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릿집

 

1. 개요
2. 역사
3. 논란
4. 기타
5. 매체에서
6. 역사적으로 유명한 요릿집들


1. 개요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한복남, 빈대떡 신사(1943)

이름만 들으면 그냥 식당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기생'''[1]을 두고 과 요리를 파는 집.

2. 역사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한자로는 요정(料亭)이라고 하는데 원래 일본에서 쓰이던 한자말 '료테이'(りょうてい)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예전에 정치인들은 여자를 끼고 이곳에서 정치에 관련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일명 '요정정치'라고도 불린다.현대의 룸살롱에 비견되는 곳. 꼭 여자를 끼지 않더라도, 이전부터 이런 고급 요릿집이 일종의 안전가옥 역할로서 정치판의 고급 정보 및 위험한 정보들이 오가는 곳이기도 해서 역사적으로도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전성기 시절엔 국악전공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장소로 각광받던 곳이다. 물론 접대부 말고 말 그대로 국악기 연주하는 일을 말한다. 70년대 기준으로 3~4 시간 정도 연주하면 십만 원씩도 받을 정도였으니. 현대에도 이런 아르바이트는 남아 있지만 요릿집이 아닌 일반 고급 한식당에서 하는 편이다.
근래에는 룸살롱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고급 한식집으로써의 이미지 변신을 시작, 상당 부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이 아무리 고급이고 맛있다고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 주머니로는 살떨리지 않을 수가 없다. 뭐 가격 좀 비싸더라도 질 높은 서비스와 고급 한식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3. 논란


일명 '기생관광'의 육성을 위해 세금 혜택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기사.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올 예정이다.
서울특별시의 고급 요정에서 '''성매매'''를 한 것이 무더기로 적발되어 새삼 화제가 되기도 했다.

4. 기타


아무래도 전통 문화를 유지한다는 이미지도 있어, 접대부들이 한복을 입고 일한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
일본 료테이에서 유래한 만큼 일본에도 비슷한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 진짜 요릿집뿐 아니라 토비타신치 같은 집창촌도 요리조합과 요릿집의 구색을 갖추고 장사한다.

5. 매체에서


일제강점기 혹은 1950~60년대까지를 다룬 매체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소이다. 내부자들(영화)에서도 등장한다.

6. 역사적으로 유명한 요릿집들


  • 대원각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1951년 개장.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2]이 운영했던 곳으로, 1997년법정 스님에게 시주해서 길상사란 절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청운각
1956년 조차임이 이시영의 사저인 종로구 청운동 자택[3]을 빌려서 개장. 청운각의 전성기에는 다른 요정은 다 아래에 있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 이곳에서 맺어졌다. 이러던 와중에 조차임이 암에 걸리자 자산을 정리해서 '우산육영회'란 이름의 장학재단을 만들면서 없어졌다.
  • 삼청각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건축가 정재원이 설계 후 현대건설이 시공해 1972년에 개장해서 1980년대 전까지 청운각이 없어진 서울 최고의 요정이었으며, 요정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나름 괜찮게 사용된 것이라면 7.4 남북 공동 성명 만찬장으로 사용되었다거나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 장소로 쓰였다거나 하는 등의 일도 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룸살롱 시대가 열리자, 요정은 고급 중국요릿집이 되었다가 망해가다가, 서울시의 문화시설 지정을 받은 것을 계기로 요정 이미지에서 탈피해 전통 문화 공간의 이미지로 변하려 노력 중이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 중 하나로 전통 혼례 공간으로도 거듭났다. 활옷에 사모관대를 갖추고 전통 혼례 방식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다만 옛날 삼청각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에게는 기생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해 싫어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원래 개인 소유였으나 1999년 화엄건설에 소유권이 넘어가 고급주택 부지가 될 뻔했으나, 2001년부터 서울시가 매입해 공연시설은 세종문화회관, 한식당은 한화개발(현 한화호텔앤드리조트 FC부문)이 각각 위탁운영했다가 2005년에 소유권이 파라다이스에 넘어갔으나, 2009년 세종문화회관으로 넘어갔다. 현재 공연 및 전시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고급 한정식집으로 성업중이다.
  • 선운각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으며, 1980년대까지 밀실정치 3대 요정하면 대원각, 삼청각, 그리고 선운각이었다. 원래 김재규의 내연녀였던 장정이가 1967년 개점했는데, 당시 한옥 몇채를 뜯어와서 그 부속품으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 중 일부가 안국동에 있던 안동별궁으로 보인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포함해서 정치계 인사는 물론이고, 외국 국빈 대접용으로도 써먹었다고 한다. 유명한 정치사건인 정인숙 살해사건의 정인숙이 근무했던 곳으로도 유명했다. 이 때문에 10.26 사건 이후에 격동이 벌어지면서 중앙정보부와 연결고리가 끊어져서 다른 사업자가 구입해서 한정식 집을 열었다가 망했다. 그 자리의 일부를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구매해서 기도원과 사택으로 쓰고 있고, 다른 일부는 다시 고깃집이 되었다가 이곳도 다시 망한 상황이다. 그래서 서울시가 삼청각을 문화시설로 지정한 것처럼, 강북구가 이곳을 문화시설로 지정하려는 듯한 모습이 가끔 보이는 상황. 삼청각과 비슷하게 이곳에서도 전통혼례를 올릴 수 있다.
  • 오진암
1953년 개장했으며, 서울시의 첫 등록 식당이기도 하다. 3대 요정이라느니 하는 유명세는 다소 떨어지지만 그 바로 다음으로 언급될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요정정치하면 여기도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 김두한의 단골집 중 하나였으며, 이후락이 북한의 박상철과 만나서 7.4 남북 공동 성명을 사전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완전히 몰락해서, 2009년 성매매 알선하다가 적발되었다는 대표적인 곳이 여기다. 결국 2010년 망했고, 2014년 종로구가 여기 이름을 안평대군의 자택터인 무계정사로 옮겨서 무계원이라고 해서 전통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원래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는데, 무계정사는 부암동이라서 그냥 이름만 가져다 붙인 형태일 뿐이다.
  • 명월관
1909년에 마지막 대령숙수였던 안순환이 현대의 동아일보 사옥 근처에 세운 요정으로, 밑의 태화관의 본점 격인 곳이다. 1918년에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되었다가 종로구 돈의동(현재 피커디리 극장 자리)에 다시 세웠다. 경성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단골[4]이었으며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설향이 만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여담으로 시트콤 오포졸에서 나오는 기방의 이름도 명월관이나, 작품 설정상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관련이 없다.
  • (신) 명월관
일제시대 명월관의 이름을 똑같이 딴 이름만 같은 명월관이지만 역시 유명했는데 왜냐하면 유명한 건달 이화룡의 누이가 운영했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이 들락거렸으며 1960~70년대를 관통한 요정정치의 주역이었다.
  • 태화관
명월관의 분관인데, 아주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원래는 세종의 손녀 부부가 살던 순화궁이라는 궁궐로, 헌종 시기 경빈 김씨의 사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총독부가 국유재산을 몰수하면서 일제에 넘어갔다가, 고종의 강제퇴위에 불만을 품은 민중에게 집이 불탄 이완용에게 일제가 선물하면서 이완용의 사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걸 이완용에게서 명월관이 대여를 하면서 붙인 이름이 태화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바로 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버렸다. 그래서 아주 골치가 아파진 이완용은 이 건물을 감리교 교단에 매각해버렸다. 기존 임차인이었던 명월관 기생들이 이것에 항의하면서 밖에서 노래를 부르니, 이번엔 감리교 교인들도 맞받아서 찬송가(...)를 부르는 노래 시가전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소유권이 넘어갔기 때문에 1921년부터 이 건물은 이후 '태화 여자관'이라는 이름으로 감리교 포교지이자 여성 복지 사회재단이 되었고, 이후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다만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했던 본래 건물은 1935년에 개축을 위해서 헐렸고, 태화복지재단으로 변한 재단이 1995년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전하면서 완전히 역사가 종료되었다. 현재 서울 종로타워 뒤 태화빌딩 자리이다.
  • 동래별장
일제시대 동래 온천장에 건립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 房太郞)의 별장인 박간별장이 기원으로, 하자마는 당시 부산을 기반으로한 대부호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단순 착취의 대상이 아닌,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려 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때는 금강원과 온천장 일대의 근대적 위락시설들의 랜드마크였으며, 일본 황실에서 다녀갈 정도의 호화로움을 자랑하였다. 동래온천과 해방 후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엔 여러 요정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일반음식점으로 운영 중이다.
[1]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기생의 개념과는 약간 다르다. 구한말의 근대화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2] 백석의 시에서 가끔 등장하는 '자야'라는 여인이 바로 그녀이다.[3] 이것도 원래 일본인 땅이었던 것으로 적산불하를 받은 것이다.[4]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인 전형필도 중요한 거래 등을 할 때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