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풍(1727)

 

'''도정궁의 역대 주인'''
9대 이형종

'''10대 이풍(이례)'''

11대 진안군 이언식

'''도정궁 9대 사손'''
'''이풍 / 이례
李灃'''

'''본관'''
전주(全州)
'''이름'''
풍 / 례(灃)
'''초명'''
양(瀁)
''''''
매은(梅隱)
''''''
양지(瀁之)
'''생부'''
이형종
'''생모'''
정경부인[A] 은진 송씨(恩津 宋氏)
'''부인'''
정경부인 진주 강씨(晉州 姜氏)
정경부인 전의 이씨(全義 李氏)
'''자녀'''
5남 5녀
'''생몰
기간
'''
'''음력'''
1727년 10월 23일 ~ 1795년 6월 30일
'''양력'''
1727년 12월 5일 ~ 1795년 9월 14일
1. 개요
2. 생애
3. 죽음
4. 여담
5. 가족과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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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출신 문신. 도정궁의 제9대 사손(嗣孫)[1]이자 제10대 주인이다.
'澧'의 음이 두 개다. 거의 '풍'으로 읽지만 '례'로도 읽는다. 그래서 '이례'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1727년(영조 3년)[2] 10월 23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덕흥대원군의 8대 사손인 돈녕도정 이형종과 정경부인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특별한 행적은 확인하기 힘들다.
21살이던 1747년(영조 23년)에 그의 동생 이철해가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로 입양가 달선군에 봉해지고 이름을 이영으로 바꿨다. 그런데 달선군이 양모의 핍박에 못이겨 1년 뒤 자살하는 사건을 지켜봐야 했다.[3]
33살이던 1759년(영조 35년)에 아버지 이형종이 사망하자 덕흥대원군 사손이 세습하는 작위 돈녕도정에 제수받았고 사손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동지돈녕부사 겸 부총관 및 지논녕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고 왕실 족보를 교정하는 일 및 제용고(濟用庫)[4]와 내섬시(內贍寺)[5] 일을 관리, 감독했다.

3. 죽음


1795년(정조 19년) 6월 30일에 별세했다. 향년 69세. 첫 부인 진주 강씨와 합장했다. 신도비의 글은 장남 진안군 이언식이 짓고, 글씨는 둘째 이민식이 썼다.

4. 여담


  • 묘표문에 한 수가 적혀있다. 이풍이 도정궁정자 매은정(梅隱亭)에서 읊은 시이다.
>강호미퇴신여퇴(江湖未退身如退)
>명주시래흥역래(明酒時來興亦來)
>
>몸은 강과 호수에서 떠나지 않은데 이 내 몸은 떠나가고
>어느 때 흰 술 오니 흥도 역시 오네

5. 가족과 자손


정실부인으로 진주 강씨전의 이씨를 두었다. 강씨 부인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고 이씨 부인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다. 소실에게서 2남 2녀를 두어 총 5남 5녀를 낳았다. 그의 사후 도정궁 사손 지위는 장남 진안군 이언식이 이었다. 이후 계보는 진안군(1752) 참조.


[A] 사후 추증.[1]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2] 영조는 이풍의 할아버지 뻘이다. 즉, 이풍은 정조와 같은 항렬이다.[3] 이후 다시 대가 끊어진 낙천군의 대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이 입양와서 이었다.(단, 입양 당시에는 은신군도 이미 사망했다.)[4] 고려 공양왕 때부터 생긴 부서로 전국 각지에서 바쳐 온 저마포(苧麻布) · 피물(皮物) · 인삼(人蔘) · 사여(賜與)하는 의복 등을 맡아 보던 관청.[5] 조선 시대 각 전(殿)과 궁(宮)에 제공할 음식물과 제물 등을 맡아보고, 2품이상의 관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