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군(1752)

 

'''도정궁의 역대 주인'''
10대 이풍(이례)

'''11대 진안군 이언식'''

12대 완성군 이희

'''조선 중종의 11대손 | 도정궁 10대 사손'''
'''진안군
晉安君'''

'''군호'''
진안군(晉安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언식(彦植)
''''''
원방(元邦)
'''생부'''
이풍
'''생모'''
정경부인 진주 강씨(晉州 姜氏)
'''부인'''
덕수군부인 덕수 장씨(德水 張氏)
창원군부인 창원 황씨(昌原 黃氏)
거창군부인 거창 신씨(居昌 愼氏)
'''자녀'''
2남 1녀[2]
'''생몰
기간
'''
'''음력'''
1752년 8월 13일 ~ 1819년 8월 9일
'''양력'''
1752년 9월 20일 ~ 1819년 9월 27일
1. 개요
2. 생애
3. 죽음
4. 가족과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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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문신. 도정궁의 제10대 사손(嗣孫)[3]이자 제11대 주인이다.

2. 생애


1752년(영조 28년)[4] 8월 13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덕흥대원군의 9대 사손인 판돈녕부사[5] 이풍(이례)과 통덕랑 강주직의 딸 정경부인 진주 강씨적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살이던 1782년(정조 6년)에 음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6] 참봉(永祐園 參奉)을 거쳐 1783년(정조 7년) 동부(東部)의 도사(都事)[7]와 봉사(奉事)[8]를 역임했다.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증산현령과 합천군수직을 맡은 뒤 남원, 황주부사전주 판관 직을 수행했다.
1795년(정조 1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도정궁 사손이 되었다. 3년 뒤 덕흥대원군 사손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통정대부 '돈녕도정'(通政大夫 敦寧都正)에 제수받았으며 1799년(정조 23년)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이후에도 사옹원 부제조[9] 및 오위도총부 부총관[10]으로 임명받았으며, 원래 정조의 건릉 공사를 책임지는 수릉관(守陵官) 직을 맡던 안춘군을 대신하여 수릉관 대행을 맡다 곧 정식으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맡았다.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그를 '진안군(晉安君)'으로 봉했다. 진안군의 직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중종이었기에 중종의 4대손인 이언식의 8대조 응천군 이돈까지는 왕족으로 대우받고 그 이후로는 일반 양반이었다. 그런데 도정궁 사손에게 군 작위를 수여한다는 것은 앞으로 ''''대원군의 사손은 대대로 왕족 지위를 세습하게 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신하들 중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11] 왕실의 후손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때문에 순조가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이 때부터 한일합방 때 까지 도정궁의 사손은 군 작위를 받으며 왕실의 주요 종친으로 활동했다.
종친이 된 그 해 효명세자결혼 때 주 관리자로 활약했고 도총관에 임명되어 봉직했다.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종묘의 향제 헌관으로 여러 번 차출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3. 죽음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1819년(순조 19년) 8월 9일 도정궁에서 별세했다. 향년 68세.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수락산 덕릉마을 내 덕흥대원군묘 권역에 있다.

4. 가족과 자손


사별을 두 번 하여(...) 정실부인으로 덕수군부인 장씨와 창원군부인 황씨, 그리고 거창군부인 신씨, 이렇게 3명을 두었다. 그러나 세 부인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소실에게서는 1남 1녀를 두었다.
결국 적자가 없어 사후 생가 친조카이자 족보 상으로 5촌 당질인 완성군 이희양자로 들였다. 이후 계보는 완성군 참조.

[1] 군호는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3]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4] 영조는 진안군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즉, 이언식은 순조와 같은 항렬이다.[5] 判敦寧府事.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돈녕부에 둔 종1품 판사(判事)다.[6] 1789년(정조 1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으로 개칭.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숭된 이후 융릉으로 재개칭.[7]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처음에는 사무 위주였으나 뒤에는 관리의 감찰 규탄을 주로 맡아보았다.[8] 조선시대 종8품의 문관직.[9] 司饔院副提調. 궁궐 내 음식물의 공급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부서.[10] 五衛都摠府副摠管. 조선시대 오위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기관.[11] 조선왕조실록 -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2월 6일 무진 2번째 기사 : '한기유(韓耆裕)는 말하기를, “종친의 4대 뒤에 단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만을 인습하게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제가 있고, 공신의 적장(嫡長)으로서 2품에 오른 뒤에 봉작을 이음도 또한 타당치 않습니다.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의 황태자 관례시에 종정경(宗正卿)이 주인(主人)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왕조의 《오례의(五禮儀)》는 실로 개원례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이언식(李彦植)을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로 삼아 종정경의 일을 행하게 한다면, 역시 한때의 임시 변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했으며, 규장각 직제학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돈녕부 도정을 대대로 이음은 《속대전(續大典)》에 있는 바가 또한 매우 명백합니다. 현재 이를 변통하는 것을 갑자기 논의하기란 아마도 어려운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