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종(1706)

 

'''도정궁의 역대 주인'''
8대 이명회

'''9대 이형종'''

10대 이풍(이례)[1]

'''도정궁 8대 사손'''
'''이형종
李亨宗'''

'''본관'''
전주(全州)
'''이름'''
형종(亨宗)
''''''
성백(城伯)
'''생부'''
이명회
'''생모'''
정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
'''부인'''
정경부인[A] 은진 송씨(恩津 宋氏)
정경부인[A] 여흥 민씨(驪興 閔氏)
'''자녀'''
4남 3녀
'''생몰
기간
'''
'''음력'''
1706년 6월 7일 ~ 1759년6월 10일
'''양력'''
1706년 7월 16일 ~ 1759년 8월 2일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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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출신 문신. 도정궁 제8대 사손이자 제9대 주인이다.

2. 생애


1706년(숙종 32년)[2] 6월 7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증조할아버지 이홍일 자택에서 덕흥대원군 7대 사손 이명회와 정부인 평산 신씨 사이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1722년(경종 2년)에 일어난 임인사화 때 작은 증조할아버지 이홍술과 큰아버지 이명좌가 처형당하고 아버지 이명회 역시 전라도 부안현 위도로 귀양가자 당시 17세 소년에 불과했던 이형종 역시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다.
사실 임인사화는 소론 측에서 노론을 찍어내리려는 무고에 가까웠다. 그래서 영조가 즉위하고 1년 뒤인 1725년 3월에 연좌받았던 친족들이 전부 신원받으면서 그도 도정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 이명회가 큰아버지 이명좌 대신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도정궁 사손이 되면서 이형종은 도정궁의 후계자가 되었다. 1727년(영조 3년) 이명회가 죽은 후 사손 지위를 물려받아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제수받았다. 이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임명받았다.

3. 사망


1759년(영조 35년) 윤 6월 10일 별세하였다. 향년 54세.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지금의 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 수락산 뒤편에 묻혔다. 1788년(정조 12년) 5월에 아들 이풍의 건의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받았다.

4. 가족과 후손


정실 부인이 2명이었다.[3] 은진 송씨 사이에서 2남 1녀를, 사별하고 재혼한 여흥 민씨에게서 1남을, 그리고 이름 모를 소실에게서 1남 2녀를 낳았다. 도정궁의 이후 가계는 이풍(1727) 참조.
참고로 송씨 부인 사이에서 낳은 차남이 이철해이다. 이철해는 1747년(영조 23년)에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로 입양가 달선군(達善君)에 봉해지고 이름을 이영(李泳)으로 바꿨다. 그러나 양모 서씨의 핍박에 못이겨 1년 뒤 불과 18세의 나이로 자살하였다. 달선군은 죽은 뒤 양모 서씨의 건의로 파양당하고 말았다.

[1] '李澧'인데 '풍'을 '례'로도 읽는다.[A] A B 사후 추증.[2] 숙종은 이형종의 할아버지 뻘이다. 즉, 이형종은 효장세자, 사도세자와 같은 항렬이다.[3] 후일 정경부인으로 추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