검사가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5공 비리 청산업무를 주도했다. 그때 중수부 라인은 말 그대로 드림팀이었는데, 1과장은 이진강이었고, 2과장은 강신욱(전 대법관), 3과장은 이명재(전 검찰총장), 4과장은 이종찬(전 서울고검장)이었다. 한 달 반 동안을 강행군하여 전경환과 염보현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과로한 탓인지 건강을 잃었고, 결국 어느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 후 1988년 서울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가 되었다. 그 당시 동부지청에서 조직폭력이 연루된 법정증인 살해사건이 터졌다. 대통령까지 관심을 표시해 거의 한 달 동안 밤늦게까지 검사들을 독려하여 사건을 해결했다. 그리고 1990년 서울고검으로 옮겼다가 1993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렇게 검찰에서 한참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1987년부터 계속되어온 격무로 건강을 잃은 것이 회복되지 않아, 결국 1994년에 검찰을 나왔다. 그 후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병마를 이겨냈다.
김대중 정권 시절이던 1999년에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본디 보수성향이지만 진보성향의 젊은 변호사들에게서도 인기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서울변협 회장의 임기를 마친 뒤인 2001년 11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007년 1월에는 제44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대한변협 회장 시절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도입에 반대하였지만, 끝내 로스쿨법 통과를 막지 못했다. 그 당시 "로스쿨이 설치되지 않은 대학은 법학부를 포함해 인문계가 전멸할 수밖에 없다." "대학 전체가 로스쿨 입시준비학원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은 그 후 실제로 들어맞고 말았다.
2009년에는 제2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2015년 이후로는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고대법대 62학번 동기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뒀다. 아내는 병으로 5년 동안 비틀거리는 남편이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하면서 대학입시를 앞둔 연년생 삼남매에게 정성을 쏟았다.
장남 이문한은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대검찰청 공안2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공형사부장, 광주지검 공안부장을 거쳐 2017년 8월 현재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일하고 있다. 딸 이세인은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둘째아들 이명한은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서 일하고 있다.
李鎭江
1943년생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현직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전직 검사. 한때는 '''재야 법조계의 뚝심 리더'''라 불리기도 했다.기사 참조
2. 생애
1943년 서울에서 포천 양조장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1]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정몽준, 박근혜가 그의 후배였다. 중학교 때는 포천군 일동면에서 2학년까지 다니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1962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때 62학번 동기생 나길자[2] 에게 반하여 프러포즈를 했다.[3] 2학년 초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해 4학년 때인 1965년에 제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5회 합격자는 모두 16명. 동기생으로는 이원성(전 국회의원), 유지담(전 대법관), 김영일(전 헌법재판관) 등이 있었다.
1971년 광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광주지검 목포지청, 1975년 서울지검, 1978년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을 거쳐, 1980년 법무부에서 검사로 일을 하였으며, 1981년 서울고검 검사를 겸임하다가, 1983년 대검찰청 형사제1과장검사로 승진하였다.
1985년에는 서울지검 동부지청 부장검사가 되었고, 1986년에는 대검찰청 중수부 제1과장검사가 되었다. 대검 중수부에 일하던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최초보고를 받았고, 당시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쇼크사했는지 물어본 중앙일보의 기자의 질문에 확인하는 답을 해주어 중앙일보에 특종기사가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감을 전격 구속했다.[4] 이로써 한국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검사가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5공 비리 청산업무를 주도했다. 그때 중수부 라인은 말 그대로 드림팀이었는데, 1과장은 이진강이었고, 2과장은 강신욱(전 대법관), 3과장은 이명재(전 검찰총장), 4과장은 이종찬(전 서울고검장)이었다. 한 달 반 동안을 강행군하여 전경환과 염보현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과로한 탓인지 건강을 잃었고, 결국 어느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 후 1988년 서울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가 되었다. 그 당시 동부지청에서 조직폭력이 연루된 법정증인 살해사건이 터졌다. 대통령까지 관심을 표시해 거의 한 달 동안 밤늦게까지 검사들을 독려하여 사건을 해결했다. 그리고 1990년 서울고검으로 옮겼다가 1993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렇게 검찰에서 한참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1987년부터 계속되어온 격무로 건강을 잃은 것이 회복되지 않아, 결국 1994년에 검찰을 나왔다. 그 후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병마를 이겨냈다.
김대중 정권 시절이던 1999년에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본디 보수성향이지만 진보성향의 젊은 변호사들에게서도 인기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서울변협 회장의 임기를 마친 뒤인 2001년 11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007년 1월에는 제44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대한변협 회장 시절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도입에 반대하였지만, 끝내 로스쿨법 통과를 막지 못했다. 그 당시 "로스쿨이 설치되지 않은 대학은 법학부를 포함해 인문계가 전멸할 수밖에 없다." "대학 전체가 로스쿨 입시준비학원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은 그 후 실제로 들어맞고 말았다.
2009년에는 제2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2015년 이후로는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3. 가족관계
고대법대 62학번 동기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뒀다. 아내는 병으로 5년 동안 비틀거리는 남편이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하면서 대학입시를 앞둔 연년생 삼남매에게 정성을 쏟았다.
장남 이문한은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대검찰청 공안2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공형사부장, 광주지검 공안부장을 거쳐 2017년 8월 현재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일하고 있다. 딸 이세인은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둘째아들 이명한은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