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수

 



<color=#fff> 임화수
林和秀

김한용이 촬영한 임화수의 모습.[1]
<colbgcolor=#000><colcolor=#fff> 개명 전 이름
권중각 (權重珏)[2]
출생
1921년 1월 10일
경기도 여주군(현 경기도 여주시)
사망
1961년 12월 21일 (40세)[3]
서울특별시
1. 개요
2. 생애
2.1. 영화, 연예계의 대부로
2.2. 연예계에서의 갖가지 구설수
2.4. 최후
3. 재평가?
4. 기타
5.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를 자처한 대한민국정치깡패영화 제작자, 경기도 여주 출신, 본명은 권중각(權重珏)이었지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아버지의 성인 임씨를 따랐고 이름까지 바꾸어 임화수가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폭력과 소매치기, 장물 취득 등의 죄목으로 형무소를 들락거렸다. 연예계의 황제라는 별칭이 있었다.
유지광, 이석재 등과 함께 이정재의 대표적인 부하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



2.1. 영화, 연예계의 대부로


[image]
학식은 거의 없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극장 직원으로 일하다가 해방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화극장[4]이 적산자본으로 풀리자 임화수가 거의 껌값으로 인수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영화사를 창업, 영화계와 연예계의 대부로 떠오르게 된다.
여주 옆 동네인 이천 출신인 이정재와의 인연으로 임화수는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에서 2인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이자 권력 실세인 곽영주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권력의 비호를 받아 영화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1955년 한국연예(주)를 세우고 유명 배우들을 전속으로 묶은 뒤 홍콩과 합작으로 1957년 "천지유정"이라는 영화를 제작했고, 그 외에도 15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1959년 3월에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했다.
그런데 임화수가 제작한 영화는 자유당이승만 정권을 찬양하는 관제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1959년에 제작한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자유당으로부터 무려 4천만 환이라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거액을 지원받았고, 감독도 영화계의 거물 신상옥이었으며 당대의 미남 배우이던 김진규가 연기한 이승만의 이미지는 결점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늠름한 우국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임화수는 아아, 백범김구 선생이란 영화를 제작했는데, 여기서는 백범 김구를 찬양하고 이승만은 찌질한 인물로 바꾸어 놓았다.
1958년에는 홍콩의 쇼브라더스와 합작하여 <이국정원>[5]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1949년에 홍성기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여성일기>를 컬러 영화로 제작한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제작된 컬러 영화였고, 이후 1960년에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동시에 컬러로 제작되며 맞붙으면서 한국 영화는 본격적인 컬러 영화의 시대를 열게 된다. 다만 <이국정원>의 컬러 촬영과 현상은 홍콩과 일본의 기술이었으며,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도 현상을 일본에서 했기 때문에, 이 영화들이 순수 국산 기술로 제작된 컬러 영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1956년 최승희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영화화할 때 컬러로 이 영화를 제작하였지만, 북한 자체 기술이 아닌 소련의 기술이었다.
아무튼 <이국정원>은 꽤 오랫동안 필름이 소실되었다가, 2014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이 홍콩영상자료원의 창고에서 이 영화의 필름을 뒤늦게 발굴하여 상영하였으나, 영화의 사운드 필름이 소실되어 본의 아니게 무성영화로 상영이 되고 말았다.

2.2. 연예계에서의 갖가지 구설수


명색이 영화인이라고는 하나 출신이 깡패였던 만큼 본색은 어쩔 수 없었고, 걸핏하면 남자 연예인들을 구타했다.[6] 대표적 사건이 임화수 자신이 주최한 반공 예술인단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인 김희갑을 구타하여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힌 소위 합죽이 구타사건이 있다. 사실 임화수라는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바로 이 김희갑 구타 사건 때문였다. 이환경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임화수가 최무룡을 구타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걸 본 아들, 최민수가 아버지를 모욕했다며 소송드립을 치기도 했다.[7]
거기다 임화수는 권력과 더욱 밀착하기 위해 미모의 여배우나 가수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하는 안 좋은 관행을 만들었다. 곽영주의 주선으로 경무대에서 대통령 이승만을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큰절을 올리면서 "마치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아버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펑펑 쏟자 이것에 껌뻑 죽은 이승만이 임화수를 아들이라면서 총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래도 꼴에 여자는 때리지 않는다며 자부했다고 한다. 영화배우 김지미의 회고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 쯤 여배우들 끼리 모인 자리에서 임화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김지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머머머? 그 미친 개 같은 사람 말야?"이라며 뒷담화를 하던 중 공교롭게도 임화수가 근처에서 그녀를 도끼눈으로 째려보며 지나갔고, 김지미는 퍼렇게 질려서 "아이고 맙소사, 나는 이제 죽었어!" 벌벌 떨다가 며칠 후 임화수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 즉슨 "당신 말대로 나는 미친 개같은 깡패는 맞소. 그러나 난 적어도 여자를 패거나 괴롭히진 않소. 행여 여배우들을 무섭게 주눅들게 했다면 내가 사과하겠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후 김지미는 임화수가 처형되기 몇달 전, 형무소로 찾아가 임화수를 면회했다고 한다. 다만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소속 여배우의 엉덩이를 주물럭 대듯 찰싹찰싹 치는 씬이 나오는데 성폭력에 한해선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4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소위 반공 예술인단을 조직하여 연예인들을 자유당 선거운동으로 내몰았다. 위에 언급한 김희갑 구타사건도 당시 김희갑이 다른 스케줄을 핑계로 선거운동용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던 덕분에 고작 3만환 벌금으로 약식기소되는 것에 그쳤다. 이 사건은 단지 김희갑이 합죽이라는 예명으로 불린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에 대해 김희갑을 구타했다는 이야기로 알려진 경우도 있다.

2.3. 정치깡패


1958년 자유당 감찰부장 등 당직을 맡고 있던 이정재가 이기붕과의 국회의원 선거구 문제로 갈등을 빚은 끝에 당직을 내려놓고 조직에서도 은퇴한 후, 임화수는 이정재의 지명으로 동대문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자유당이 조직한 소위 반공청년단에 참여해 스스로 종로구단 책임자를 맡았고 유지광 등에게 지시하여 조병옥 등 야당의 거물 정치인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임화수가 저지른 결정적인 정치 테러는 1960년 4월 18일에 일어난 고대생 습격 사건으로, 이 사건은 임화수의 명줄을 단축하는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정치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만 받고 얼마 안 가 풀려났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에게 체포,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다.
혁명재판에서 임화수는 뻔뻔스럽게도 자신만 살아남으려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것과 각종 정치테러 및 고대생 습격사건이 이정재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라고 우기면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고 했다. 이정재가 사형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위 화랑동지회 사건도 임화수의 폭로로 알려지게 된 것. 이처럼 임화수는 모든 잘못을 죄다 이정재에게 덮으면서도 자긴 잘못이 없다고 우겨댔는데, 이로 인해 재판 당시 옆에 있던 유지광[8]이 이성을 잃고 포승에 묶인 몸으로 임화수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가 같이 있던 최인규 전 내무장관의 만류로 겨우 진정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9]

2.4. 최후


[image]
교수형 집행 직전의 임화수의 모습이다. 곽영주, 이정재 등과 함께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를 통하여 공개되었다.
사형집행 당일, 사형장에 끌려오면서도 살고 싶다며 몸부림을 치다가 사형장에 들어와서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강경 몇줄을 읊은 후 1961년 12월 21일 곽영주(전 경무대경찰서장), 최인규(전 내무부 장관), 그리고 간첩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조용수(민족일보 사장)와 최백근(사회당 간부)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10] 임화수의 시신은 일명 "눈물의 곡절"이라 불렸던 그의 수행비서 차민섭[11]이 수습했다고 한다.
임화수의 영화사에서 경리 일을 했던 문금순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임화수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임화수의 사형을 면하게 하기 위해 뇌물을 써야 한다는 명목으로 임화수의 가족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금품을 갈취했고, 심지어는 임화수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에도 돈을 뜯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임화수의 사형이 집행되자 그는 임화수의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렸다고 한다.

3. 재평가?


무식한데다 주먹을 휘두르며 저지른 악행이 많다보니 당연히 크게 비판받는데, 그래도 대한민국 영화를 결정적으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며 효자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소수의 목소리도 있다. 실제 임화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20여편이 넘는 영화를 직접 제작했고 영화 제작에 불리한 관련 법규들로 정부를 움직여 모두 개정을 하게끔 했으며 포악하게 그지없는 성격인 듯해도 노모에게는 지극정성이었던 효자였다고 한다. 그의 악행을 신랄하게 표현한 드라마 야인시대무풍지대에서도 사형 집행 직전 가족 면회 장면에서 나레이션을 통해 이 내용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에 본인이 주장한 영화 산업 자체가 관제영화였고, 배우 구타 및 정치적으로 연예인 악용이라든지 잘못한 게 많기에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것보다 못돼먹은 짓이 많다는 게 일반적인 한국영화계 대세이다. 충무로 차차차에서 김학래가 재수없게 재현한 제작자 이미지를 보고 당시 스포츠신문 취재에서도 노영화인들은 그 재수없는 임화수 생각난다고 치를 떨던 걸 봐도 한국영화계에선 아예 거론조차 하기 싫어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한국영화를 발전시킨 조폭이라는 평가는 차라리 이화룡에게 붙이는 게 낫다. 실제로 이화룡은 주먹계에서 완전히 손을 씻었고, 이만희의 데뷔작을 제작했으며,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장희빈 영화도 제작했다. 강대진[12] 감독도 이화룡 아래에서 박서방, 마부를 감독하며 리즈 시절을 누렸다.
또한 안에서는 효자이고 자상한 가장이지만 밖에서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는 일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며 앞의 사실이 그가 망나니짓을 하는 것에 대한 용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차지철이 있다. 고로 이정재를 두둔하는 이들에겐 두고두고 씹힌다. 반대로 임화수를 두둔하는 쪽도 이정재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양쪽은 서로 엄청 원수사이이다.

4. 기타


  • 생전 그의 큰 소원이 바로 문교부 장관[13]이 되는 것이었다. 일자무식 주제에 곽영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관계에 적지않은 로비를 했다고. 실제로 자유당 정권 말엽 임화수 입각설이 관계에서 심심찮게 돌았고 신문에도 뜰 정도였다. 다행히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엎어졌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간 대한민국 문화계와 교육계에 큰 흑역사가 남을 뻔했다.
  • 과거에 비해서는 그나마 깨끗해졌지만 현재에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연예계-조직폭력배 간의 유착관계, 소속사의 갑질, 암암리에 행해지는 성상납, 개그계 특유의 군기 문화 등과 같은 여러 악습에도 영향을 크게 끼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임화수가 없었더라면 김진철 사건 등 연예계의 불미스러운 일들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매체에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싸움 실력이 형편없지 않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사실 나름대로 지분이 있는 다른 간부급과는 달리 애초에 소매치기부터 시작한 밑바닥 인생이었을 테니 아예 형편없는 인물이었으면 받아줄리 만무하므로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다. 게다가 낙화유수의 증언도 있다.

5. 대중 매체에서


그를 연기한 배우들로는 무풍지대연규진을 비롯하여 오지명(제1공화국(드라마)), 조형기(영화 "충무로 돈키호테"), 김학철(대명)[14], 최준용(야인시대) 등이 있는데 야인시대에 나온 최준용의 연기가 가장 유명하다. 최준용이 찌질, 포악, 소인배, 개그 캐릭터에 걸맞는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임화수의 비서인 눈물의 곡절 역을 맡은 코미디언 손헌수를 상습 폭행하는 것은 반 개그화 될 정도로 반복적으로 나오며, 111화 후반부에 자신이 거느리는 연예인들을 집합시키고서 최무룡김희갑을 미친듯이 두들겨 패는 장면을 통해 그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했다.[15] 진정한 악인 이미지는 연규진이 최고지만 연기 자체는 그냥 중박수준이며, 무풍지대 자체가 야인시대보다도 약 10년전의 드라마인 만큼 연출력 또한 평범한 수준. 그러나 김성찬이 연기한 눈물의 곡절은 큰 인기를 끌었고, 임화수와 눈물의 곡절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는 무풍지대를 통해 처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무풍지대와 야인시대 두 작품 다 김희갑 폭행사건은 정확할 정도로 당시를 잘 그리고 있다.
그리고 1990년에 KBS2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 1번지에서 충무로 차차차[16]에서 개그맨 김학래가 아랫사람들에게 반말과 엄청 싸가지없는 태도로 몰아세우는 제작자로 나왔는데 임화수에서 모티브를 딴 역할인 듯. 이를 보고 원로 정치인 이철승이 회고록에서 3류 코미디까지 임화수를 모욕한다고 분노했다. 그리고 충무로 차차차를 본 익명의 원로 영화인이 한 스포츠 일간지에서 그 프로를 볼때마다 자꾸 임화수 그 작자가 생각난다며 치를 떨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영화인들에게는 악몽같은 존재였다.
실제 혁명재판 당시 공판 기록을 보면 대부분 가명으로 고발했는데 실명으로 폭행사실을 고발한 사람들이 세 명 있었다. 한명은 앞서 말한 김희갑, 다른 한명 백범 전문 배우이던 박암, 그리고 최민수의 아버지인 최무룡이었다.
그리고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자 그의 아들인 권태균이나 그와 절친했던 이철승 같은 이들이 드라마가 그를 왜곡했다고 모든 일은 이정재가 벌인 것이고, 임화수는 실제로 정이 많고 그런 사건과는 무관하며 반공 투사였음에도 허구헌날 드라마에서 쓰레기 깡패로만 그린다고 설레발치며, 고소를 한다 뭐라면서 증명할 자료를 찾는다며 당시 영화인들에게 찾아갔다. 하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고 겪은 영화인들은 되려 개소리 집어치우라는 태도로 일관했으며, 허구헌 날 남배우는 패고 여배우들을 건드렸던 임화수를 두둔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결국 고소할 거리 찾긴 커녕, 파고 들수록 임화수가 영화계 깡패 지존이었다는 게 정설이라는 것만 확인하게 되자 알아서들 입을 다물었다. 무풍지대와 야인시대 각본을 쓴 이환경은 권태균의 반발에 내가 틀린 글 쓴 거 아니거등?이라며 무시했을 정도였다.
보수적인 사고관의 이환경조차도 임화수는 개쌍놈으로 쓸 정도이다. 하긴 하던 짓을 찬양해줄 수가 없다. 이철승과 자식과 지인들이나 목청을 높일뿐이고 조중동에게도 정치깡패에 지나지 않은 자를 재평가해 줄리가 없다.
1999년 최무룡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고인이 된 김희갑 폭행 사건에 대해서 그건 김희갑 잘못이라느니 임화수를 반공영웅으로 보상해야 한다느니 여전히 쉴드를 치고 있다. 그것도 김희갑이 살아있을 땐 이런 말하지도 않았다가 그가 세상을 뜨자 이런 말하는 바람에 분노한 김희갑의 유족들에게 고소당할 뻔 했다. 결국 사과와 함께 앞으로 일절 김희갑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기로 하면서 고소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5.1. 제1공화국


김희갑 폭행사건 때 등장. 오지명이 맡은 탓인지 그냥 살벌한 깡패 느낌으로 나왔다. 여기서 김희갑 역으로 출연해서 지상파에 일약 이름을 날리게 된 배우가 정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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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캐스팅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기사.

5.2. 제2공화국


고대생 습격 사건때 박마리아의 지령을 받고 유지광에게 고대생들을 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부분에서 등장한다. 이후 4.19 혁명이 발발하고 계엄이 시작되자 민심을 잡기 위한 송요찬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진다. 결국 유지광이 체포되자 겁먹고 곽영주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곽영주가 알아서 하라며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결국 들이닥친 계엄군에 체포된다. 이때도 상황파악 못하고 계엄군에게 니들 대장이 누구냐며 갑질을 해대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마당이라 씨알도 안먹히고 그냥 질질 끌려간다.

5.3. 무풍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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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지대에서는 연정훈의 아버지이자 한가인의 시아버지인 연규진이 임화수 역을 맡았다. 임화수와 눈물의 곡절 콤비는 이 작품에서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연규진이 눈물의 곡절 역을 맡은 김성찬과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재미를 위해 즉석으로 연기 시범을 했는데, 시범 도중 김성찬의 뺨을 실제로 세게 때리는 바람에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5.4. 왕초


여기서는 임형도(배역은 박철)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김두한, 김춘삼과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는 설정이 있어 가상 인물에 가깝지만, 해방 후 극장을 운영한다든가, 비서를 모질게 대하는 모습, 이정재와 돈독한 관계 등을 살펴보면 임화수의 행적과 거의 똑같다. 드라마에서는 사업에 실패하고, 김춘삼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친 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지만, 편집 된 부분을 보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춘삼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온다.

5.5. 야인시대




5.6. 충무로 돈키호테


  • 1996년에 조형기가 주연한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라는 영화가 있다. 딱히 큰 호평을 받거나 흥행한 영화는 아니지만, 왠지 조형기와 임화수의 행적이 겹치는 영화다.
[1] 한국 광고사진의 대부로 불리는 베테랑 사진작가답게 사진 한 장만으로도 임화수라는 인물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2] 그런데 후손들은 임씨가 아닌 권씨다. 아마도 활동명만 바꾸고 호적명을 바꾸진 않았거나 나중에 권씨 성을 되찾았을 수도 있다.[3] 정치범 사형[4] 현재 종로5가 한일빌딩(KB국민은행 종로5가 지점) 자리다.[5] 한국에서는 전창근 감독이, 홍콩에서는 도광계 감독이 함께 공동 연출을 하였고, 여기에 일본인 감독 와카스기 미츠오도 참여하였으나, 당시에는 한일수교가 되지 않았고, 또한 한국과 홍콩에선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이 굉장히 안 좋았기에 와카스키 미치오의 이름은 영화의 크레딧에서도 삭제되었고, 일본인 스탭이 이 영화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관객들에겐 숨겨졌다. 엄태웅장인이자 이 영화에도 출연했던 배우 윤일봉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 이 영화의 콘티는 와카스기 미츠오가 다 짰고, 현장에서의 연출도 와카스기 미츠오가 다 했다고 한다. 전창근과 도광계도 물론 현장에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이 한 일은 실제로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6] 말이 좋아 구타지 혁명 재판 기록을 보면 담배빵은 기본이었다고 한다.[7] 하지만 임화수 공판기록에도 최무룡 씨의 폭행은 기록되어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최무룡은 임화수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던 몇 안되는 용기 있는 연예인 중 하나였다.[8] 저서인 "대명(무풍지대의 원작)"에서 이정재는 잘못은 많아도 자기 사람들은 끔찍이 아끼던 사람이라고 칭송했다.[9]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신정식과 곽영주가 말렸다.[10] 이정재와 임화수의 부하인 신정식(일명 돼지)은 그 해 10월 19일 사형에 처해졌다.[11] 임화수와는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한때는 부잣집 도련님이라 임화수가 꼼짝도 못했다. 양아치들에게 당하고 있던 차민섭을 임화수가 구해주면서 서로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6.25 전쟁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나며 거지꼴이 된 그를 임화수가 비서로 거두었다고 한다. 이 사람도 야인시대에 나온 것처럼 임화수에게 무진장 얻어맞은 적이 많았다는데, 그러면서도 임화수의 시체를 인수하여 장례까지 치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을 보면 임화수가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친 것은 홀로 남은 노모를 아무도 돌봐줄 이가 없어서였다고. 결국 임화수의 노모는 차민섭이 봉양했다.[12] 1933~1987. 유작인 <몽마르트 언덕의 상투>는 한국 최초 프랑스 올로케이션 영화이다.[13] 1950년대의 문교부는 명칭(文敎:문화+교육) 그대로 문화 분야도 관장하고 있었다. 문화 관련 업무는 1968년 6월에 문화공보부로 분리되었고, 문교부라는 명칭 자체는 꽤나 오래 쓰였다가 1990년에 정부 조직 개편과 더불어 교육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문화공보부는 대통령 소속의 문화부와 국무총리 소속의 공보처로 각각 분리되었다. 그 뒤 문화부는 1993년 문화체육부, 1998년 문화관광부를 거쳐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로 개칭했다. [14] 야인시대에서는 조병옥 박사 역할을 맡았다.[15] 다만 이 장면 때문에 최무룡의 아들 배우 최민수로 부터 고인이 된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방송금지 가처분 소송을 당하는 등 마찰도 있었다.[16] 심형래가 엄청나게 큰 단추가 달린 옷을 입고 영화배우 지망생으로, 임하룡이 감독으로 나온 코너였다. 심형래가 코너 막판에 "잠깐!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영화에서 OO하는 장면이 진짜로 하는거유 가짜로 하는거유? 실감나대~?"라고 친 대사가 유행어가 되어 그 시절 대다수의 꼬맹이들이 따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