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라 간디

 




'''인도 공화국 제3대 총리
The Honourable
इन्दिरा गांधी
Indira Gandhi
'''
'''इन्दिरा प्रियदर्शिनी गाँधी
ഇന്ദിരാ പ്രിയദർശിനി നെഹ്രു
Indira Priyadarshini Gandhi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 간디'''

<colbgcolor=#248c4c> '''출생'''
1917년 11월 19일
영국령 인도 제국 아그라 앤 오드 주 알라하바드[1]
'''사망'''
1984년 10월 31일
인도 뉴델리
'''국적'''
[image] 인도 제국[image] 인도
'''신체'''
163cm, O형[2]
'''학력'''
Ecole de Genève[3] (졸업) (1927-1931년)
Pupil’s Own School (졸업) (1931-1934년)
비스바바라티 대학교[4] (중퇴) (1934-1935년)
옥스포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 B.A.) (-1938년)
'''정당'''
'''인도 국민 회의''']] '''
'''종교'''
힌두교
'''약력'''
인도 정보통신부장관
인도 재무부장관
인도 내무부장관
인도 국방부장관
인도 외무부장관
'''총리직'''
'''인도 제3대 총리'''
'''임기'''
1기:1966년 1월 24일1977년 3월 24일
2기: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1. 개요
2. 행적
3. 가족 관계
4.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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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ndira Gandhi. 1917년 11월 19일 ~ 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제3대 총리.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딸'''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의 딸로 본인도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되는 등 고초도 겪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엔 자신에 반대하는 언론을 억압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비민주적인 통치를 펼쳐 반대파들에겐 독재자 소리도 들었다. 20세기 여성 정치인이 독립운동도 하고 총리도 하고 독재자 소리 듣다 중간에 쫓겨나기도 하고 다시 재집권도 하고 그러다 암살당하고 여러 의미로 다이내믹한 삶을 살다 간 셈이다.
간디라는 성은 남편을 따랐는데, 참고로 남편인 페로제 간디는 '마하트마'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 '''아무 관계 없다.'''[5]

2. 행적


1917년 11월 19일에 알라하바드에서 출생했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를 전공했으며, 대학 재학 중에 페로제 간디(1912~1960)와 만나 결혼했다. 이후 인도로 귀국해 독립 운동을 하다가 13개월 동안 구속되었으며, 인도가 독립하자 아버지인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보좌관이자 퍼스트 레이디 역할로 활동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1964년 인도 국민회의의 당 대표가 되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차기 총리를 인디라 간디가 차지할 것이라는 예측이 파다했고, 심지어 인디라 간디를 후임 총리로 내정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자, 네루는 이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면서 반박했다고 한다. 여하튼 선거 직전 아버지가 사망하자 당 총재 및 총리 자리는 원로 정치인인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1904~1966)가 차지했지만 2년 후인 1966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병사하자 그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당내 치열한 권력 암투가 벌어졌는데, 결국 인디라 간디가 최종 승리하여 총리에 오르게 된다.
1966년 총리가 된 후부턴 1977~80년을 제외하곤 1984년 죽을 때까지 쭉 장기 집권하게 된다. 다만 집권 이후 경기침체로 지지율이 떨어졌고[6] 총리가 된 후 첫 선거인 1967년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개헌선을 훌쩍 넘겼던 1961년 총선에 비해 크게 의석수가 떨어진 283석에 그치는 사실상의 패배를 당한다. 이후 경제 사정이 다시금 상승세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4차 경제계획도 성장률 3.6%로 역시 목표치인 5.6%엔 많이 밑돌았다. 외교적으론 같은 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무력 개입으로 파키스탄을 패배시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원했다. 1974년에는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로 인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하여튼 이런저런 와중에도 정권은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으나, 1975년 6월 25일에는 부정선거 때문에 6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자 비상 사태를 선포해 강압적인 통치를 펼치게 된다. 특히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역 정당들을 심하게 탄압하여 정치적 경쟁자들을 정치범으로 몰아세워 대거 구속, 독재자 소리도 듣게 된다. 허나 이후 인구 조절을 위하여 산아제한 정책을 무리하게 주도하다가 여론의 반발을 불러왔고 여차저차해서 1977년 3월 16일부터 1977년 3월 20일사이에 치러진 선거에서 패해 1977년 3월 24일하야한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야당도 좌에서 우까지 스펙트럼 넓은 십수여개 정파들이 말 그대로 정권을 잡기 위해 서로 손을 잡았던 것 뿐이라[7] 집권 후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1980년 1월 3일1980년 1월 6일에 걸쳐서 치러진 선거에서 어부지리격으로 1980년 1월 14일에 재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그 해 둘째아들인 산자이 간디(1946~1980)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기에 인간적으론 한동안 슬픔에 젖어야 했다.
1984년,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에서 분리 독립을 원하는 시위를 하자, 6월 3~8일 탱크와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수백~수천 명[8]의 사상자를 내는 강경진압을 한다. 허나 이 진압은 시크교도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평소 신뢰하던 시크교도 경호원인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의 총격으로 숨지고 만다.
베안트 싱은 다른 경호원들에게 사살당했고, 부상을 입은 사트완트 싱은 1989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인디라 간디는 본인이 그렇게 극렬하게 시크교도들을 탄압하고도 경호원인 사트완드 싱과 베안트 싱은 그대로 두었는데[9] 그것이 목숨을 재촉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했다. 이 2명의 유족들은 시크교를 탄압하고 많은 시크교인을 죽게 한 인디라 간디를 응징한 영웅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한편 이 암살의 여파는 굉장히 커서 인디라 간디의 죽음에 분노한 힌두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도 뉴델리에서만 시크교도들이 2,000명이나 학살당했다. 더 최악인 것은 인도 정부가 폭동을 진압만 하고 학살자들을 처벌하는데 지지부진했다는 것이다.
결국 더욱 분노한 시크교도들도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을 비롯한 테러로 맞대응하기도 했고 이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인도 정부가 욕을 먹자, 부랴부랴 학살에 대하여 책임 소재를 따지는 등 뒷북을 쳤다.

3. 가족 관계


  • 아래 사진의 왼쪽 2번째가 인디라 간디. 가장 왼쪽은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옆은 아들인 라지브 간디로 지금은 죽은 세 사람은 흑백사진이며 오른쪽에 있는 컬러 사진으로 나온 세 사람은 며느리(즉,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인 소니아 간디(1946~ )[10], 손녀인 프리양카 간디, 손자인 라훌 간디(1970년생). 이 셋은 2020년 현재까지 모두 살아 있으며,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부로 활동하고 있는 인도 정계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들이다. 손자나 손녀가 총리가 된다면 무려 4대에 이르는 총리가 탄생하는 셈. 그렇다보니 네루-간디家는 인도 정계 최고의 명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4. 이야깃거리


  • 아시아나항공인도항공한국에서 출발해 인도 뉴델리로 운항하면서 도착하는 국제공항의 이름이 인디라 간디의 이름을 딴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이다.
  • 시크교도에 대한 무력진압과 국가비상사태 선포, 가족계획을 표방한 산아제한 정책[11] 때문에 벌어진 당시의 비극은 인도의 유명 작가인 로힌턴 미스트리의 소설 『적절한 균형(A Fine Balance)』에 잘 묘사되어 있다.
  • 네루가 감옥에 갇힌 1930년부터 그는 옥중에서 수시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때 당시 인디라 간디의 나이는 13살이었고, 그 내용은 안부편지에 더해 세계사 이야기였다. 그게 바로 세계사 편력.
[1] 현재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프라야그라지.[2] 증거[3] 제네바국제학교.[4] 타고르국제대학교.[5] 인도에서는 간디라는 성이 우리나라 김씨, 이씨처럼 흔하다고 하다. 물론, 네루의 딸이라서 그런지 마하트마 간디와 어려서부터 친분은 있었다. 인디라 간디가 6살 때 마하트마 간디와 같이 찍은 사진.[6] 1950년대 인도에서 1차 경제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2차 경제계획도 일단 대충 목표는 맞추웠던 것으로 나오면서 야심차게 3차 경제계획을 짜냈는데, 중인전쟁의 여파로 3차 경제계획은 목표치 5.6%를 훨씬 밑도는 성장률 2.4%에 그치고 만다.[7] 인도 인민당의 전신격인 자나타 당과 시크자유연합은 물론이고 공산주의 정당인 혁명사회당, 인도 맑스주의 공산당, 노동자농민당까지 포함한 빅텐트 연합이었다. 이러니 정권이 제대로 굴러갈리가 없었다.[8] 인도 정부의 공식 발표는 492명이지만, 시크교 측에서는 수천 명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9] 본래 시크교도들은 육식과 운동을 권장하고 힘을 키우는 걸 장려했기 때문에 체격이 좋고 힘도 쎄 오래전부터 군인이나 경호원으로 선호되어 왔는데, 시크교도 독립운동 탄압 이후 측근들은 계속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을 해임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디라 간디는 그들을 크게 신뢰하여 그대로 경호원으로 임용했고 총 맞기 직전까지도 그들에게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10] 이탈리아 출신으로 인도 최초의 (귀화) 외국인 의원이기도 하다. 사실 남편도 유세 도중 폭탄 테러에 숨진 비극이 있다.[11] 문제는 빈민층에게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하는 등 강압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