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국민 회의
1. 개요
인도의 정당. 인도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이자 현 시점에선 제1야당이다.
2.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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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이 지도하는 독립운동 단체로 시작했고[2] , 독립 이후부터는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인도의 독립운동가 겸 초대 수상이기도 한 자와할랄 네루를 시작으로, 그의 위상을 입은 딸 인디라 간디와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과 며느리(소니아 간디), 손자(라훌 간디)까지 네루의 후손들이 4대째 당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네루-간디 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17~2019년 당 총재로 재임한 라훌 간디(1970년생)도 네루의 외증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외손자다.
참고로 인도 국기에도 들어있는 수레바퀴 문양은 본래 이 정당의 상징에서 유래한 것이다.[3]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청천백일 무늬가 국민당 당기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한 사례.
1945년부터 1977년 총선 때까진 인도의 유일무이한 집권정당이었다. 하지만 3차 경제계획이 예상보다 저조한 성과를 거두고 필요성은 있었다지만 무리하게 진행된 산아제한 정책[4] 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언론, 정적 탄압 등으로 강하게 억누르는 인디라 간디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잠깐 야당이 되었다.
허나 당시 인도의 집권당이 인디라 간디를 끌어내리기 위해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이 연합한 짬뽕 세력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내분이 일면서 1980년 총선에서 다시 압승을 거두며 정권에 복귀했고, 인디라 간디가 1984년에 암살당하고 12월까지 추모열기가 유지되면서 국민회의는 엄청난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1989년에 정권을 상실하지만 1991년 총선에서 유세 중이던 인디라 간디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폭탄테러로 사망하면서(...) 추모열기로 다시금 집권할 수 있었다.
1996~2003년까진 인도 인민당이 성장하면서 야당 신세가 되었다가, 2004년 총선에서 다시 집권하면서 만모한 싱 총리 체제 아래 인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는 평을 듣게 된다.[5] 덕분에 2009년 재집권도 했지만 2010년대 초중반 들어 성장이 정체되면서 2014년에는 다시 야당으로 밀려난다.
이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의 힌두교 근본주의식 극우화에 위기감을 느낀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우선 2018년 12월 7일의 라자스탄 주 선거[6] 에서 인도 인민당을 누르고 110~140석 사이의 자리를 가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2019년 총선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권교체까진 아니어도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정도는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실제 인도 인민당도 2010년대 중후반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하필 총선을 앞두고 다시 경기침체가 와 인도의 실업률이 45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국민회의로선 호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겨우 52석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고, 당수인 라훌 간디는 자신의 정치기반인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메티 지역구까지 인도 인민당에 뺏기는 굴욕을 당한다. 이 지역구는 과거 어머니 소니아 간디의 지역구이기도 했고, 심지어 큰아버지 산제이 간디와 부친 라지브 간디의 지역구이기도 한 곳이라 라훌 간디에게는 상징성이 엄청나게 큰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을 인도 인민당에게 내준 것. 그나마 케랄라 주에서 당선되어[7] 정치생명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정치 리더로선 회생이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된 요인으론 당수인 라훌 간디의 리더십과 비전 부족, 네루-간디 가문의 이름만 강조하는 식상한 선거전략, 어머니 소니아 간디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 등 내외부의 곪은 살을 결국 제거하지 못한 댓가가 크다는 것이 거론된다. 실제 정당 성향과는 별개로 다이아몬드 수저라 할 수 있는 라훌 간디에 비해 정적인 나렌드라 모디는 비록 힌두 극우 정당인 인도 인민당 출신이라곤 하나, 짜이 행상으로 자수성가해 총리 자리까지 올랐고, 대통령인 람 나트 코빈드 역시 불가촉천민 신분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또 극단적인 인도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라훌 간디가 외국인과 혼혈인 것도 탐탁친 않았을 것이다. 그 외 선거 직전 인도-파키스탄 분쟁이 터지면서 공군이 국지적 전투를 벌이며 강성 힌두파들을 자극할만한 안보 이슈가 주요 선거 변수로 부상한 점도 국민회의 입장에선 별로 득될게 없는 국면이었다.
결국 2019년 총선 이후 라훌 간디 대표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으며, 그 자리는 모친인 소니아 간디가 대행하고 있는데 한동안은 새로운 당대표를 뽑지 않고 있다. 참고로 라훌 간디에겐 프리양카 간디라는 여동생도 있는데, 이 여동생 역시 정계에서 활동 중이다.
2020년 8월엔 당내 인사 일부가 간디 가문에, 좀 더 당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던지 아니면 아예 빠지던지 결단을 하라며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단은 소니아 간디가 임시 대행을 맡는 것으로 유지되는 모양새.#
3. 성향
기본적인 성향은 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당이다. 다만 인도 국민 회의 자체가 사실 중도좌파만 있는게 아니라, 힌두교 전통을 현대적이며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중도우파인 자유보수주의자부터 리버럴, 사민주의자, 급진주의적 사회주의 좌익들까지 다 모여있는 포괄정당 컨셉이긴 하다. 그러다보니 타국의 사민주의 중도좌파 정당보단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띄기도 한다. 그래도 세속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이라 카스트 제도나 힌두교 근본주의와는 거리감이 있는 정당이긴 하다.
4. 기타
터키의 정당인 공화인민당과 공통점이 몇 있는데, 건국의 주도 세력(네루, 아타튀르크)들이 세워 각국의 초기 정치사를 주도했고 세속주의 성향에 장기 집권도 해봤지만, 2020년대 시점에선 종교 근본주의 성격을 가지는 소위 '스트롱맨' 정권(나렌드라 모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득세하면서 이에 맞서는 세속주의 중도좌파 제1야당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정당 모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 진보동맹의 정회원이기도 하다.
5. 역대 선거결과
1934 42/147
1945 59 / 102
1951~52 364/489 45.0%
1957 '''371/494''' 47.8%
1962 361/494 44.7%
1967 283/520 40.8%
1972 352/518 43.7%
1977 ''189/542'' 34.5% - 첫 정권 상실.
1980 353/542 42.7%
1984 '''415 / 533''' 49.0%
1989 ''197/545'' 39.5%
1991 244/545 35.7%
1996 ''140/545'' 28.8%
1998 141/545 25.8%
1999 ''114/545'' 28.3%
2004 145/543 26.7%
2009 206/543 28.5%
2014 ''44/543'' 19.3%
2019 ''52/543'' 19.5%
[1] 자와할랄 네루 시절에는 민주사회주의 성향도 보였고 인디라 간디 시절에는 반민주적(독재적) 면모도 보였으나 80~90년대 이후 인도가 민주화되고 보수우익 정당인 인도 인민당이 성장하면서 온건한 자유주의~사민주의적 포지션으로 선회했다.[2] 설립 초기에는 친영국 성향의 단체였지만 1905년 벵골 분할령을 계기로 반영국 독립운동 단체가 되었다.[3] 원랜 인도 최초, 최고(最古)의 비문인 아소카 왕의 석주의 사자상에 새겨진 문양이다. 이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이다.[4] 허나 이때도 인도 인구는 잘만 증가했다.(...)[5] 이때 인도국민회의의 총재는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 소니아 간디였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화 외국인이었기에 총리 자리에 직접 앉지 않고 경제전문가 만모한 싱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포지션을 취한다.[6] 인도에서는 주의회 지방선거일이 주마다 다르다.[7] 인도는 한 후보가 2개의 선거구에서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다.